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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들의 사실

한들 약초방 2015. 3. 14. 16:45

                선친들의 사실 

박 욱;
경명왕의 손자이며 밀성대군 언침의아들,고려태조때
삼한벽공도 대장군 을지냈다,

삼한벽공도대장군목상 ( 三韓壁控都大將軍木像 ) ;
1995년 5월 2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시대 말,
고려시대 초의 공신 밀성박씨 상조 박욱(朴郁)의 상으로 밀성박씨문중
소유이며 문중에서 관리한다. 박욱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군도를 토벌하고
건국 사업에 공을 세워 삼한벽공도대장군에 봉해졌다.
목상은 원래 밀양부 추화산성(推火山城)에 있던 성황사(城隍祠)에서
성황신(城隍神)으로 받들던 것인데 1894년(고종 31) 후손들이
밀성박씨 대종회 재실인 익성사(翊聖祠)를 창건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박욱의 아들로 요동독포사를 지낸 박란(朴瀾)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고 있다.

삼중대광사도광리군목상 ( 三重大匡司徒廣理君木像 ) ;
1995년 5월 2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밀성손씨문중 소유로 문중에서 관리한다. 광리군(廣理君) 손긍훈은 밀양시 교동을 중심으로
대대로 거주하는 밀성손씨의 중시조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선록(選錄)되고 삼중대광사도광리군에 봉해졌다.
목상은 삼한벽공도대장군 박욱(朴郁)의 목상과 함께 밀양 추화산성(推火山城)에 있는
성황사(城隍祠)에서 성황신(城隍神)으로 받들어졌다. 1894년(고종 31)에 박욱
목상은밀성박씨 재실인 익성사로 옮겨갔고, 손긍훈의 목상은 뒤에 밀양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추화산성 ( 推火山城 ) ;
1990년 1월 16일 경상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교동과 용활동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둘레 약 715m의 석성으로 `추화"라는
명칭은 밀양의 옛 지명이다. 밀양읍성(경남기념물 167)으로부터 동쪽 약 2㎞ 지점,
해발 243m의 추화산마루에 있으며, 신라가 가야제국을 낙동강변에서 대치하고 있던
시대에 축성된 이른바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지(山城址)로 추정하고 있다.
터의 면적은 90,912㎡이다.
또한 이 산성에는 성황사(城隍祠)가 남아 있는데, 고려 태조를 도와 건국에
공을 세운 삼중대광사도 광리군(三重大匡司徒廣理君) 손긍훈(孫兢訓) 장군과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박욱(朴郁)의 공훈을 추모하기 위해
고을사람들이 추화산 성황(城隍)에 사당(祠堂)을 세워 제향을 받들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추화산 서북부 정상에는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다.

만운재 ( 萬雲齋 ) ;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72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경명왕의 장남으로 밀성박씨(密城朴氏)의 상조(上祖)인 밀성대군
박언침(朴彦枕)을 경모하여 후손들의 결의로 박해철(朴海澈)이 1927년 건립하였다.
단층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정면 6칸, 측면 2칸이다.
경덕단(景德壇), 외삼문(外三門)과 부속건물로 박해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경초재(景肖齋)와 정당(正堂)인 유경각, 영정각 등이 있다.
경덕단에는 밀성대군과 그 아들 박욱(朴郁), 손자인 고려 개국공신 박란(朴瀾)
3위를 모셔놓았다. 외삼문은 앙경문(仰景門)이라는
단층 맞배지붕 목조와가로 정면 9칸, 측면 2칸이다.

박 난;
밀성대군 언침의손자,
대장군 욱의아들,
고려에서 요동 독포사를 지냈다,

박영정;
독포난의아들,
고려때 한림학사참지정사를 지냈다,

박기세;
고려때 합문지후를 지냈다,

박시주;
고려에서 보문각 시제 지내고 이부시랑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상서에 이러렀다,

박찬행;
참지정사,영정의 증손,고려때 정당문학,검교태부를거쳐
문하시중으로 치사하였다,

박언부;
고려 문종문과에 급제하여 최충과함께 태사를 지낸후 문하시중,
도평의사 를 역임하였고 밀성 부원군 에 봉해졌다,

박언상;
고려때 도평의사 등을 지냈다,

박언인;
고려때 벽상삼중대광 평장사,상서좌복야등을 역임하고 밀직군에 봉해졌다,

박양언;
고려때 봉익대부 밀직부사 등을역임하였다,

박천익;
고려때 판도판서를 역임하였다,

박을재;
고려때 삼사좌윤을 지냈다,

박효신;
시호는문익,고려때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을지냈고,
문장과 충절이 뛰어나서 평장사에 올랐다,

박의신;
밀성부원군 언부의차남으로 문장에 뛰어났고,
고려 인종때 과거에급제하여,공부상서에 이러렀다,

박양신;
고려때 소부소감을 지냈다,

박직신;
고려때 문림랑에올랐다,

박석원;
고려에서 정당문학에 이러렀다,

박공필;
시호는 충렬,평장사 효신의 아들로서 고려때 대장군,도검사를 지내고
병부상서에 올랐으며 문무를겸비하여 윤관 등과함께 여진을평정한공으로
진국공신에 책록되었다,

박육겸;
병부산서 공필의 맏아들로서 고려 인종대장군병부상서를지내고
김부식과함께 도적 조광 등을쳐서평정하고 왕에게 상소하여
양현고를세워 많은선비를 배출하였다,

박육화;
고려 의종급사중으로 동북면 병마부사를거쳐 병부상서
형부상서를 지내고 수사공 좌복야 를 역임하였다,

박대화;
고려때 대호군,병부상서 를 역임 하였다,

박 간;
시호는 양효,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 참정 을 지냈다,

박윤공;
고려때 내시중을 역임하였다,

박광례;
병부상서 육화의 손자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문벌이 나타남으로 밀성군에 봉해졌다,

박수길;
고려때 검교대호군에 이러렀다,

박 척;
고려에서 상장군을 지내고 충선왕밀성군에 봉해졌다,

박영균;
시호는 문헌,이부상서 대화의 손자로서 고려조에서 익대공신으로
판도판서 와 3제상을 역임하고,응천군에 봉해졌다가 후에
은산 부원군 으로 추봉되었다,

박세균;
호는행산,시호는 충정,양효공, 의둘째아들로 고려조에서 평장사
밀성부원군 에 봉해졌으며 전문형을 역임하였다,

박춘(春);
초명은춘(椿),정언,상례의아들로서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판밀직사를 역임하였다,

박 익;
자는 태시,호는 송은,고려 공민왕때 등과하여 예부시랑,중서령 등을 지냈다,

박 화;
1252 (고종39) ~1336(충숙왕 복위 5) 검교군기감 의아들,
1278년(충렬왕 4)전리사 서원 을 거쳐 임피, 현위가뒤고
뒤에 사온서령자운방판관 을 역임 하였다,
1310년(충선왕 2) 사헌규정으로 무고로 면직되었다가
1316년 (충숙왕 2)다시 기용되어 선부산량으로서 경원부를 다스린뒤
1324년(충숙왕 11)광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밀직부사, 상호군으로 치사하였다,

박중미;
고려 충목왕때 문과급제후 중서령 등을 역임 하였고,공민왕때 안유,
이방실등과함께 홍건적의난을 평정한공으로 보리공신에 오르고
대광보국승록대부 에 가자, 밀직부원군에 봉해졌다,

박 위;
처음 우달치(迂達赤)로 등용되었다가 김해부사로 승진하였다.
왜구 를 격퇴하고,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는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崔瑩)을 몰아낸 뒤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함선 100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적선 300여 척을 불태웠다.
후에 자혜부판사(慈惠府判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문하부지사에 올라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고 공신에 책록되었다.
1390년(공양왕 3) 김종연(金宗衍)옥사(獄事)에 연루되어
풍주(豊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회군(回軍)의 공신으로
녹권(錄券)녹전(祿田)을 받았다.
조선 건국 후에는 문하부참찬사를 거쳐
양광도(楊廣道) 절도사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그때 밀성(密城)의 소경 이흥무(李興茂)의 옥사가 있어
이에 관계한 혐의로 구금되어 대역죄로 몰리게 되었으나
태조의 호의로 석방되어 서북면 도순문사로 나갔다.
사헌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박 의;
자 충국(忠國).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고 1636년 병자호란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룡(金俊龍)을 따라 용인(龍仁)
광교산(光敎山)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다.
그 공을 인정받아 평안도 권관(權管)이 되었다.(daum,백과사전 수록)
사냥에 매[鷹]개[犬]를 잘 부려 왕의 총애를 받아 장군이 되었다.
꼬리에 깃이 14개나 달린 희귀한 새 매[戴]를
원나라 황제에게 바치고 돌아와 황제의 명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고 자칭하였다.
그 뒤 충목왕의 비 장목왕후(莊穆王后)의 미움을 사 섬에 유배되고
가산(家産)까지 몰수되었다가 곧 풀려나와 우부승지 ·좌복야 ·
밀직부지(密直副知)을 역임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자정원동지사(資政院同知事)에 올라 첨의찬성사가 더해지고
밀양군(密陽君)에 봉해졌다. (daum 백과사전 수록)

박 현;
밀성군 흥의 아들로서 고려조에서 사헌부 규정 태사를지냈으며
도학,문장,절의로서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옥천의 원덕사에 제향되었고 규정공파의 파조이시다,

박문유;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리좌랑을거쳐 경주판관을 지냈다,

박사경;
고려때 전법판서겸 상장군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 에 책록되었다,

박 침;
1342년(충혜왕 복위3)~1399년(정종1) 고려 공민왕문과에 급제하고
전의 판사를 지냈으며,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1현과함께 두문동 으로 들어가
세상을 개탄하며 우국의 세월을 보냈다,
뒤에 호조판서에 추중되었다,

박의중;
자 자허(子虛). 호 정재(貞齋). 초명 실(實). 공민왕 문과(文科)장원,
전의직장(典儀直長)을 거쳐 헌납(獻納) ·사예(司藝)가 되고,
우왕문하사인(門下舍人)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대사성 ·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냈다. 1388년(우왕 14)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철령위(鐵嶺衛) 철폐를 교섭하여 성취하고 귀국,
창왕 때 공신(功臣)에 책록되고, 공양왕 때 한양(漢陽) 천도설이 대두되자
음양설(陰陽說)의 허황함을 지적하여 그에 반대, 뒤에 예문관제학대사성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하고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가 되었는데,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장이 우아하였다.
문집 《정재집(貞齋集)》이 있다.

철령위문제 [ 鐵嶺衛問題 ] ;

고려를 지배하던 원(元)나라의 세력이 기울고
1368년 명나라가 일어난 이후, 명나라 태조(太祖)가 철령 이북의 땅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라 하여 자기 나라에 귀속시켜 철령위를 설치하고
병참군영으로 만들 계획이라는 사실이, 명나라에 다녀온 설장수(乾長壽)를 통해 알려졌다.
이에 고려에서는 이 곳에 성(城)을 신축하여 대비케 하는 한편,
박의중(朴宜中)을 다시 명나라에 보내어 철령 이북의 문천(文川) ·고원(高原) ·
영흥(永興) ·함흥(咸興) 등과 공험진(公險鎭)까지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
철령위 설치를 중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조정에서는 최영(崔瑩)이
중신회의를 열어 타개책을 논의한 결과 명나라와 화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그러나 1388년(우왕 14) 3월 명나라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왕득명(王得明)을 고려에 보내 랴오둥[遼東]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70여 개의
병참(兵站)을 두는 철령위 설치를 정식으로 통고해 오자,
급기야 우왕(禑王)은 요동 정벌을 명하게 되었다. 이에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이성계(李成桂)를 우군(右軍)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좌군(左軍)도통사로 삼고 3만 8천여
군사로 평양을 출발하였다. 결국 이성계의 회군(回軍)으로 요동 정벌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철령 이북도 명나라에 귀속되지는 않았다.

