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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왕기

한들 약초방 2015. 3. 13. 14:19

                                        남해왕기

 

 

원문
南解次次雄立 <次次雄 或云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 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 赫居世嫡子也 身長大 性沈厚 多智略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 <一云阿婁夫人> 繼父卽位稱元

論曰 人君卽位 踰年稱元 其法詳於春秋 此先王不刊1)之典也 伊訓曰 成湯旣沒 太2)甲元年} 正義曰 成湯旣沒 其歲卽 太甲元年 然孟子曰 湯崩 太3)丁未立 外丙二年 仲壬四年 則疑若尙書之脫簡 而正義之誤說也 或曰 "古者 人君卽位

或踰月稱元年 或踰年而稱元年" 踰月而稱元年者 成湯旣沒 太甲元年 是也 孟子云 太丁未立者 謂太丁未立而死也 外丙二年仲壬四年者 皆謂太丁之子太甲二兄 或生二年 或生四年而死 太甲所以得繼湯耳 史記便謂 此 仲壬 · 外丙爲二君 誤也 由前 則以先君終年 卽位稱元 非是 由後 則可謂得商人之禮者矣
주석
▶ 1) 原本 「」. 「刊」의 字이므로 수정.
榮·朝·浩 「」.
▶ 2) 原本 「大」.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 3) 上同.

번역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였다. 김대문(金大問)이 말하였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하였다.>

그는 혁거세의 친아들이다.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은 침착하고 중후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이고 왕비는 운제부인이다. <또는 아루부인이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를 이어서 즉위하여 원년을 칭하였다.

사론(史論): 임금이 즉위하면 해를 넘겨 원년을 칭하는 것은 그 법이 춘추에 상세히 있으니, 이는 고칠 수 없는 선왕의 법이다. 이훈(伊訓)에 ‘성탕(成湯)이 이미 죽었으니 태갑(太甲) 원년이다.’하였고, 정의(正義)에는 '성탕이 이미 죽었으니 그 해가 곧 태갑 원년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맹자에 ‘탕왕(湯王)이 죽자 태정(太丁)은 즉위하지 않았고, 외병(外丙)은 2년, 중임(仲壬)은 4년이다.’라고 하였으니, 아마 상서(尙書) [이훈]에 몇 글자가 빠져서 정의의 잘못된 설명이 나온 듯싶다.

어떤 사람은 "옛날에 임금이 즉위하면 어떤 경우는 달을 넘겨 원년을 칭하기도 하고, 혹은 해를 넘겨 원년을 칭하기도 하였다."고 말한다. 달을 넘기고 원년을 칭한 것은 ‘성탕이 이미 죽었으니 태갑 원년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맹자에서 '태정이 즉위하지 않았다.'라고 한 것은 태정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음을 일컬음이고, ‘2년, 중임은 4년이다.’한 것은 모두 태정의 아들인 태갑의 두 형이 태어나서 2년 혹은 4년만에 죽었음을 말하는 것이니, 태갑이 탕(湯)을 이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사기(史記)에서 문득 중임과 외병을 두 임금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전자에 따르면 앞 임금이 죽은 해에 [남해 차차웅이] 즉위하여 원년을 칭하였으니 옳지 않고, 후자에 따르면 곧 상(商)나라 사람의 예법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원문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 圍4)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棄5)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妄6)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주석
▶ 4) 原本 「國」.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 5) 原本 「」. 「棄」의 古字.
▶ 6) 原本 「妾」.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번역
원년(서기 4) 가을 7월에 낙랑의 군사가 와서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 왕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그릇되이 왕위에 있어, 두려움이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와서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적(賊)이 우리가 국상(國喪)을 당하였음을 다행으로 여겨서 망령되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적이 잠시 후에 물러갔다.

원문
三年 春正月 立始祖廟 冬十月丙辰朔 日有食之
번역
3년(서기 6) 봄 정월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웠다. 겨울 10월 초하루 병진에 일식이 있었다.

원문
五年 春正月 王聞脫解之賢 以長女妻之
번역
5년(서기 8) 봄 정월에 왕이 탈해(脫解)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맏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원문
七年 秋七月 以脫解爲大輔 委以軍國政事
번역
7년(서기 10) 가을 7월에 탈해를 대보(大輔)로 삼아 군무(軍務)와 국정(國政)을 맡겼다.

원문
八年 春夏旱
번역
8년(서기 11)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원문
十一年 倭人遣兵船百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樂浪謂內虛 來7)攻金城 甚急 夜有流星 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至閼川 見石堆 知賊衆乃止
주석
▶ 7) 原本 「求」. 鑄字本에 의거 수정.
번역
11년(서기 14) 왜인이 병선(兵船) 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으므로,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낙랑인이 생각하기를 '나라 안이 비었을 것이다.' 하고 와서 금성을 공격하니 몹시 급박하였다. 밤에 유성(流星)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가 알천(閼川) 가에 진을 치고 돌무더기 20개를 만들어 놓고 갔다. 6부의 군사 1천 명이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토함산(吐含山) 동쪽에서부터 알천에 이르러 돌무더기를 보고서 적의 무리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중지하였다.

원문
十三年 秋七月戊子晦 日有食之
번역
13년(서기 16) 가을 7월 그믐 무자에 일식이 있었다.

원문
十五年 京城旱 秋七月 蝗 民饑 發倉 救之
번역
15년(서기 18)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의 곡식을 풀어 그들을 진휼하였다.

원문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獻之
번역
16년(서기 19) 봄 2월에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인장을 얻어 [나라에] 바쳤다.

원문
十九年 大疫 人多死 冬十一月 無氷
번역
19년(서기 22) 질병이 크게 번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겨울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원문
二十年 秋 太8)白入太9)微
주석
▶ 8) 原本 [大].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 9) 上同.
번역
20년(서기 23) 가을에 금성[太白]이 태미(太微) [별자리]에 들어갔다.

원문
二十一年 秋九月 蝗 王薨 葬蛇陵園內
번역
21년(서기 24) 가을 9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왕이 죽어[薨]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