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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박씨가

한들 약초방 2015. 3. 14. 16:14

                                        밀양 박씨가

 

밀양(密陽)
밀양(密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원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제 23대 왕, 재위기간: 514 ∼ 540)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때 와서는 995년(성종 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1390년(공양왕 2) 밀양부(密陽府)로 승격, 그후 여러 차례의 변신을 거듭하다가 1895년 밀양군(密陽郡)으로 개칭하였다.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 제 54대 왕, 재위기간: 917 ∼ 924)의 8대군 중 세자(世子)인 박언침으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져, 단일본관(單一本貫)으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伐族)임을 자랑하여 왔다.
박씨(朴氏)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밀양 박씨는 중시조(中始祖) 언침이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진 연유로 해서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으며,
8세손 언부(彦孚: 문하시중을 지내고 밀성부 원군에 봉해짐)를 파조(派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8세손 언상)·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8세손 언인)·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8세손 양언)·
판도공파(版圖公派: 8세손 천익)·
좌윤공파(左尹公派: 8세손 을재)·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 10세손 원)·
밀성군파(密城郡派: 13세손 척)·
동정공파(同正公派 : 13세손 원광)·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15세손 중미)·
정국공파(靖國公派: 15세손 위)·
규정공파(糾正公派: 16세손 현)

크게 12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分派)되었고,
10세손 환(桓)이 영암 박씨(靈岩朴氏)로 분적(分籍)하는 등 10여 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각 계통별로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종파(宗派)인 8세손 언부가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신(權臣) 최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문하시중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 (密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에서 은산군(銀山君) 영균(永均)을 비롯한 13개 파가 형성되었다.
밀성부원군 언부의 차남 의신(義臣: 고려 인종 때 공부상서를 역임)의
후손에서는 사문진사(四門進士) 원(元: 의신의 맏아들)의 계통과 의흥위(義興衛)로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던 척(陟: 의신의 현손)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원(元)의 8세손 의중(宜中)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에 장원하고 우왕(禑王)때 대사성(大司成)과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뒤에 공신(功臣)에 올랐으며,
조선이 개국(開國)하자 조 준(照 準)·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했고, 목은(牧隱) 이 색(李 穡)의 문인(門人)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우아한 문장(文章)으로 문치(文治)에 고명(高名)하였다. 문종(文宗)때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재직중 야인(野人)
토벌에 전공을 세웠던 거겸(居兼)은 의중의 손자이며 증판서(贈判書)인 경빈(景斌)의 아들로 성종(成宗)때 좌리사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고려 충목왕(忠穆王)때 문과에 급제한 중미(中美: 의신의 7세손)는 공민왕때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보리공신(輔理功臣)으로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인 생원(生員) 사눌(思訥)의 아들 (惺)이 한강(寒岡) 정구에게 글을 배우고 선조때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들어가 임진왜란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때는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막료로 종군,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大長)으로 활약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했으며 후에 공조 좌랑(工曹佐郞)과 안양 현감(安陽縣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상주(尙州) 싸움에서 순절한 호의 아들 종남(宗男)은 선조때 상주와 광주(廣州)의 목사(牧使)를 거쳐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영신(榮臣)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광해군의 뜻을 반대하다가 북관인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었으나 장사(壯士)이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진도(晋島)로 이배(移配)되었다. 인조 반정 후 경원부사를 거쳐 풍천부사(豊川府使)로 있을 때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하다 포로가 되었는데, 그의 용맹을 알고 있던 이 괄 이 마음을 돌려 협력할 것을 간청했으나 굽히지 않고 달려드니 그의 기절(氣節)에 적장(賊將)인 이수백(李守白)도 감동하여 죽이기 아깝다고 하였으나 살려 두었다가 후환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참살(斬殺)하자,
피를 뿜으면서까지 욕을 했다고 한다. 조선 정종의 부마(駙馬)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오른 의 7세손 정원(鼎元)이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역임했고, 그의 종손(宗孫) 신규(信圭)는 호조 판서(戶曺判書)를 지낸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목사(牧使) 율(栗: 척의 11세손)의 아들인 이서는 선조(宣祖)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주서(注書)로 사관(史官)을 겸했고, 임진왜란 때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어 분조(分朝)를 배종(陪從)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순찰사종사관(巡察使從事官)으로 황해도 지방의 병량을 담당했다.