정재집 ;

본집 9권, 별집 5권, 후집 6권, 합 20권 7책. 목판본. 규장각 ·장서각도서.
본래 초간본이 있었는데, 6세손 박제억(朴齊億)이 1892년(고종 29) 재편집, 간행하였다.
저자는 박세당(朴世堂)의 아들로, 의기가 투철하여 당시의 세력가였던 이단하(李端夏) ·
김석주(金錫胄) 등의 비리를 탄핵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의 폐비에 반대하는
<대유생성규헌(代儒生成揆憲)>을 올렸다가 심한 고문 끝에 죽었는데,
전자는 별집 권4 ·5의 <감류편(坎流編)>에,
후자는 <기사민절록(己巳愍節錄)>에 자세한 경위가 실려 있다.
윤선거(尹宣擧) ·성혼(成渾) ·이이(李珥)에 대한 날무릉답(捏巫凌踏)을
해제할 것을 주청한 상소도 있으며, <추우록(追尤錄)>에는
1677년 문과회시(文科會試)에서 부제(賦題)로 인해 송시열(宋時烈)의
난통지설(亂統之說)에 은밀히 동조하였다고 몰리게 된 경위가 실려 있다.
<호남염찰계본별단(湖南廉察啓本別單)>은 호남지방에 대한 11개 항에 걸친
안찰 기록으로서 고지식하고 타협을 모르는 소장 관리의 기개가 잘 드러나 있는데,
특히 흑산도 등 여러 섬에 관한 조사와 건의가 주목된다. 그 외
《이생전(李生傳)》 《반남선생가전(潘南先生家傳)》 《서김장군일사(書金將軍逸事)》
등 전기도 주목된다.

공험진 [ 公咽鎭 ] ;

오늘날의 함경도는 갈라전(曷懶甸)이라 하여 국초부터 동여진이
살면서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완안부(完顔部)가 북만주에서 부족을 통일하고
이곳을 위협하자, 고려는 윤관을 보내 갈라전을 점령하고 9성을 축성하면서
1108년(예종 3) 공험진에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고 비(碑)를 세워 경계를 표시하였으며,
병민(兵民) 523정호(丁戶)를 남쪽에서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그런데 9성의 위치에 대한 학설이 분분한 가운데 공험진의
정확한 위치도 이에 따라 서로 다르다.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전기 관찬사료를 따라 두만강 이북에 비정하는
입장은 공험진이 소하강(蘇下江) 강변에 있었다고 본다.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를 해석한 정약용(丁若鏞)의 견해에 따른
길주(吉州) 이남설은 마운령과 마천령 사이를,
고적답사를 통하여 주장한 함흥평야설은 함흥군 대덕리산성에 비정하였다.

박문경;
조선때 도순찰사 를지냈다,

박흥신;
1363년(공민왕12)~1419(세종1) 좌윤 천경의 아들로서 무예에 뛰어나
검교
중랑장
이되고,산원에 올라 서경 도원수 휘하에 들어같다가 1386년(우왕12)
별장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뽑혀서 금군에 속하고 사직,호군을거쳐 제물량,
병산포등의 만호를 역임하였다,1418년(태종18) 사제감정에 이어 이듬해 좌사감이 되었다,
1419년(세종10)쓰시마도 정벌때 좌군 병마사 로 경상도 병마절도사
밧실의 휘하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박시생;
조선때 목사를 지냈다,

박강생;
자 유지(柔之). 호 나산경수(蘿山耕戒).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개국 때 호조전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408년(태종 8)에
진위사(陳慰使)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1412년 인주지사(仁州知事) 재임시의 부정사건으로 태형(笞刑)을 받았으며,
1417년 수원부사 재임시 과천현감 윤돈(尹惇)의 전별연에서 금천현감(衿川縣監)
김문(金汶)이 과음으로 죽은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재등용되어 세종안변부사를 지냈다. 죽은 뒤 1424년(세종 6) 딸이
후궁[莊懿宮主]이 되어 1품직에 추증되었다.
문장이 유려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박 녕;
호는 충헌당 조선때 호조정랑,예조참의,판관등을 역임 하였다,

박절문;
조선때 좌찬성에 추중되었고,밀산군에 봉해졌다,

박 융;
자 유명(惟明). 호 우당(憂堂).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411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직무 태만으로 면직되었다가
뒤에 전한(典翰)에 기용되었다. 1423년(세종 5) 이조정랑으로
강원도경차관(敬差官)을 지낸 후 군수에 이르렀다.
문집 《우당집(憂堂集)》이 있다.

박 연;
자 탄부(坦夫), 호 난계(蘭溪), 시호 문헌(文獻), 초명 연(然), 영동(永同) 출생이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校理)를 거쳐 지평(持平)·
문학(文學)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악사(樂事)를 맡아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編磬) 12장을 만들고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하였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으로 대체하게 하여 궁중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
1433년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받고 아악에 종사,
공조참의·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를 거쳐 중추원동지사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
중추원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아들 계우(季愚)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삼조(三朝)에 걸친 원로라 하여 파직에 그쳐 낙향하였다.
특히 저[大仁]를 잘 불었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되고 있다.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고, 지금도 고향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음악제"가 열려 민족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시문집 《난계유고(蘭溪遺稿)》 《가훈(家訓)》이 있다.

악사 ;

악공과 악생 가운데서 선발했으며,
궁중 행사에서 음악을 연주할 때 이들을 이끌고 연주의 지휘와 감독을 담당하였다.
정전예연(正殿禮宴)의 경우에는 3명의 악사가 참여했는데,
1명은 협률랑(協律郞) 및 연향절차지휘(宴享節次指揮)를 맡고,
1명은 정재집박(呈才執拍)을 맡으며, 1명은 전후고취집박(殿後鼓吹執拍)을 맡았다.
성종 때 장악원(掌樂院)의 좌 ·우방(左右坊)에 각각 2명씩 두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악사 중에 2명을 다시 뽑아 장악원의 전악(典樂:정6품)과
부전악(副典樂:종6품)에 임명하였다.
체아직(遞兒職)이었기 때문에 1년에 4번의 추천서를 이조에 올려 임명장을 받았고,
근무 일수가 1,200일이 되어야 비로소 품계를 올려주었는데, 정6품에 제한하였다.

조율 ;

현악기의 조율은 특히 조현(調絃)이라고 한다.
일정한 음높이를 지니지 않는 악기(이를테면 심벌즈 ·큰북 등)나 악기 제작시에
주어진 음높이가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악기(이를테면 첼레스타 ·철금 ·벨 등)를
제외하고는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상태로 하기 위해서는 음률을 조정할 필요가 생긴다.
피아노나 오르간처럼 악기의 구조상 제작시에 일정한 음률이 부여된 악기라도 사용함에 따라,
또는 기온 ·습도 등 외적 조건에 의해 음이 달라지기 쉬우므로 가끔 조율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바이올린 등 현악기는 개방현(開放絃)에 있어서의 각 현의 음높이만이 정해져 있고
그 밖의 각 음높이는 연주를 할 때 연주자가 조절하게 되어 있는데,
이 때 각 현의 음높이를 조정하는 일만을 조율(조현)이라고 한다.
조율방법은 악기에 따라서 다르지만 어떤 음을 기준으로 하여 조율하고,
기준음을 정하는 데는 소리굽쇠(tuning fork) 등을 사용한다. 오케스트라와 맞출 때는
오보에 ·클라리넷의 ‘A음’을 기준으로 한다.
피아노는 어떤 옥타브(대개는 C―C ·C―F)를 기준으로 하며 5도와 4도를 사용하여
상대적으로 조정한다. 피아노 ·오르간 등의 조율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편경 ;

이 악기는 본래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악기로 한국에는 1116년(예종 11)
송나라의 대성아악(大晟雅樂)과 함께 들어왔다. 그러나 악기를 만드는
경석(磬石)이 희귀하여 중국에서 구하거나 흙으로 구운 도경(陶磬)을 대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425년(세종 7) 경기 남양(南陽)에서 질이 좋은 경석이 발견되어
이를 박연(朴堧) ·맹사성(孟思誠) 등이 갈고 닦아 중국의 석경보다 좋은 편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두 개의 방대(方臺) 위에 백아(白鵝) 한 쌍을 앉히고 그 위에 나무틀[架子]을 세워
양편에 봉두(鳳頭)를 조각하였으며 틀 위에는 다섯 마리의
목공작(木孔雀)을 세워 장식하였다. 이 틀에 16개의 ㄱ자 모양의 석경을 8개씩
두 줄로 나누어 걸고 각퇴(角槌)로 쳐서 소리를 내는데 반드시
긴 쪽인 고(鼓)의 끝을 쳐야 한다. 음역은 12율 4청성(十二律四淸聲) 즉
황종(黃鐘:C音)에서 청협종(淸夾鐘:d#音)에 이르며 음색은 매우 청아하다.
편경은 습기와 건조, 추위와 더위에도 음색과 음정이 변하지 않아 모든 국악기
조율의 표준이 되고 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종 ·경을 다룰 때 잘못하여
이를 파손한 자에게는 태장(笞杖) 일백, 도형(徒刑) 3년의 벌을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악기의 소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악 ;

좁은 뜻으로는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만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궁중 밖의 민속악(民俗樂)에 대하여 궁중 안의 의식에 쓰던 당악 ·
향악 ·아악 등을 총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본디 ‘아악’은 정아(正雅)한 음악’
이란 뜻에서 나온 말로,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궁중의 제사음악으로 발전하여
변개(變改)를 거듭하다가 l105년 송나라의 대성부(大晟府)에서 《대성아악》으로
편곡 반포함으로써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한국에는 1116년(고려 예종 11) 송나라 휘종(徽宗)이 《대성아악》과 여기에 쓰일
등가(登歌) ·헌가(軒架)에 딸린 아악기 일습 및 아악에 수반되는 문무(文舞) ·
무무(武舞) 등의 일무(佾舞)에 쓰이는 약(硅) ·적(翟) ·간(干) ·과(戈) 36벌과
이러한 의식에 쓰이는 의관(衣冠) ·무의(舞衣) ·악복(樂服) ·의물(儀物) 등 모든
것을 갖추어 보냄으로써 아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대성아악》은 원구(窩丘) ·
사직(社稷) ·태묘(太廟) ·선농(先農) ·선잠(先蠶) ·문선왕묘(文宣王廟:孔子廟)
등의 제사와 그 밖에 궁중의 연향(宴享)에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다. 고려 말에는
악공(樂工)을 명나라에 유학보내고 악기를 들여와 명나라의 아악을 종묘 ·문묘(文廟) ·
조회(朝會) 등에 쓰게 하였고, 공양왕 때는 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여 종묘의
악가(樂歌)를 가르치고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아악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세종 때에 이르러 크게 정리되었다. 세종은 악리학자(樂理學者)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궁중아악을 정비케 하면서 악장(樂章) ·악보와 악기를 일일이
흠정하는 등 모든 음악의 기틀이 될 큰 사업을 벌였다. 박연은 12율관(律管)과
편경(編磬)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조하였으면서도 아악을 주(周)나라의 것에 가장 가까운
아악으로 복원하여 음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로부터 제악(制樂)의 임무를
전관하게 된 박연은 많은 악기를 제작하고 조회(朝會) ·제사 등의 아악보(雅樂譜)를
발간함으로써 아악은 공식 의례음악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연산군에 이르러 회례연(會禮宴) 등에도 기악(妓樂)이 등장하여 아악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는 동안 악인(樂人)과
악기가 산실되어 아악은 그 복구가 극히 어려운 형편에 놓였으나 1647년(인조 25)
이후에야 겨우 종묘 ·사직 ·문묘 기타 다른 제향에 아악을 다시 쓰게 되었다.
숙종 ·영조 ·정조 등도 쇠미하여 가는 아악을 되살리려고 일련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한때 찬란하게 빛났던 세종 때의 아악은 끝내 되찾지 못하고 위축일로의 길을 밟아
근근이 그 명맥만 유지하여 왔다. 더구나 1910년의 국권피탈로 원구 ·사직 ·선농 ·
산천 등 제향이 폐지되어 여기에 쓰이던 아악은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은 공자의
제향이 존속되어 거기에 쓰이는 문묘제례악 중 석전악(釋奠樂)의 일부와 팔일무(八佾舞)가
연주되고 있을 정도이다.

