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A.D 24년 즉위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은 남해(南解)의 태자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요, 갈문왕(葛文王) 일지(日知)의 딸이다(혹은 妃의 성은 朴이요 許婁王의 딸이라 함). 처음 남해가 돌아가고 유리(儒理)가 들어서게 될 때 태보 탈해가 본래 덕이 있는 까닭으로 그 자리를 밀어 주니 탈해는 말하기를 "신기(神器)와 대보(大寶)는 보통 사람이 감당 못하는 바요. 나는 듣건대 성지(聖智)의 인물일수록 이(齒)가 많다고 하니 시험삼아 떡을 씹어 보오" 하여 마침내 유리(儒理)의 잇금(齒理)이 많았다. 이에 좌우와 더불어 받들어 세우고 호를 "尼師今"이라 하였다.
儒理尼師今立 南解太子也 母雲帝夫人 妃日知葛文王之女也 或云妃姓朴 許婁王之女 初南解薨 儒理當立 以大輔脫解 素有德望 推讓其位 脫解曰 "神器大寶 非庸人所堪 吾聞聖智人多齒" 試以餠 三之 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古傳如此 金大問則云 尼師今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其後 金姓亦興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
「2년 봄 2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고 대사령을 내렸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大赦」
「33년 여름 4월 용이 금성 안 우물 속에 나타나더니 이윽고 소낙비가 서북방에서 몰려왔다. 三十三年 夏四月 龍見金城井 有頃暴雨自西北來」
「34년 가을 9월 왕이 몸이 불편하게 되자 신료들에게 부탁하되 "탈해(脫解)는 국척(國戚)의 신분이요 대신의 지위로서 누차 공로와 명예를 나타냈소. 내 두 아들은 재질이 그에 비해 너무도 떨어지니 내가 죽거든 탈해를 대위에 서게 하오. 부디 나의 유훈을 잊지 마오" 하였다.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謂臣寮曰脫解身聯國戚位處輔臣屢著功名朕之二子其才不及遠矣吾死之後殺卽大位以無忘我遺訓」
「34년(A.D 57년) 겨울 10월 왕이 돌아가니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冬 十月 王薨葬蛇陵園內」 위 이사금(尼師今)은 임금이라는 뜻의 고대 말이다. 유리이사금기(儒理尼師今紀) 33년조에 나오는 용(龍)은 해님의 아들 즉 임금을 뜻하고, 우물속에 나타났다는 것은 바다를 통해 온 세력을 뜻하며, "금성(金城) 안 우물 속에 용이 나타났다"는 문구는 석탈해가 바다를 통해 온 세력을 이끌고 신라의 궁성으로 쳐들어 와서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을 쫓아내고 새로운 임금이 되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석탈해(石脫解)는 남해(南解)와 같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쫓아내고 남해(南解)를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7년부터 대보(大補)가 되어 군국정사를 모두 장악하였고, 남해차차웅이 죽은 후 남해차차웅의 아들 유리(儒理)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33년에 유리이사금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신라본기에는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 죽기 1달 전 유언으로 석탈해(石脫解)에게 왕위를 양위했는 것으로 적혀 있으나, 위 문구에 의하면 석탈해(石脫解)는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기 1년 전에 이미 사실상 왕이 되었다.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은 사실상 폐위된지 1년 후 석탈해(石脫解)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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