광해군(光海君)때 폐모론(廢母論)이 대두되자 여러 차례 대북파를 탄핵했던 그는 뒤에 무고를 받아 삭직되었다가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복직되어 전라도 관찰사 이창준(李昌俊)의 탐학 행위를 개탄하여 사직했다. 그의 아들 노는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순검사 종사관으로 왕(王)을 강화(江華)에 호종한 공으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고, 인조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신(使臣)으로 적진에 세 번에 걸쳐 들어가 조약을 어기고 불침입한 것을 공박하다가 40여일 간 잡혀있었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을 역임했던 현(鉉)은 평장사 효신(孝臣)의 8세손으로 조선 개국과 더불어 집현전 부제학에
등용되어 수원 부사를 거쳐 안변부사로 나가 임지(任地)에서 생을 마쳤다.
특히 그는 성리학에도 밝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淸白吏)로 세간(世間)의 칭송(稱頌)을 받았으며, 후대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규정공 (鉉)의 손자 사경(思敬: 좌랑 문유의 아들)은 고려조에서 전법판서(典法判書) 겸 상장군(上將軍)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推城翊威功臣)에 책록외었으며, 그의 아들 공민왕 때 전의판사(典儀判事)를 역임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개성(開城)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의 둘째 아들 강생(剛生)은 고려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사(議政府事)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태종(太宗)때 등용되어 수원부사로 재직중 과천 현감(果川縣監) 윤돈(尹惇)의 전별연(餞別宴)에서 금천현감 김 문(金 汶)이 과음으로 죽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세종(世宗)때 안변부사를 지냈고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아들 심문(審問)은 세종조에 김종서(金宗瑞)가 육진(六鎭)을 개척할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야인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을 건의했고,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가 살해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복위를 모의했으며, 14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義州)에 이르러 사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자결을 했다. 강생(剛生)의 손자로 세조 때 정난이등공신(靖難二等攻臣)에 책록되어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진 중손(仲孫: 좌찬성 절문의 둘째아들)은 대사헌(大司憲)과 공조를 비롯한 4조의 판서(判書)를 거쳐 밀산군(密山君)에 개봉(改封)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남이 부사를 지냈고, 차남 미(楣)는 대사간과 예조 참의를 거쳐 여지승람(輿地勝籃)을 편찬했으며 시문(詩文)에 현달했고, 막내 (楗)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으로 5대의 왕조(王朝) 를 거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에 책록되어 밀산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찬성공(贊成公) 신생(信生: 규정공 의 현손, 전서공 의 막내아들)의 현손 (英: 이조 참판 수종의 아들)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외손자로 주역(周易)·천문·지리·의술 등에 능통했으며,
무예(武藝)에 뛰어나 용맹을 떨침으로서 중세의 명인(名人)으로 이름났다.
특히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기 한 벌을 유물로 물려받는 가통(家 統)이 있었다. 어느날 저녁 무렵 화려한 옷차림에 준마를 타고 남소문(南小門)을 지나는 데, 골목 어귀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며 부르므로 그가 말에서 내려 따라가니 집이 깊숙한 곳에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그 여인은 그를 대하자 홀연히 눈물을 흘렸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귓속말로 "공의 풍채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인하여 비명에 죽겠소" 하였다. 그가 무슨 뜻인가를 따져 물으니 미녀는 "도적의 무리가 나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죽이고, 입은 옷과 타고 온 말과 안장을 나누어 갖고 살아온 지가 해포가 되었습니다.
내가 매일 이 곳에서 탈출할 것을 생각해 왔으나 도둑의 일당이 많으므로 잡혀서 죽을까 두려워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나를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는 칼을 빼어 들고서 잠을 자지않고 있었는데, 밤중이 되자 방의 윗쪽 다락으로부터 여인을 부르는 소리가 나면서 큰 밧줄이 내려왔다. 그는 몸을 솟구쳐 벽을 차 무너뜨리고 급히 여자를 업고 몇겹의 담을 뛰어넘어 나와서는 여인이 붙잡는 옷자락을 잘라 버리고 달려 나왔다. 그 이튿날 벼슬을 사직하고 선산(善山)으로 돌아와 무인(武人)의 노릇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고, 옷자락이 잘린 옷을 보이면서 항상 손자들에게 경계하였다고 한다. 그는 낙동강변에서 두문불출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여 아래와 같은 시(詩)로 마음을 달랬다.