난계와 난파
문성모 목사
(대전신학대학교 총장)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살았던 충북 영동 출신의 난계(蘭溪) 박연(朴堧 1378∼1458)과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를 살다 간 난파(蘭坡) 홍영후
(洪永厚 1898∼1941)는 비록 활동한 시기와 음악의 장(場)은 달랐지만 당대의 가장 위대한
민족 음악가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난계 선생의 업적은 너무도 화려하여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그는 문화의 꽃을 피웠던
세종대왕 시대에 당시의 음악을 총 정리하는 악서(樂書)를 편찬하였고, 중국에서 수입해서
쓰던 여러 악기들의 국내 제작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악기를 개량하고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
이라는 조율법을 개발하여 합주 음악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중국이
부러워할 정도였으며, 세종실록 59권에 보면 그가 만든 악기는 중국 제품보다
우수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전체를 놓고 볼 때 박연을 능가하는 음악가는 없었다. 요즘 우리나라의
교과서에도 박연은 거문고의 명인인 고구려의 왕산악과 가야금의 달인이었던 신라의
우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의 고향인 영동에서는
음악가 난계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해서 매년 가을 "난계국악축제"가 전국적 규모로
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악의 아버지"라고까지 추켜세워지고 있는 그의 행적과 사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너무도 사실과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그의 관심은 당시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음악인 아악(雅樂)에 있었지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인 향악(鄕樂)에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보다가 어린 세종 임금이 즉위하자 즉시 상소하여 종묘의 제사를
비롯한 국가의 모든 제례와 궁중의식에 아악을 써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22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세종은 음악전문가요 중신이었던 박연의 간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고, 이에 조선의 음악은 중국음악인 아악(雅樂)이 우리 고유의 향악(鄕樂)을 몰아내고
공식적인 국가 의식음악이 되어버렸다. 박연이 만든 음악이론과 악기와 음률법은 모두 이
중국음악인 아악(雅樂)의 확립에 있었다. 그는 우리 고유의 향악(鄕樂)을 너무도 천대하였고 무시하였고 말살하려고 하였다. 나중에 세종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든든히 세운 후에 박연을
물리치고 중국의 아악(雅樂) 대신에 우리 고유의 향악(鄕樂)을 국가 행사의 공식음악으로
바꾸려고 할 때, 박연은 죽을 각오로 임금에게 수십 편의 상소문을 올려 아악의 사수를
고집하였는데 그의 상소문은 오늘날 "난계유고"라는 책에 남아있다.
이러한 박연을 기념하여 오늘날 "난계국악축제"가 열리고 그를 "국악의 아버지"라고 선전하는 일은 다시 한 번 재고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대표적 친일파
음악가였던 홍난파를 그의 작품 "봉선화"가 어쩌다가 일제에 의하여 금지곡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일약 민족음악가로 추앙하여, 오늘날도 국내 최고의 "난파음악제"가 열리고,
"난파상"이 음악가에게 최고의 영예로운 상이 된 현실은 씁쓸하기만 하다.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왜곡하여 민족음악을 그토록 사랑했던 세종 당시의 향악(鄕樂)주의자인
재상 맹사성(孟思誠)이나, 홍난파와 동시대 인물인 민족음악가 채동선(蔡東鮮)을 우대하지도 못하고 기념하지도 못하고 그 이름들을 기억조차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박심문;
자 신숙(愼叔). 호 청재(淸齋). 시호 충정(忠貞). 편모 슬하에서 장성하였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磊署直長)이 되었다. 1436년(세종 18)
친시(親試)문과에 급제하여 기주관(記注官)을 지냈다. 함길도절도사
김종서(金宗瑞)가 6진(鎭)을 개척할 때, 그 종사관(從事官)으로 야인(野人)에 대한
안무(按撫)에 힘썼다. 1447년 평안도판관, 1448년 도체찰사(都體察使)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수양대군(首陽大君:世祖) 일파에게 살해되자, 칭병(稱病)하고 집에 있으면서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등과 화초를 가꾸고 시(詩)를 읊으면서
단종 복위를 모의하였다. 벼슬을 사양하다가, 14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 오던 중 의주(義州)에 이르러 성삼문 등 6충신(忠臣)이 참형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울분 끝에 음독(飮毒) 자결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박중손;
자 경윤(慶胤), 호 묵재(默齋), 시호 공효(恭孝)이다.
15세 때 성균관시(試)에 합격하고,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급제,
집현전 박사 에 등용되었다. 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세종 말에 사인(舍人)·집의(執義)·병조지사(兵曹知事)·동부승지(同副承旨)·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병조참판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정난공신 2등에 책록,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대사헌, 공조·이조·형조·예조판서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올라 밀산군(密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1459년(세조 5)
춘시(春試)를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발굴하였다.

박 미;
자는 자첨 호는 존성재 1458년(세조4) 문과에 급제한후 대사간을거쳐 예조참의에 이르렀으며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실려 전하고 있으며 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박거겸;
자 중공(仲恭). 시호 평간(平簡). 1432년(세종 14) 음보(蔭補)로
별시위(別侍衛)가 되고 1442년 호군(護軍)으로 무과에 장원하여 대호군에 올라
북청부사 등을 지냈다. 1451년(문종 1) 경흥부사(慶興府使) 재임시
야인(野人)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1455년(세조 1) 중추원첨지사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7년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뒤 판안주목사를 거쳐 1465년 중추원부사가 되었으나
친상(親喪)으로 사직했다.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지내고, 1481년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박의영;
1456년(세조 2)~1519년(중종14)자는거화, 예조참의 의아들로서 1474년(성종 5)
진사가되고,149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급제하여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으며
호조,공조의좌랑을거쳐 헌납,집의등을 역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갑자사화때 대사간으로 이세좌의 죄를논하지안았다하여
문의 에 중도 부쳐 되었으며,뒤에 풀려나와 호조,예조,병조,공조참의를지냈다,

박광영;
자 군당(君棠).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급제하고 1495년(연산군 1) 생원으로
숭불(崇佛)했다는 죄로 장류(杖流)되었다 풀려났다. 1498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이어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504년 정언(正言)으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추숭(追崇)을 반대하여
목천(木川)에 유배되었으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정언에 복직,
지평(持平) 등을 거쳐 대사간 ·병조참의를 지냈다. 1518년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22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도적을 토벌하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1526년 이조참의로 등용되었으며 1528년 좌승지를 거쳐
한성부우윤이 되었고, 이듬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지고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관압사 [ 管押使 ] ;

원칙적으로 4년에 한번 정조사(正朝使) 또는
동지사(冬至使)와 함께 갔으나, 예외적으로 파송되기도 하였다.
정3품 이상의 문관이 맡았으나, 외교적 현안(縣案)을 다루지 않아 때로는
무관 또는 역학(譯學) 출신자 중에서 선정하였다.

박증영;
호 눌재(訥齋), 별명 희인(希仁)이다. 1483년(성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486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1488년 예빈시 직장홍문관 교리 를 역임하였다.
예빈시 직장으로 있을 때 명나라 사신 규봉(圭峰)과 동월(董越)을 의주에서
맞이한 일이 있는데, 이때 동월이 그의 문장과 필법(筆法) 및 성품을 보고
"희인(希仁)"이라 부른 데서 별명이 되었다. 문장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송설체(松雪體)에도 능하였다. 청주의 국계서원(菊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눌재유고》가 있다.

눌재유고 ;

訥齋遺稿(奎4520), 朴增榮·朴薰(朝鮮)著, 朴永文(朝鮮)校.
2卷 2冊 木板本 31×20cm.
四周單邊 半郭:21.9×16.3cm.
有界 10行 20字 注雙行.
版心:上花紋魚尾.

朴增榮(1466∼1494), 朴薰(1484∼1540) 父子의 詩文集으로 후손 廷龍, 廷彪 등이 수
집하고 永文이 校正했으나 刊年은 未詳이다. 宋時烈의 序文은 1666년(顯宗 7)에 쓴 것
이며 跋文은 後孫 永周가 壬寅年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任憲晦의 墓誌를 보면 19세
기 중엽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朴增榮의 字는 希仁, 號는 訥齋, 본관은 密陽,
禮曹參議 楣의 아들. 1480년(成宗 11) 司馬試에 합격, 1483년 式年文科에 丙科로 급제
, 1486년 文科重試에 乙科로 급제했다. 淸宦職을 역임하고 1490년 賜暇讀書했다. 이듬
해 經筵侍讀官이 되었으며 獻納을 거쳐 뒤에 校理에 이르렀다. 密陽의 菊溪祠에 祭享.
朴薰의 字는 馨之, 號는 江수, 校理 增榮의 아들. 趙光祖 등과 交遊했다. 1504년(燕汕
君 10) 司馬試에 합격 후 천거를 받아 義盈庫主簿에 이어 報恩縣監이 되었으나 外補가
부당하다는 물의로 內職으로 돌아 監察, 工曹佐郞, 持平 등을 역임했다. 1519년(中宗
14) 賢良科에 丙科로 급제, 掌令, 司諫, 同副承旨 등을 지냈다. 이 해 己卯士禍가 발
생, 新進士類로 趙光祖 등과 함께 화를 입어 星州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 15년 만에
풀려 났다. 卷{1}은 訥齋遺稿와 江수遺稿로 분리되어 있다. 訥齋遺稿는 詞 1首(壽星
靑詞), 賦 2首, 操 1首(孤竹操), 詩 213首, 疏 2편(代司諫奉元孝疏, 求言應旨疏), 應
製文 4편(擬議政府辭職不允批答, 喜雨文, 月山大君賜祭文, 失題), 表 1편(擬漢諸侯賀
高帝卽位表), 祭文 1편(兵曹致奠沈參議潾文). 疏 2편 중 「代司諫奉元孝疏」는 1488년
任士洪의 죄를 논핵한 上訴 사건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다가 領議政 尹弼商에 의해
파직당한 奉元孝(1426∼?)와 權景禧(1451∼1497) 중 奉元孝 편을 들어 변호한 내용이
다. 「求言應旨疏」는 雨雷에 대한 弘文館聯名上疏로서 美官만을 구하여 염치가 없어
졌다는 당시의 정치 풍토를 개탄하는 내용이다. 江?更遺稿;詩 3수, 書 8편(蕙之奉寄,
寄蕙之 등), 墓碣 1편(伯父參議府君墓碣銘), 疏 1편(獄中聯名疏), 供辭 1편(獄中供辭)
.「獄中聯名疏」는 己卯士禍로 투옥된 趙光祖, 朴薰 등 士類들을 변명하고 밝은 정치
를 하도록 호소한 내용이다. 卷{2}:부록으로서 「訥齋遺稿附錄」은 字辭 1편, 別章 1
편, 祭文 1편, 哀辭 1편(金馹孫撰), 菊溪書院祠宇開墓祝文 1편, 菊溪書院?建上樑文,
菊溪書院訥齋先生奉安文, 菊溪書院訥齋先生春秋享祝文, 菊溪書院移建上樑文, 書老村朴
公尋先墓事蹟後文, 「江수遺稿附錄」은 行狀墓誌, (祭酒 任憲晦撰), 墓碣銘(成運撰),
佛(出己卯錄), 吏曹請除職, 賢良科薦目, 伸救啓, 祭墓文 2편, 請贈職贈謚疏(儒生朴世
炯 等), 請贈職贈謚啓, 贈職敎旨, 請贈謚啓, 謚號署經, 謚狀, 神道碑銘(朴弼周撰), 莘
菴書院賜額後移建上樑文, 莘菴書院廟庭碑(宋時烈撰), 訥齋江수遺墨跋, 年譜로 되어 있
다. 本書의 내용 중 疏와「江수附錄」 등은 당시의 정치 사정 특히 己卯士禍 등을 고
찰하는 데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박소영;
자는길보,1485년(성종16)문과에 급제한후 황해도 감사를거쳐 부제학에 이르러
연산군때 유배 되었다,

박한주;
자 천지(天支), 호 우졸재(迂拙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정언(正言)·헌납(獻納)을 거쳐
예천현감(醴泉縣監)으로 나갔다. 연산군 때 간관(諫官)이 되어
왕의 실정(失政)을 극간(極諫)하고, 노사신(盧思愼)·임사홍(任士洪)을 탄핵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김종직의 제자라 하여 벽동(碧潼)에 장류(杖流)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서울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중종반정도승지(都承旨)가 추증되고,
대구의 남강서원(南岡書院), 함안의 덕암서원(德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 《우졸재집》이 있다.