<멀고 먼 남쪽 변방에 바닷 기운이 어두워 오는데/
투구 쓰고 갑옷 입던 바다를 지키는 늙은 왕 손일세./ 기린각 위에 이름을 남길 생각은 전혀 없고/ 낙동강 언덕 마을에 내 집이 있도다.>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원근의 학자들이 모두 송당선생(松堂先生)이라 일컬어 스승으로 섬겼다고 하며, 의서(醫書)로 경험방(經驗方)과 활인신방(活人新方)을 저술했다.
존성재(存誠齋) (楣)의 아들 6형제 중에서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으로 문의(文義)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던 의영폐비 윤씨(尹氏: 연산군의 생모)의 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목천(木川)에 유배당한 광영(光榮: 중종 때 형조 참판을 역임), 성종 때 호당(湖堂)에 뽑히고 교리(校理)를 지낸 증영(增榮), 황해도 감사를 지내고 부제학에 올랐던 소영(召榮), 승지(承旨)를 지낸 안영(安榮) 등이 유명했으며, 증영의 아들 (薰)은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신진사류로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가 의주에 이배(移配)되어 15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밀성군(密城君) 광영의 손자인 낙촌공(駱村公) 충원(忠元: 별좌 의 아들)은 명종 때 단종의 원령(怨靈)으로 잇따라 7명이 죽어가는 영월 군수를 자청하여 부임해 가서 제물(祭物)을 갖추어 제사지내며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왕실(王室)의 맏이요, 유충(幼沖)하신 임금으로 마침 비색(否塞)한 운수를 당하시어 바깥 고을로 손위(遜位)하시었으니, 한 조각 청산(靑山)이요, 만고의 고혼(孤魂)이라, 바라건대 강림(降臨)하시어 향기로운 제전에 흠향하소서>하며 원령을 위로하여 그로부터 변고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유천차기(柳川箚記)에 의하면 지금까지 사시행사(四時行祀)때마다 이 글을 제문에 쓴다고 한다. 그 뒤 충원은 좌통례(左通禮)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1566(명종 21) 이퇴계(李退溪)의 뒤를 이어 양관 대제학을 거쳐 선조 때 우찬성·이조판서를 역임한 후 지중추부사로 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이 세도가(勢道家)인 윤원형(尹元衡)이 사위를 삼고자 청하는데 면전에서 거절하여 외임(外任)의 벼슬로만 돌았던 계현(啓賢)이며, 계현의 손자가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승종(承宗)이다. 광해군의 폭정 속에서 영상(領相)에 올랐던 승종은 항상 오리알만한 큰 비상을 차고 다니며 말하기를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
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이 물건이 없어서 되겠는가"하며 광해군의 비리적 행동에 항상 진정하지 못하고 방안에 한가히 있으면서 흐느껴 울기도 했으며, 폭주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던 날 그는 이 반정에 참여하고자 군사를 모으고 있던 아들 자흥(自興: 이 이첨의 사위, 참판을 역임)을 불러 마음속에 있는 바를 써 놓고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했다.
한편 충원이 6대손 성원(聖源)은 도암(陶菴) 이 재(李 縡)의 문인(門人)으로 영조(英祖)때 별시문 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간관(諫官)을 거쳐 참판(參判)으로 치사(致仕),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문장(文章)에 뛰어나 예의류집(禮疑類集)·돈녕록(敦寧錄)·겸재집(謙齋集) 등의 저서를 남겼다.
한편 강계(江界)의 3대 유배명인으로 손꼽히는 근원(謹元)은 시정(寺正) 의 셋째 아들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대의 권신 윤원형과의 암투로 일생을 살았다. 그가 사관(史官)인 한림(翰林)의 벼슬에 있을 때 윤원형의 악행을 사초(史草)에 적었더니, 동료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지워버리자 그는 재차 썼다.