박 건;
자 자계(子啓). 시호 공간(恭簡).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수찬, 교리(校理)를 거쳐 사정(司正)을 지냈다.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었으며, 우부승지를 거쳐 1468년(예종 1)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1472년(성종 3) 진하부사(進賀副使)로,
1483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평안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내고
1495년(연산군 1) 우참찬으로 춘추관지사(春秋館知使)를 겸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4년 폐비 윤씨의 추시(追諡)를 반대하여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06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에 임명되었으나 박원종(朴元宗) 등과
반정(反正)에 참여하여 중종을 추대,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그 후 좌찬성 ·영경연사(領經筵事)를 지냈다.

박 열;
자 열지(說之). 시호 문정(文靖). 1483년(성종 14) 생원이 되고,
148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감찰(監察) ·
찬수(修撰) 등을 지냈다. 1497년(연산군 3) 이조좌랑으로 문과중시(重試)에
을과로 급제하고, 공조 ·예조 ·이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509년(중종 4) 대사헌을 거쳐 좌참찬을 역임하고, 1516년 우찬성에 이르렀다.

박 훈;
자 형지(馨之), 호 강수(江戒), 시호 문도(文度)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학문에 힘써,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에 급제하여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되었다.
이어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다. 감찰(監察)·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持平)을 지냈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 장령(掌令)·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다.
그해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등과 연좌되어, 성주(星州)에 유배된 뒤
의주·안악(安岳)에 이배(移配), 1530년 풀려났다. 관직에 있을 때 가는 곳마다
치적을 올려 명망이 높았고, 조정에서는 나라의 인재로 여겼으나,
간신들의 질시(嫉視)로 심한 비방을 받았다.
특히 조광조와 친해서 큰 일을 의논하였고, 청렴한 관원으로 일생을 지냈다.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에 배향되었다.

박 영;
자 자실(子實), 호 송당(松堂), 시호 문목(文穆)이다.
일찍이 궁마술(弓馬術)을 익혀 무예(武藝)에 뛰어났다.
1487년(성종 18) 이세필(李世弼)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1년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고,
이듬해 겸사복(兼司僕)이 되었다. 이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성종이 죽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정붕(鄭鵬)의 문하에서
대학(大學)》을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뒤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에 갔다.
뒤에 강계부사 ·의주목사 ·동부승지(同副承旨) ·
내의원부제조(副提調)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게 되어 기묘사화를 모면하고, 이듬해 경상도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의술(醫術)에도 능하였다.
황간(黃澗)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善山)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 《송당집》, 저서 《경험방(經驗方)》 《활인신방(活人新方)》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가 있다.

경험방(經驗方) ;

현재 남아있지 않아서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의하면 중국 명(明)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갔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모면한 저자가 낙동강변에 정자(亭子)를 지어
‘松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많은 약제를 구해 활인(活人)에 힘써,
환질자(患疾者)가 문을 메웠다고 하였다. 이 때 경험한 방문(方文)을 집성한 것이
《경험방》과 《활인방》이라 생각된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임지에서 죽었으나 생전에 이황(李滉)과 친교가 있어
그로 하여금 《활인심방(活人心方)》 수적본(手蹟本)을 남기게 한 것으로 보인다.

박 율;
조선때 목사를 지냈다,

박 운;
자 택지(澤之). 호 용암(龍巖) ·운암(雲巖). 선산(善山)출생.
1519년(중종 14) 진사가 되고 명종부사용(副司勇)을 지냈다.
만년에 이황(李滉)과 서신으로 연락하였고, 이황에게 저서인
격몽편(擊夢編》 《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至論)》 등을 보내 정정(訂正)을 구했다.
죽은 뒤 이황은 갈문(碣文)을 지어 그의 학문과 덕행을 찬양하였다.
효행(孝行)으로 선조 때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구미의 월암서원(月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과행록(果行錄)》
삼후전(三侯傳)》 《용암일기(龍巖日記)》 《위생방(衛生方)》
용암문집(龍巖文集)》이 있다.

용암문집 [ 龍巖文集 ] ;

목판본. 4권 2책. 규장각도서. 후손들의 요청으로
정간(鄭幹)이 1757년에 교정하여 1778년에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으며 권말에
정간 및 이상정(李象靖)의 발문이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권1에 시 52수,
부(賦) 2편, 권2에 여퇴계서(與退溪書) 등 서(書) 20편, 수사잡록(隨事雜錄) 등
잡저 3편, 서(序) 1편, 제문, 묘표, 행장, 권3에 《격몽편(擊蒙編)》과
《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至論)》, 권4에 부록으로 이황(李滉)이 쓴 묘갈명,
김취문(金就文)이 쓴 묘지, 최응룡(崔應龍)이 쓴 정려비음기(旌閭碑陰記)와
낙봉서원봉안문(洛峯書院奉安文) ·만사(輓詞) ·사우문인록(師友門人錄)이
수록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에 힘써 저자가 편집한 <격몽편>과
<자양심학지론>은 성리학의 명저로 알려졌으며, 기타 저서로는 《경행록(景行錄)》
《삼후전(三侯傳)》 《위생방(衛生方)》이 있다.

박하담;
자 응천(應千). 호 소요당(逍遙堂).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여러 번 대과에 응시하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감역(監役) ·
봉사(奉事) ·사평(司評) 등에 천거되나, 떳떳하지 못하다 하여 응하지 않았다.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기슭에서 풍류와 독서로 여생을 마쳤다.
청도의 선암사(仙巖祠)에 배향되었다. 문집 《소요당일고》가 있다.

선암서원 ;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었다.
밀양박씨선암문중 소유로 문중에서 관리하는데,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을 배향한다. 처음 창건한 것은 1568년(선조 1)
매전면 동산동 운수정의 향현사(鄕賢祠)였는데 1577년(선조 10) 군수
황응규(黃應奎)가 선암으로 위패를 옮기고 선암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76년(숙종 2)에는 서문중이 중건하였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878년(고종 15)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지은 것이다.
서원 안에는 강당을 비롯하여 득월정(得月亭), 선암서원, 소요정, 판목보관각,
살림채, 문간채 등이 있다.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안채, 득월정,
행랑채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뒤편으로 선암서원이 남향하고 있다.
판목보관각에는 김대유, 박하담 등 14의사의 문집 목판과 예부운(禮部韻)의
원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서원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깔고 양쪽으로는 방을 들였다.
강당은 주심포 후기 양식에 속하는 익공계에 가까운 건물로서 외출목도리를 받치는
행공첨자 밑에 소로가 없는 것과 다포작으로 짜올린 천장 구조 등은 특이한 수법이며
살림채는 전형적인 남부지방형 평면 양식을 나타낸다.

청도 운강고택 및 만화정 [ 淸道雲岡故宅-萬和亭 ] ;

1979년 12월 28일 중요민속자료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이
벼슬을 사양하고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던 옛터에 1809년(순조 9)
박정주(1789∼1850)가 살림집으로 건축했다. 1824년(순조 24) 운강 박시묵이
크게 중건했고 그의 증손 박순병이 1905년 다시 중수했다.
안채나 사랑채가 별도로 ㅁ자형으로 되어 쌍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행랑채, 대문채, 곳간채 및 사당 등을 갖추고 있다. 짜임새있는 구조와
필요에 따라 세분된 각 건축의 평면배치 및 합리적인 공간 구성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 상류층의 주택이다.
만화정은 박하담의 12대손으로 통정대부, 좌승지에 오른 운강 박시묵이 1856년 건립하여
강론하던 정자이다. 동창천 언덕에 서남향으로 지었으며, 정자 옆에는 세심정이
나란히 서 있다. 평면구성은 마루를 중심으로 서쪽에 방 1칸, 동쪽에 2칸의 통방을
배치하고 누마루에는 3면에 헌함을 돌려 바닥을 확장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대통령 이승만이 숙식했던 곳이기도 하다.

청도 삼족대 [ 淸道三足臺 ] ;

1987년 5월 13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1519년(중종 14) 김대유(金大有:1479∼1551)가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세운 정자로
동창천 암벽 위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들인 조식(曺植)·박하담(朴河淡)·
주세붕(周世鵬)·김응조(金應祖)·김극일(金克一)·신계승(申季誠) 등과 강론하던 곳이며,
그의 호를 따라 삼족대라 이름지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다. 사방에 토담을 쌓고 일각문을 두어
그 안에 정자를 배치하였는데 방 2칸과 부엌, 우물마루가 ㄱ자로 배치되어 있다.
삼족대 밑에 1973년에 세운 김대유신도비가 있고, 참봉 김용희(金容禧)의
중수기문(重修記文)이 있다.

염암고택 [ 剡巖故宅 ] ;

992년 11월 26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19세기 중엽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의 둘째 아들 박재소(朴在召)가
분가하면서 건립하였다. 본가인 운강고택의 남서쪽에 있으며, 다른 형제들도 운강
고택을 중심으로 분가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가옥의 전체적인 배치는 ㄱ자형의 안채를 제외한 중문채, 도장채 등은 一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돌아서 통행하게 하여 양반가옥의 폐쇄성을 보여준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 중문사랑채, 헛간채, 고방채, 대문채 등이 일곽을 이루는
전형적인 양반주택의 공간구성을 이루었으나 1990년 대구-청도간 2차선 국도
도로확장공사로 정면 5칸, 측면 3칸인 사랑채와 정면 4칸, 측면 1칸인
대문채가 철거되어 경역이 축소되었다.
외부공간은 안마당·사랑마당·바깥마당으로 구성되었는데, 안마당은 생활공간으로서
부엌 맞은편에는 약 50년 전에 판 우물이 있다. 과거에는 신지리 마을의 형상이
바가지 모양이어서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바가지가 샌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집에
우물을 파지 않고, 마을에 자생하던 만화정(萬和亭)의 우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부엌 앞에 있는 상수도를 사용하고 있다. 밀양박씨 후손인 박성철(朴性哲)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신지리 마을은 1520년(중종 15)에 밀양 출신 박하담(朴河淡)이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밀양박씨문중(密陽朴氏門中)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고 고장을 지켰다.
대구에서 남쪽으로 40㎞ 떨어진 낙동강 지류인 금천(錦川) 동창천변에 자리잡고 있어
주변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역사가 오랜 동족부락으로
운강고택(雲岡故宅:중요민속자료 106)을 비롯하여 선암서원(仙巖書院:경북유형문화재 79),
만화정(萬和亭) 등 유서깊은 문화재가 많이 있다.

박충원;
자 중초(仲初), 호 낙촌(駱村)·정관재(靜觀齋), 시호 문경(文景)이다.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 문과에 급제, 정자(正字)를 지냈다.
1536년 교리(校理)로 원접사(遠接使) 종사관이 되었으며, 1538년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일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 1541년 영월군수로 등용되었는데, 앞서 부임한 군수 7명이
연이어 급사한 영월에서 의연하게 지내, 죽었다가 소생한 군수라는 일화를 남겼다.
1545년 중국사신 영접사로 활약한 뒤, 직강(直講)·성천부사를 거쳐 통례원우통례 겸
교서관판교가 되었다. 1550년(명종 5)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우부승지를 지내고, 1553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6년 이황(李滉)의 뒤를 이어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중추부지사(知事)가 되었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김안로의 일파라는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1571년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가, 훈구(勳舊)의 간당(奸黨)이라는 신진사류(士類)의
규탄을 받고 해임되었다. 재등용되어, 1576년 이조판서·중추부지사를 역임하고
밀원군(密原君)에 봉해졌다. 문집 《낙촌집》이 있다.

양곡문집 [ 陽谷文集 ] ;

목활자본. 본집 16권 8책, 속집 4권 2책, 합 10책.
규장각 ·장서각 도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570년(선조 3)에 간행하였다가
1935년 후손 진호(鎭浩) ·학규(學奎) 등이 중간하였다. 본집은 권두에 홍석주(洪奭周) ·
박충원(朴忠元)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전우(田愚)와 후손 수중(洙中) ·
학규의 발문이 있다. 권1~10은 시, 권11은 소장(疏狀) 3편, 신도비명 8편,
권12는 묘갈명 17편, 권13은 묘표 9편, 제문 2편, 서(序) 5편, 기(記) 9편,
권14는 발(跋) 6편, 〈부경일기(赴京日記)〉 등 잡저 3편, 보유(補遺) 2편, 권15는
부록으로 신도비명(神道碑銘), 비음후기(碑陰後記) ·시장(諡狀) ·명(銘) ·잠(箴) ·
서(書) 각 1편, 서(敍) 2편, 권16은 연보가 수록되어 있다. 속집은 중국에서
온 사신과 주고받은 시집 《황화집(皇華集)》과 박충원 ·오희맹(吳希孟) 등과
주고받은 시집 《동사집(同集)》 중에서 저자가 지은 시만을 수록한 것으로,
권두에 소학규의 서문과 권말에 후손 소주영(蘇周永) ·소상영(蘇祥永)의
발문이 있으며 권1 ·2는 《황화집》에 실린 시, 권3 ·4는 《동사집》에 실린
시가 수록되어 있다.


낙촌집 [ 駱村集 ] ;

목판본. 6권 3책. 초간본의 간행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886년(고종 23) 후손인 광진(光鎭) ·영대(永大) 등에 의해 새로 중간본(重刊本)이 편집 ·
간행되었다. 내용은, 권1∼3에는 시(詩) ·가(歌) ·사(詞), 권4∼6에는 문(文)
등을 수록하고 있다. 책머리에 송병선(宋秉璿)의 서문이 있고,
책끝에 김병창(金炳昌)의 발문이 있다.

박숭원;
자 상화(尙和). 시호 충정(忠靖). 군수 난(蘭)의 아들. 1564년(명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등용되었다.
병조좌랑 ·강원도관찰사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도승지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순국할 것을 맹세하고 선조를 호종,
보검을 하사받았다. 한성부판윤(判尹) 재임시 의주(義州)에서 병사하였다.
선조가 심히 애도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추증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
밀천군(密川君)에 추봉되었다.

밀천군박숭원이등공신녹권 ( 密川君朴崇元二等功臣錄券 ) ;

1988년 9월 30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박숭원에게 내려진 녹권(錄券)으로
밀양박씨(密陽朴氏) 문중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필사된 뒤에 ‘시명지보(施明之寶)’
의 도장이 찍혀 있는데, 내용은 박숭원의 공을 찬양하는 교서·호성공신 책록의 경과와
공신에 대한 포상 내용, 공신의 명단 등으로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박숭원은 조선 선조 때의 공신으로 본관은 밀양, 자는 상화(尙和),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에 호종하다가 병사하였는데 이때의 공로가 인정되어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호성공신이란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할 때 시종하는데 공이 큰 이항복(李恒福) 등 86명에게 내린
훈호(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칭호)이다.

박계현;
자 군옥(君沃). 호 관원(灌園). 시호 문장(文莊). 1543년(중종 38) 진사가 된 후
1552년(명종 7)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정자(正字) 등을 역임하고 1555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60년에는 권신 윤원형(尹元衡) 집안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만포진병마첨절제사(滿浦鎭兵馬僉節制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그 때 동 ·서인(東西人)
사이의 당쟁을 누르려고 힘썼으나 실패하였다. 1580년(선조 13) 병조판서 ·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밀산세고(密山世稿)》가 있다.

이사성 ( 李思聖 ) ;

본관 덕수(德水). 일명 사성(師聖). 자 성지(誠之).
1546년(명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8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었다.
승문원 박사, 봉상시 직장, 예조·형조의 좌랑, 충청도 도사, 성균관 직강,
형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50년 아버지가 이해(李瀣)의 옥사(獄事)에서 외척 권세가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장살(杖殺)되고 자신도 한때 벼슬길이 막혔었다. 그후 영해부사,
홍주와 광주(廣州)의 목사, 군자감과 사옹원의 정(正) 등을 지냈다.
특히 문예에 뛰어나 외삼촌 박계현(朴啓賢)과 함께 이름이 높았다.

허엽 ( 許曄 ) ;

본관 양천(陽川). 자 태휘(太輝). 호 초당(草堂).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1551년 부교리가 되고,
155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장령(掌令) 때 재물을 탐한 죄로 파면되었다.
1559년 필선(弼善)으로 재기용되고 다음해 대사성으로, 1562년 지제교(知製敎)를 겸임,
박계현(朴啓賢)과 함께 명종의 소명을 받고 옥취정(玉翠亭)에 들어가
율시(律詩)로 화답하였다. 그해 동부승지로 참찬관이 되어 경연(經筵)에 나가
조광조(趙光祖) ·윤근수(尹根壽)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허자(許磁) ·
구수담(具壽聃)의 무죄를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과격한 언사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간에 올라 향약(鄕約)의
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동인 ·서인의 당쟁이 시작될 때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
중추부동지사가 되어 상주(尙州) 객관(客館)에서 죽었다. 30년간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장남 성(筬)과 차남 봉(載), 삼남 균(筠),
딸 난설헌(蘭雪軒)과 함께 중국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다.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경민편(警民編)》을 보충해 반포하고,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
편찬에 참여하였다.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고,
저서에 《초당집(草堂集)》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박근원;
자 일초(一初). 호 망일재(望日齋).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조좌랑 ·
도승지 등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569년(선조 2)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5년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논쟁이 분분할 때 동인(東人)의 중진이었다.
1585년 동서의 조정에 나선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사소한 직무상의 과실을 들어
송응개(宋應漑) ·허봉(許햄 )등과 함께 탄핵하다가 도리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는데,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났다. 이 사건을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한다. 당쟁으로 유배된 경우는 계미삼찬 사건이 시초이다.

삼찬 ( 三竄 ) ;

1575년(선조 8) 동서분당(東西分黨) 이래 당쟁으로 인한 폐단이
많다는 이이(李珥)의 비판이 있자, 그를 서인(西人)으로 간주한 동인(東人)측에서는
이이를 비난하였다. 그 중에서도 도승지 박근원, 대사간 송응개,
전한(典翰) 허봉 등이 가장 심하게 이이를 배척하였다.
이에 선조는 이 문제를 수습하려고, 정2품 이상의 신하들을 선정전(宣政殿)에 모아놓고
3인의 처벌문제를 의논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3인을 위해 변명하였으나,
서인 정철(鄭澈)이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박근원은 평안도 강계(江界)로,
송응개는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허봉은 함경도 종성(鐘城)으로 귀양보냈다.

송응개 ( 宋應漑 ) ;

본관 은진(恩津). 우참찬 송기수(宋麒壽)의 아들이며,
명종 때 정언(正言)을 거쳐, 대사간 등 청요직을 지냈다. 1575년의 동서분당 이후에는
동인의 중진으로 활약했으며, 1583년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전적(典籍) 허봉(許햄 )과
함께 당시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서인의 입장을 두둔하던 이이(李珥)를 탄핵하였다.
그는 이이가 젊었을 때 절에 들어간 점을 극렬히 비판하였으나, 도리어 태학생(太學生)
유공진(柳拱辰) 등의 탄핵을 받았으며, 결국 회령(會寧)에 유배되었다.
이 사건을 《당의통략(黨議通略)》에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권덕여 ( 權德輿 ) ;

본관 예천. 자 치원(致遠). 상주목사 보(溥)의 아들.
송인수(宋麟壽)의 문인. 1537년(중종 32) 진사가 되고,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정언(正言)을 거쳐 헌납에 이르렀다. 1570년(선조 3)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진되고 이어 좌부승지로 승진되었으며, 1573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5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호조 ·병조 ·
이조의 참의와 도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579년 동서분당의 폐단을 지적한
백인걸(白仁傑)의 상소문을 이이(李珥)가 지은 것이 문제되자 이를 옹호하다가
대사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부제학으로 있던 1583년에는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성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원익선생묘 및 신도비 ( 李元翼先生墓-神道碑 ) ;

1985년 9월 20일 경기도기념물
제85호로 지정되었다. 묘는 소하2동 서독산 능선 아래 남향으로 안장되어 있으며
부인 연일정씨와의 쌍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상석 앞쪽에는 화강암으로 된 장명등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의 입구 쪽에 세워져 있는데,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비좌에 안상문과 당초문,
이수에는 쌍룡을 새겨넣었다. 비문은 승정원 우승지를 지낸 이준이 지었고 손녀사위인
허목이 글씨를 썼는데, 심하게 마모되어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다.
이원익은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병조, 형조의 좌랑과 예조정랑을 지내고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박근원의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87년(선조 20) 복직되어 안주목사,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로 왜군과 싸워 공을 세웠고
1598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라 3도체찰사가 되었으며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성품이 청렴하여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조세제도의 개혁을 위하여
대동법 실시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박 진;
자 명보(明甫), 시호 의열(毅烈)이다. 1589년(선조 22) 심수경(沈守慶)의 천거로 등용,
선전관(宣傳官)·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함께 소산(蘇山)을 지키다가 패하여 성안으로 돌아왔다가,
적병이 밀려오자 성에 불을 지르고 후퇴하였다. 이어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영천(永川)의 적을 야습(夜襲)하여 수천 명을 살해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봉해졌다.
또 안강(安康)에서 장군회의를 열고 16읍(邑)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쳤으나,
병사 약 500명을 잃고 후퇴하였다. 한 달 뒤 신예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퍼부어
경주성을 탈환하였다. 그뒤 전라·황해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참판에 이르렀고,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었다.

비격진천뢰 [ 飛擊震天雷 ] ;

1986년 3월 14일 보물 제860호로 지정되었다.
진천뢰라고도 한다. 지름 21cm, 둘레 68cm, 죽통(竹筒) 구경 5.2cm,
개철(蓋鐵) 구경 7.6×8.4cm이다. 화약혈(火藥穴) 구경 6.2cm이다.
궁중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군기시(軍器寺)의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하여 대완구(大碗口)라는
중화기로 쏜 포탄으로, 임진왜란 때 공성화기(攻城火器)로서 위력을 발휘했다.
위 아래는 둥글고, 허리는 퍼진 모양이며, 위 한가운데는 뚜껑인 개철을 덮을 수 있도록
방형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신관(信管)과 같은 발화장치인 죽통을 넣을 수 있도록
구경 5.5cm 정도의 구멍이 있다. 허리에는 화약을 넣고 격목(檄木:뇌관)을 박는 화약혈이 있다.
발화장치인 죽통 속에는 도화선인 약선(藥線)을 감는 나선형의 목곡(木谷)이 들어가는데,
빨리 폭발시키려면(근거리 발사) 10곡(曲), 늦게 폭발시키려면(원거리 발사) 15곡으로
약선을 감아서 죽통에 넣는다. 이와 같이 해서 만들어진 죽통을 빙철(憑鐵)과
함께 진천뢰 속에 넣고, 죽통의 도화선 끝을 개철 구멍을 통하여 밖으로 빼내어
발사할 때 불을 당기도록 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왜병에게 쫓겨 경상북도 안강(安康)으로 진을 옮긴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박진(朴晋)이 경주싸움 때 경주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을
선봉으로 하여 비격진천뢰를 써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해군의 함포(艦砲)에도 이를 이용하여 많은 적의 함선을 부수었다.
이 화기는 현존하는 같은 종류의 유물 중, 공정과정이 가장 우수하고 보존상태가 좋아
국방과학기술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박 성;
자 덕응(德凝). 호 대암(大菴). 정구(鄭逑)의 문인. 배신(裵紳)에게 사사,
과거(科擧)에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 최영경(崔永慶) ·김면(金沔) ·
장현광(張顯光) 등과 사귀었다. 정인홍(鄭仁弘)과도 친했으나 그가 대사헌에 올라
권세를 부려 절교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정유재란 때는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참모로 종군,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으로 활약했다.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사포(司圃)가 되고 이어 공조좌랑(工曹佐郞) ·
안양현감을 지낸 후 모든 벼슬을 사퇴했다.
임진왜란 때의 활약이 《대암유사(大菴遺事)》에 실려 있다. 문집 《대암집》이 있다.