다시 지우니까 또 써 끝내 미움을 받게 되었다. 선조 때 동서 분당으로 논쟁이 심해지자 중진(重鎭)으로 송응개(宋應漑)·허 봉 등과 함께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있던 이 이(李 珥)를 탄핵하여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 나와 청한직(淸閑職)을 지내며 청백한 관리로 소문났었다.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의하면 늙어서 사람들이 그의 청백함을 칭송하자 "나의 청백은 윤원형이 만들어 준 인생의 선물이다" 하며 웃었다고 한다.
복야공파(僕射公派) 언인(彦仁)의 후손에서는 우리나라 <삼대악성(三大樂聖)으로 손꼽히는 난계(蘭溪) 연(堧: 언인의 9세손)이 뛰어났다. 1378년(우왕 4) 삼사좌윤(三司左尹) 천석(天錫)의 맏아들로 태어나 태종 초에 문과에 급제한 연은 세종이 즉위하자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調律)정리와 악보찬집(樂譜撰集)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편경(編磬)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音律)로 연주케 했고, 조정의 조회(朝會)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하는 등 궁정 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1445년(세종 27)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인수부윤(仁壽府尹)과 중추원부사를 역임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랐으며, 단종 원년에 일어난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그의 셋째 아들 계우(季愚)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반대하던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으나 그는 3조(三朝)에 걸친 원로로서 죽음을 면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落鄕)하였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조선 세종 초에 좌군 병마사로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나갔다가 전사한 홍신(弘信)과 돈인(敦仁)의 아들 한주(漢柱)가 유명했다. 특히 한주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연산군 때 간관(諫官)이 되어 직언(直言)을 하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연려실기술 <연산조 고사말본>에 의하면 그는 말이 곧고 간결하였고,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나갔다.
치적(治績)을 쌓아 연산군이 그를 불러 간관(諫官)으로 임명하였는데, 하루는 왕에게 직언 하기를 "후원에서 말을 달리고 공을 치며 용봉장막(龍鳳帳幕: 용과 봉의 형상을 아로새겨 임시로 꾸며놓은 왕의 의자)을 펼쳐 놓고 잔치 놀음하는 때가 많으니, 임금께서 어찌 이러한 정사를 하십니까"하자 연산군이 노하여 답하기를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하였다.
이에 한주는 "이것은 모두 백성의 재력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臣民)의 장막이라 해도 옳을 것입니다.
어찌 임금님의 사사로운 물건입니까"하였다. 이 일로 해서 노사신(盧思愼)과 임사홍(任士洪)이 아부하여 논하니 마침내 그들에게 무함(誣陷)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인수(麟壽)의 아들 진(晋)은 임진왜란 때 이름난 명장(名將)으로, 임금이 항상 "나는 박 진이 싸움을 가벼이 여겨 죽을까 두렵다" 또는 "형세를 보아서 진퇴하는 것이 옳을진데 박 진은 이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전진만 하는가"하며 걱정을 해주었다고 한다.

한편 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 사동(思東)의 아들로 중종 때 우찬성(右贊成)에 오른 (說)의 증손 효남(孝男)은 선정(善政)으로 가는 곳마다 송덕비 (頌德碑)가 세워졌고, 대덕(大德)은 강동(江東)에 유배당한 조호익(曺好益)에게 글을 배우고 임진 왜란 때 스승을 따라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에는 70이 넘는 고령으 로 양덕(陽德)에서 독전하여 적을 물리쳐서 관군을 놀라게 했다. 숙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권 (權)은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거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淸)나라를 다녀온 후 한성부 우윤에 올라 청나라 사신(使臣) 목극등(穆克登)의 접반사(接伴使)로 백두산(白頭山)에 정계비(定界 碑)를 세워 청나라와의 국경을 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조선 실학(實學)의 태두(泰斗) 제가(齊家) 는 19세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이덕무(李德懋)·류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더불어 <시문4대가(詩文四大家)>로 일컬어졌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한 북학의(北學議)를 작성하여 그를 바탕으로 기구와 시설의 개편, 불합리한 제도의 모순점을 지 적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문경(聞慶)에서 의병
(義兵)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했던 세화(세화)가 학문과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중빈(重彬)은 1943년 대법문(大法門)을 강설하여, 한일합방의병을 모아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영철(永哲)과 함께 명문(名門) 밀양 박씨를 빛낸 불굴의 의인(義人)으로 손꼽혔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641,821가구, 2,704,6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