손인갑 ( 孫仁甲 ) ;

본관 성주(星州). 선조 때 무과에 급제, 북보만호(北堡萬戶)를 지냈으며,
1589년(선조 22) 비변사(備邊司) 이산해(李山海) 등의 천거로 가덕진(加德鎭)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합천(陜川)에서 김면(金沔)·
박성(朴惺) 등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무계(茂溪)에서 왜군을 격파,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마진(馬津) 싸움에서 전사,
병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박정룡;
자는자운, 호는덕곡, 조선때 관찰 판관을 지냈다,

박지수;
조선때 절충장군,용양위호군,오위장을 역임하였다,

박진원;
조선때 참판을 역임 하였다,

박은춘;
자 명화(命和), 호 동계(東溪)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 당포해전에서 적장(敵將)을 사살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선봉장이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연락이 두절된
진주성(晉州城)에 단신으로 뛰어가 사정을 정탐하여 보고하는 등 명장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후 인동부사(仁同府使)에 임명되었다가 1598년 노량해전에서 분전 중 화살이 떨어져
창검으로 적을 무찌르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호조참의가 추증되고
흥양(興陽)의 봉암사(鳳巖祠)에 배향되었다.

박이서;
자 서오(敍吾), 호 비천(泌川)·동고(東皐), 시호 충간(忠簡), 초명 문서(文敍)이다.
1588년(선조 21)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군자감(軍資監) 참봉이 되고
1592년에는 병조좌랑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순찰사(巡察使) 종사관이 되어
황해도 지방의 군량을 맡아보았다. 1595년 정언(正言), 이듬해 황해도
독운어사(督運御史)가 되었다가 돌아와 정언·교리(校理)가 되었다.
1599년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어 여강(驪江)에 은거하였다.
1607년 대사령(大赦令)으로 복직되어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 되었다.
광해군 초기에 사간(司諫)으로 등용되었으며 1611년(광해군 3) 대사간에 이어 병조참지·
충청도관찰사·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담양부사·승지·이조참판·
성균관동지사(成均館同知事)·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여러 차례 대북파(大北派)를 탄핵하다가 삭직되었다.
뒤에 서반직(西班職)으로 복직되고 영광군수로 나갔으나 전라도관찰사
이창준(李昌俊)의 탐학(貪虐) 행위에 실망하여 사직하였다.
그후 다시 복직되어 1620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실종되었다.

박 호;
자 대건(大建). 1584년(선조 17)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시험관 박순(朴淳)이 어린 나이에 장원이 된 것을 의심하여,
시간을 정하고 운자(韻字)를 불러 시험하니 즉석에서 시를 지어 그를 놀라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찬(修撰)으로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상주(尙州)에서 싸우다가, 동료 윤섬(尹暹) ·이경류(李慶流)와 함께 죽었다.
직제학(直提學)이 추증되었다.

상주싸움 ;

1592년(선조 25) 이일(李鎰)이 왕명을 받들어 왜병을 막기 위하여
도착하였으나 상주목사 김해(金懈)는 이미 도망간 뒤였다.
이일은 곡식을 풀어 백성을 모으고 흩어진 군졸과 무기를 수습하여 선산(善山)을 거쳐
상주로 침공한 왜병에게 대항하였으나 박호(朴蛭)·윤섬(尹暹)·이경류(李慶流)·
권길(權吉) 등이 전사하고 자신도 몸을 피하여 상주가 함락되었다.

충신의사단비 [ 忠臣義士壇碑 ] ;

1999년 12월 30일 경상북도기념물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윤섬(尹暹)·
이경류(李慶流)·박호 등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휘하의 충신 3명과
김준신(金俊臣)·김일(金鎰) 등 이 지방 출신의 의병장 2명을 포함한 5명의
충절을 포상하기 위해 정조가 내린 단비(壇碑)이다.
비는 1794년(정조 18)에 건립된 것으로서 원래 상주시내에 있던 것을 1986년 10월
현재의 위치인 상주시 북천(北川)의 북쪽 산록으로 옮겼다.
윗부분이 둥그스름하게 되어 있으며, 크기는 높이 150㎝, 너비 18㎝, 두께 19.5㎝이다.
1986년에 새로 건립된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비문에는 정조의 교서 내용이 새겨져 있다.
당시 상주전투에서 전사한 인물로는 위의 5명 외에 상주판관(尙州判官) 권길(權吉),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김종무(金宗武:1548∼1592), 호장(戶長) 박걸(朴傑)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후일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위의 5명은 제외되었는데,
1738년(영조 14) 성이한(成爾漢)·성이항(成爾沆) 등이 무양동(武陽洞)에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건립하고 증연사(甑淵祠)라 하였다.
증연사는 3년 뒤 반대파에 의하여 헐렸고, 1790년(정조 14) 상주 사림들이 그 터에
경절단(景節壇)을 설치하여 이들을 제향하였다. 2년 후 상주 사림들의 청원으로 정조가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이라는 단호(壇號)를 내리면서 이들의 충절에 대한 제문을 지어
경상관찰사로 하여금 제를 올리게 하였다. 의병장 김일은
1793년(정조 17)에 추가로 배향되었고, 다음해에 정조가 이들의 공을 논한 교서를 내렸는데, 이를 계기로 이 비를 세우고 교서의 내용을 비문에 새겼다.
흥충보존위원회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박춘성;
1592년(선조 25)임진외란때 왕을 의주로 호송한공으로,
호성공신에 추중되었고,밀양군에 봉해졌다,

박자응;
자는 응길,호는읍백당,1613년(광해군5)문과에 급제하였으나,페모사건이 일어나
벼슬길에 오르지않다가 그 후에 영광군수,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박응수;
?~1598년(선조31)자는 한서,호는매헌, 은춘의 아들로서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에 호종,중부장이 되고 환도후에 판관이 되었다,
1598년 아버지가 전사하자 출정을 자청,선조로부터 말과 화살을 하사받고
노량에가서 이순신과 회견후 정기수,이환과함께 적진에돌입하여 적을무찌러다가 전사하였다,
병조참의에 추중되고,흥양의 봉암사에 제향되었다,

박인복;
후령(厚齡)의 아들. 뛰어난 무예(武藝)로 천거받아 사복시(司僕寺)에 보직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아버지가 전사하자 의병을 모아 복수장(復讐將)으로 분전,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에서 큰 공을 세워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가 되었다.
1595년 판관(判官)으로 전라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적탄에 맞고 전사하였다. 형조참판이 추증,
진도(珍島)의 효충사(孝忠祠)에 배향되었다.

박종남;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1583년 이탕개(尼湯介)를 토벌한 공으로
절충장군에 올랐다. 이듬해부터 부령(富寧)·길주·온성(穩城)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춘천부방어사로서 왜군의 북진을 막았고,
분조(分朝)의 동부승지·병조참의를 지냈다. 1593년 진주목사로 나갔으나,
관찰사와의 의견대립으로 파직되었다.
이순신(李舜臣)에 의해 주사조방장(舟師助防將)에 발탁되어,
한산·장문(場門)·영등포·견내량(見乃梁) 등의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뒤에 상주·광주의 목사로 있다가 회령부사로 전임하였다.
대사헌 홍여순(洪汝諄)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이탕개의 난 [ 尼蕩介-亂 ] ;

여진족에 대한 정책은 세종대왕의 4군(郡)·6진(鎭)의
개척 이래 그들을 회유하고 정벌하면서 교린정책을 썼지만, 여진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탕개는 여진족의 우두머리로서, 선조 초기부터 함경도의 6진에
출입하면서 조선 조정에 공순(恭順)의 뜻을 표시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주며
후대하였다. 그러던 중에 만주와 조선의 국경지대인 경원성(慶源城)에 사는
여진인들이 전(前) 진장(鎭將)을 비난하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이탕개는 그들과 합세하여 조선에 반기를 들었다.
반란이 발생하였을 초기에 경원부사(慶源府使) 김수(金璲)가 여진군에게 패퇴하자,
그들은 성을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경원부 내의 모든 진(鎭)과 보(堡)를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웃 고을인 온성(穩城)의 부사 신립(申砬)과 첨사(僉使)
신상절(申尙節) 등이 일어나 여진군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두만강 너머로까지 추격하여 그 소굴을 소탕하였다.

박흥남;
자는석윤,호는 귀암, 밀선군 춘성의손자,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의병이되어
황진을따라,금산의 이,웅치등에서 용전,이듬해진주에가서 용전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구천사 ( 龜川祠 ) ;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58호로 지정되었다.
남원시와 곡성군 사이의 국도변에 있다. 정면 3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입구에 삼충사(三忠祠)라고 쓴 현판이 붙어 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밀양박씨 3충신(三忠臣)을 봉안하기 위하여 1856년(철종 7) 건립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왕의 어가(御駕)를 모시면서 한시도
호위를 게을리하지 않은 공으로 사후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진 박춘성(朴春成)과,
그의 손자로 진주성싸움에 참전하였다가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여 뒷날
선무훈(宣武勳)에 녹훈된 박흥남(朴興男)·박연수(朴延壽)를 배향한다.


박수일;
자 순백(純伯). 호 건재(健齋) ·명경(明鏡). 이황(李滉)과 경의(經義)를 토론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경임(盧景任)과 의병을 일으켜 참봉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사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건재일고(健齋逸稿)》가 있다.

산동면 [ 山東面 ] ;

면적 59.33㎢, 인구 4,206명(2001)이다. 동쪽은 장천면(長川面)과
군위군 소보면(召保面), 남쪽은 인동동(仁同洞), 서쪽은 고아읍(高牙邑)·해평면(海平面),
북쪽은 군위군 소보면에 접한다. 10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지형적으로는 베틀산과 비재봉·곰재봉을 잇는 능선을 중심으로 북동사면은
경사가 급한 편으로 곡정천(谷亭川:渭川의 지류)의 상류부를 이루고 남서사면은
완만하며 100m 미만의 낮은 구릉성 지형을 이룬다. 남부의 하계망은 망상형을 이루고 있어
곳곳에 수로를 막아 많은 소류지(小溜池)가 분포하고 있다.
잎담배 재배가 시내에서 가장 많고, 사과·포도 등의 과수 재배도 성하다.
교통은 상주~대구 간 국도가 중앙부를 관통하며 3개의 지방도가 이와 연결되어
비교적 편리하나, 북부지역은 산간 지역으로 교통이 불편하다.
문화재로는 박수일 묘(朴遂一墓), 선산 도중리(道中里) 석탑·석상(石像),
경모재(景慕齋), 황국서(黃國瑞) 기념비, 인덕리 의우총(仁德里義牛塚),
선산 인덕사지(仁德寺址), 인덕리 석불좌상 등이 있다.

박승종;
자 효백(孝伯), 호 퇴우당(退憂堂), 시호 숙민(肅愍), 판서 계현(啓賢)의 손자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8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9년 봉교(奉敎)를 거쳐 지제교(知製敎)·병조정랑을 지냈다.
1600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제학(副提學)·병조판서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형조판서·의금부판사 등을 지냈다. 우의정·
좌의정에 이어 1619년 영의정에 오르고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앞서 1612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윤인(尹瑠) 등의 일당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저지하였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에도 극력 반대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손녀가 광해군의 세자빈(世子嬪)이 되어 그 일족이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사실을 자책,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하였다.
관작이 추탈(追奪)되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삼창 ( 三昌 ) ;

조선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 박승종(朴承宗),
유희분(柳希奮) 등 세 권신(權臣)을 통틀어 일컫는 말.
이들은 각각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이었는데, 이들의 부원군호(號)에 모두 창(昌)자가 붙었으므로
이렇게 불렸다.
이들은 북인(北人)이었으나, 그 중 이이첨은 대북(大北)에, 박승종·
유희분은 소북(小北)에 속하였다. 또한 그들은 서로 인척관계로 맺어졌는데,
박승종의 아들 자흥(子興)은 이이첨의 사위이며, 자흥의 딸은 세자빈(世子嬪)이었다.
또한 유희분은 광해군의 처남이었다.

정문익 [ 鄭文翼 ] ;

본관 초계(草溪). 자 위도(衛道). 호 송죽당(松竹堂).
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문과에 장원,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박승종(朴承宗) ·유희분(柳希奮)의 심복이라 하여 이이첨(李爾瞻)의
미움을 받던 중 1616년 한찬남(韓纘男)의 상변사건(上變事件:海州獄事)에도
이름이 올라 있어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재등용되었으며, 31년(인조 9) 사신으로 선양[瀋陽]에 다녀와서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문집에 《송죽당집(松竹堂集)》이 있다.

김응하 [ 金應河 ] ;

본관 안동. 자 경의(景義). 시호 충무(忠武). 철원 출생.
1604년(선조 37)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말직으로 전전하다가,
1608년 박승종(朴承宗)이 전라도관찰사가 되자 그 비장(裨將)으로 기용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선전관으로 임명되고, 삼수군수(三水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 건주위(建州衛)를 치려고 명(明)나라에서 원병요청을 하자,
이듬해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참전하였다.
명나라 유정(劉綎)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부차령(富車嶺)에서 패하여 자결하자,
3천 명의 휘하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1620년 명나라 신종(神宗)이 그 보답으로 요동백(遼東伯)으로
추봉(追封)하고, 처자에게는 은(銀)을 하사하였다.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철원의 포충사(褒忠祠), 선천의 의열사(義烈祠) 등에 배향되었다.

오숙 ( 吳塡 ) ;

본관 해주(海州). 자 숙우(肅羽). 호 천파(天坡).
1612년(광해군 4) 진사(進士)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어 명나라에 보내는 진주문(陳奏文)을 초안,
그 문장이 뛰어나 이튿날로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승진하고 그뒤
병조좌랑을 지냈다. 유희분(柳希奮) 문하의 팔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인조반정 뒤,
앞서 광해군 때 유희분 ·박승종(朴承宗) 등에게 아부했다는 지탄을 받았으나
친교가 있던 심기원(沈器遠)의 주선으로 정언(正言) ·교리(校理)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公州)에 호종,
그 공으로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고 이듬해 사은 겸 주청부사(謝恩兼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33년(인조 11)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 가도(땅島)의 분쟁을 수습,
백성들을 안무(安撫)했다. 이듬해 명나라 사신 황손무(黃孫武)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했다. 문집 《천파집(天坡集)》(4권)이 있다.

해주옥사 ( 海州獄事 ) ;

1616년(광해군 8)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 데
장애 요소로 지목된 소북(小北)의 박승종(朴承宗) ·남이공(南以恭) 등을 제거하려는
이이첨(李爾瞻)이 박희일(朴希一) ·박이빈(朴以彬) 등을 사주하여,
해주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에게 소북 일당이 모역(謀逆) 중이라는
고변(告變)을 올리게 하였다. 최기는 이들을 무고로 몰아 장형(杖刑)에 처하고
고변장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이를 감시하던 이이첨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고 최기를 남형죄(濫刑罪)로 몰아 처형한 다음,
관련된 소북파 수백 명을 제거하였다. 이후 대북파는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며 권력의 전횡을 심화해 갔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에 의하여
이 사건이 대북파의 조작임이 밝혀지고, 최기도 신원되었다.

일사기문 [ 逸史記聞 ] ;

필사본. 1책. 편자 미상. 먼저 임진왜란에 대해 간략하게 기록하고,
선조가 독살되었다는 내용과, 광해군대의 정치상황,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등을 기록하고 있다.
정사(政史)에서 서술되지 않은 야사(野史)들을 주로 수록하였으며,
편찬자의 견해도 소개되어 있다.
광해군의 실정과 이이첨(李爾瞻) ·박승종(朴承宗) ·유희분(柳希奮) 등
광해군대에 정국을 주도한 인물들의 탐학상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고,
인조반정의 상황과 반정을 주도한 인물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조반정을 정당화하는 것에 초점이 두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판한 사실,
김직재(金直哉)의 역모사건, 이괄(李适)의 난, 유효립(柳孝立)의 옥사,
병자호란 때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등 광해군~인조대의 주요한 정치적 사건들이
서술되어 있어서 이 시기의 정치사 연구에 도움이 된다.
《대동야승(大東野乘)》 14책에 수록되어 있다.

화기도감 [ 火器都監 ] ;

병조에 예속된 임시관청이다.
1614년(광해군 6) 임진왜란 때 왜병의 조총에 대항하는 화기를 만들기 위해 설치한
조총청(鳥銃廳)을 개편한 것으로, 도제조 1명, 제조(정2품 이상) 5명, 도청(都廳) 1명,
좌우낭청 각 2명을 두었다. 이때에 도제조는 기자헌(奇自獻), 제조는 유근(柳根) ·
박승종(朴承宗) ·이상의(李尙毅) ·이수일(李守一) ·이경량(李慶梁) 등이 임명되었다.
불랑기(佛狼機) ·현자총(玄字銃) ·백자총(百字銃) ·삼안총(三眼銃) ·
소승자장가(小勝字粧家) ·쾌창(快脈) 등을 제작하고,
만든 무기는 비변사(備邊司)의 지휘를 받아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치영(緇營),
각 도의 병사아문(兵事衙門) 등 각 진영에 배치하였다. 당시 청나라가 강성해지자 이에
대비하여 총포를 제작하기 위해 설치했는데, 대략 1년간 존속하면서 기능하다가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주일고 ( 無住逸稿 ) ;

목판본. 6권 2책. 규장각 ·장서각 도서. 간년(刊年) 미상.
권1에 시를 실고, 권2 ·3에 왕에게 올린 소(疏) ·계(啓)와 제문 등을 실었다.
권4는 <조천일기(朝天日記)>로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기록이며, 권5는 <서행록(西行錄)>
<조천록(朝天錄)> 등을 모았는데, 저자가 낙향하면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면서,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친구들과 읊은 시들을 담은 것이다.
마지막 권에는 저자에 대한 행장 ·제문 등을 실었다. 저자는 인조 때에 관직생활의
핵심적 기간을 보내는데, 대단히 강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평안도축성급영변부민폐소(陳平安道築城及寧邊府民弊疏)>
<진경상우도관방이해급안음현민폐소(陳慶尙右道關防利害及安陰縣民弊疏)> 등은
지방관 근무시에 작성한 소로, 국방문제뿐만 아니라 현지의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정확히 지적하고 개선책을 제시한 것이다. <논박승종적몰계(論朴承宗籍沒啓)>는
인조반정 후, 자살한 박승종에 대해 가산 적몰이 부당하다는 것을 의리론적
입장에서 주장한 것인데, 반정공신의 미움을 받아 영변으로 좌천하는 계기가 된 글이다.
저자는 문신이면서도 국방에 대해서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논자비총소(論自備銃疏)>는 포수의 훈련과 관련된 방책을 제시한 것이다.
개인적인 글로는 스승인 정경세(鄭經世)와 성리학에 대해 문답을 나누는 편지가 있고,
스승을 위해 지은 제문도 실려 있다. 아들이 지은 행장에는,
저자의 관직생활과 관련된 사건의 전말을 상소문을 중심으로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유희분 ( 柳希奮 ) ;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형백(亨伯), 호는 화남(華南)이다.
아버지는 광해군의 장인인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자신(自新)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남행(南行)으로 관직에 올랐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익찬(翊贊)으로 세자를 호종하였다. 159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다. 1599년 수찬으로 있을 때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했다가
민몽룡(閔夢龍)이 그 부당함을 들어 그를 문책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파직당하였다.
1601년 세자시강원 문학에 등용되었고, 1602년 응교 겸 교서관교리로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역대 실록의 재간행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이조좌랑·
사서 등을 거쳐 1603년 사옹원정(司饔院正)이 되고 다음해 응교(應敎)·
전한(典翰) 등을 역임하고 1607년 사성,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왕의 처남으로 그의 일문이 요직을 차지하였다. 예조참판이 된
유희분은 이이첨(李爾瞻) 등과 함께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 일파를 탄핵하여
숙청한 뒤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대북에 가담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대사간·
도승지와 이조·병조·형조의 참판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임해군(臨海君)·영창대군(永昌大君) 등을 무고하여 죽이는 데 가담한 공으로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1612년(광해군 4) 시인 권필(權糧)을 무고하여
유배당하게 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이이첨·
박승종(朴承宗) 등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기 위하여 대북에 속한 언관·
유생들을 동원하여 폐모론을 일으켰다. 이 해 11월 반대파를 물리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데 성공하고, 이에 반대하는 관료·서인·유생들을 모두 투옥하거나
유배하는 등 횡포를 자행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써 붙잡혀 참형을 당하였다.

적자봉 ( 赤紫峰 ) ;

높이 435m. 보길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숨은 진주다.
해가 수평선으로 가라앉을 때 하늘과 바다가 붉은색·보라색·노란색·주황색으로
물든 무지개빛 노을은 신비롭다. 산정에서 이 장관을 바라보면 신선이 된 듯한
황홀함을 느낀다. 이처럼 붉은색과 보라색 등의 찬란한 빛이 황홀경을 되쏘는 봉우리라서
‘적자봉’이라 한다.
소백산맥의 지맥인 해안산맥 끝부분이 침강하여 형성된 완도군 203개 도서 중 60개
유인도의 하나인 보길도의 주봉이다. 산발치 부황리(芙黃里)에는 조선 중기 효종 때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낸 남인(南人)의 거두로서 한국 시가의 새 길을 연 대시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유적지(사적 368)가 있다.
고산은 서울에서 나서 큰집에 입양되고 해남윤씨의 대종을 이었다. 일찍 이이첨·
박승종·유희분 등을 규탄했다가 함경도 경원 등지로 유배되었다. 8년 뒤 인조반정 때
풀려나 의금부도사가 되지만 사직 낙향하여 모든 관직의 임명을 사퇴하나,
1628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 등을 보도(輔導)했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왕을 모시지 못해 영덕에 귀양갔다가 풀리자 고산은 은둔차
제주로 가다가 이곳 부용동(芙蓉洞)에 세연지(洗然池)·회수담·옥소대·세연정·
호광루·동화각·낙서재·동천석실·승룡대 등을 조성하고 자리잡았다. 그는 효종이
등극하자 한때 출사했다 돌아와 《어부사시사》 등이 실린 《고산유고》를 남겼다.
이 산은 남쪽에 누운 거대한 암소가 새끼를 어르듯 북으로 광대봉·망월봉·일락봉
등 300m 안팎의 산들을 품고 있다. 온 산이 사철 동백나무·예덕나무·정금나무·
곰솔 등 250여 종의 식물들로 수해(樹海)를 이루어 늘푸른 산의 생기를 나눠준다.
정상 부근에는 섬회양목 등 많은 희귀식물들이 향기를 뿜고 기암괴석들이 산꾼들을 맞는다.
멀리 해남의 땅끝과 달마산, 완도의 상황봉(644m)까지 가물거린다.
가까운 예송리의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상록수림과 해수욕장도 가볼 만하다.

박희현;
1566년(명종21)~?,자는자순,호는간암,
첨정 효원의 아들로 1601년(선조34)진사가되고,1610년(광해군2)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박효남;
1553년(명종 8)~1611년(광해군 3)자는 자순, 호는일암, 좌찬성 열의증손,
장단부사 웅의아들,1579년(선조12)생원시에 합격,1591년(선조24)선균관 유생을이끌고
대궐앞에 엎드려 무고를입은 제상을구하도록 상소했다,
1601년(선조34)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가되었다가,
성환도 찰방에 전출되었다,
뒤에 전적을거쳐 결성 현감이되어 선정을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608년(선조41)병조좌랑이되고 호조,형조,공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2)태천현감으로나가 수로공사의 부진으로 파직당했다,

박정길;
자 양이(養而).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
1606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인(舍人)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1618년 전한(典翰) ·직제학을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그해 성절사 겸 진주사(聖節使兼陳奏使)로, 동지사(冬至使)를 겸하여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0년 대사성 ·공조참판을 지내고, 1622년 문안사(問安使)로서
명나라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을 영접하고, 이듬해 병조참판을 지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앞서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일로 주살되었다.

박세중;
자는군극,호는무은,궁마에능하여 무과에급제,
첨절제사가되고 1624년(인조 2)원수 장만의 막하에서 이괄의난을평정하는대
공을세우고 지중추부사에 승진하였다,1636년 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이를해산,사직하고 출사하지않았다,

풍양사 [ 楓陽祠 ] ;

2000년 6월 23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1685년(숙종 11)에 창건하고 1905년(광무 9)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 무신 무은(霧隱) 박세중(朴世中:1595∼?)을 모시며,
박세중가전고문서(朴世重家傳古文書:전북유형문화재 147)를 보관하고 있다.
전면 3칸, 측면 1칸의 一자형 맞배지붕 건물로, 부연(附椽)과 방풍판을 달고 앞에
툇간(退間)을 두었으며 단청을 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퇴색하였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박세중은 고려시대 문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박언부(朴彦孚)의 13세손이며 참판이
된 박검종(朴儉宗)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아 23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1등에 오르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는 원수 장만(張晩)을 따라 많은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2등에 올랐으며, 1640년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밀양박씨 무은공파(霧隱公派)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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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
본관 밀양, 자 중로(重老), 호 의곡(義谷)·응천(應川), 이산해(李山海)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알성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어 임진·정유의 난을 전후하여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이어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1601년 예조좌랑(佐郞)이 되고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6년(광해군 8) 강원도관찰사, 1618년 중추부동지사를 역임하고,
사은(謝恩) 겸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공조참판이 되었다. 1625년(인조 3) 사은사로 세 번째 명나라에 다녀오고,
1632년 형조판서·중추부지사를 지냈다.

청계정 [ 淸溪亭 ] ;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97호로 지정되었다.
1546년(명종 1)에 박원순(朴元恂)이 건립하였다. 박원순은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이곳에 누정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쓰며 지냈다. 정자 부근에 은행나무를 심고 연못을 팠는데,
그 위에는 홍교(虹橋)를 설치하여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박원순이 죽자 은행나무와 연못의 물이 말랐다가 삼년 뒤에
다시 살아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정면 2칸, 측면 2칸이며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은 지 오래되어 퇴락하게 되자
13세손인 박정현이 중수하였다. 김성갑, 김상현, 기정진 등의 기문이 있다.
기단은 벽돌과 시멘트로 근래에 축조되었고,
그 위에 커다란 덤벙주춧돌을 놓은 다음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머리에는 경사지게 깎은 보아지를 끼워 주두를 받치고 있다.
주두 위에는 커다란 대들보를 통간에 걸쳐 단일부재로 얹었으며,
직각 방향으로 장혀받침 굴도리를 놓아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창방을 걸치고 그 위에 소로를 놓아 장식하였다. 가구는 5량 구조이며,
대들보 위에 낮은 동자주(童子柱)를 세우고 종량(宗樑)을 걸쳤다.
천장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정면 2칸 중 왼쪽 칸을 방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마루를 깔았다.
마루 주위는 평난간을 돌렸는데 호롱병의 장식이 아름답다.
뒷면과 오른쪽 면에 문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박대덕;
자 사화(士華). 호 합강(合江). 조호익(曺好益)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조호익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 5백여 명을 모집해 싸우는 등 수차 공을 세워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70의 고령으로 출정치 못하고
피난 도중 양덕(陽德)에서 적을 만나 일행을 독전해 적을 물리쳤다.
1648년 부사(府使) 이정남(李井男)이 그 공적을 조정에 보고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김육(金堉)의 천거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대사헌에 추증되고
성천(成川) 학령서원(鶴翎書院)에 제향되었다.

박수춘;
자 경로(景老). 호 국담(菊潭).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싸웠다. 1636년(인조 11) 병자호란 때도
의병을 모았으나 화의가 이루어져 입산, 숭정처사(崇禎處士)를 자처하며 학문을 닦았다.
정구(鄭逑) 등과 태극설(太極說) 등을 토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호조참의에 추증, 대구 남강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 《국담문집》,
저서 《독서지남(讀書指南)》 《학문유해(學問類解)》 《도통연원록(道統淵源錄)》
《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問淵源錄)》 《의례견문해(疑禮見聞解)》 등이 있다.

국담선생의 충절 ;

선생은 이조 인조(仁根)때 학자로 휘는 수춘(壽春)이요
자는 경로(景老)이고 호는 국담(菊潭)이며 본관은 밀성(密城)으로
일직부원군(密直府院君)의 16 세손 이며 무진재 박실(無盡齋 朴愼)선생의 아들이다.
선생은 아버지인 무진재 박 신(無盡素 朴 愼)선생의 뜻을 받들어
1597년(이조 선조 30년)에 왜적이 또다시 쳐들어온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의병(義兵)을
일어켜 경남 창녕 (昌寧)에 있는 화장산성 (火旺山城)에 들어가 홍의장군 망우당
곽 재우(忘憂堂 郭 滯枯)선생을 도와 고락을 같이하여 활약하였다. 병란이 끝나자
학문에 전념하고 후학들의 교도에 힘을 다하였고 많은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선생은 1636년 (인조 14년)에 병자호란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또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싸울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는데 화의가 성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산으로 들어가
숨어 스스로 숭정처사(崇幀處士)라 하였다.
또한 선생은 문장에 능하고 성리학(性理學)의 연구가 깊었는데 일찌기
한강 정 구(寒岡 鄭 逑)선생과 더불어 태극설(太極說)을 토론하고
여헌 장 현광(旅軒 張 顯光)등과 성리학(性理學)의 이기지설(理氣之說)을 강론하고
연구하니 선생의 성리학 (性理學)은 깊은 경지에 달하였다.
선생은 또 정 인홍(鄭仁弘)이 송계 신 계성(松溪 申季誠)의 여표비(閭表碑)를 세웠는데
그 글에 해현 안 유(해軒 安 裕)선생과 퇴계 이 황 (退溪 李 滉 )선생을 비방하고 헐뜯었다.
선생은 정 인홍(鄭 仁弘) 을 만나 그 글의 잘못을 면척 (面斥) 하고 그 비를
넘어뜨렸다 하며 이에 정 인홍(鄭 仁弘) 이 이를 .노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했다 한다.
선생은 1651년( 효종 3년) 에 나이 81세로 돌아가시 니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 ( 戶曹參議 )를 증직하고 청도군 각북면 남산동에 있는 남강서원 ( 南問香院)에
제향하였다. 또한 선생은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국담집 (菊潭集 ) , 독서지남(讀書指南),
학문유해(學問類解), 도통연원(道統淵源), 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問淵源錄),
의례 견문해 (疑禮見 聞解 ) 등이 있다.
선생이 치병 (義兵)을 모집하여 나라를 위해 싸울려던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인조 14년)에 청태종(淸太宗)이 우리나라에 침입하여여일어난 싸움으로
청태종(淸太宗)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다. 압록강을 건는지
10여일 만에 벌써 서을 근교에 도착하였다. 이때까지도 조정에서 주전론 자와
주화론자가 서로 맞서 의론이 분분하였는데 임금은 남한산성 (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고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었고 이어 인조(仁祖)는 항복하여 소현세자 (昭顯世子) 와
불림대군 (鳳林大君)이 인질로 끌려가고 척화파(斥和派)의 강경론자인 홍 익한(洪 翼漢) ,
윤집(尹集), 오 달제 (吳 達濟)등 삼학사는 잡혀가 처형 당하고 그 후
1639년 (인조17년)청나라는 우리나라에 강요하다 청태종 송덕비 (淸太宗 頌德碑)를
상전도(三田渡)에 세우게 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완전히 명의 손을 떠나서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왕세자(王世子)와 왕자 (王子)를 비롯하여 사대부 집안 사람들과
10수만의 남여.노소가 끌려가 심양(潘陽)성밖의 노예시장에서 울리는 곡성이 친지를
진동하였고 이 사람들 중에는 관속으로 풀려 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 수는 적은 것이
었고 사속「私贖)으로 풀려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몸값은 수천량에서
수만량에 달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조선명인전, 도주지, 화왕산 동고록)

박영신;
자 인보(仁輔), 시호 충장(忠壯)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고, 1614년(광해군 6)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오위장(五衛將)이 되고 경원부사(慶源府使)를 거쳐
풍천부사(豊川府使)로 갔다가 이듬해 이괄의 난 때 포로가 되었으나
끝내 반란군에 협력하지 않아 참살당하였다. 병조참판이 추증,
금천(金川)의 민충사(愍忠祠)에 배향되었다.

박자흥;
자 인길(仁吉). 초명 흥립(興立).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딸이 세자빈(世子嬪)이 되자 설서(說書)에서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민전(民田)을 탈취하는 등으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정언 ·사서 ·
형조참의 등을 거쳐, 참판(參判)에 올라 이이첨(李爾瞻)의 딸과 재혼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경기도관찰사로서 아버지 승종(承宗)과 같이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함께 자결하였다.

박 노;
1548년(선조17)~1643년(인조21),자는노직, 호는대호, 이조참판 이서의아들로서 1609(광해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후 홍문관수찬,교리,지평,직강등을거쳐
안동부사에서 사퇴하였다,1624년 이괄의 난때,산직으로서 왕을 호종, 장연부사로 기용되고,
1627년 정묘호란때 순검사 종사관으로 왕을 강화에 호종하여 그 공으로 장악원정이 되었다,
후금이 변방을공략하는 등으로 조선을괴롭이히자,1631년회답사,추신사,뒤에 다시추신사등으로
심양에가서 거들을회유했고, 1636(인조14)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신으로 적진에
세번이나들어가 조약을어기고 불법침입한 것을공박 40일동안잡혀있다가
화의성립후 풀려돌아왔다, 이듬해 소현세자가 불모로 심양에 들어갈때 세자빈객으로
따라덜어같다가 신병으로 3년만에 귀국한후 좌승지,도승지를거쳐 1642년 병조참판을지냈다,

박수홍;
자 언유(彦裕).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이어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정랑(正郞)으로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겸직하였다. 1
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로 인조를 호종하고, 돌아와 금구현령(金溝縣令)으로 나가
전란의 피해복구에 힘썼다. 뒤에 예조참의(參議) 등을 거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
임기를 마치고 상주(尙州)에서 죽었다.

선주동 [ 善州洞 ] ;

면적 15.11㎢, 인구 2,787명(1999)이다. 경상북도 구미시에
속한 동이다. 구미시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도량동·원남동, 서쪽은 김천시,
남쪽은 칠곡군, 북쪽은 고아면에 접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산군 상고면(上古面)에 속했으며, 1978년 구미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봉곡동(逢谷洞)·부곡동(釜谷洞)·선기동(善基洞)·수점동(水店洞)을 통합하여
선주동이라 하고 구미시에 편입되었다. 1999년 행정동 통폐합에 따라 원남동과
함께 선주원남동으로 통합되었다.
법정동은 봉곡동·부곡동·선기동·수점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곡동은 마을에
쑥대가 많아 다부(多富) 또는 다붓골이라고도 하였으며, 동 이름은 옛날 이 마을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수홍(朴守弘)의 호가 봉곡(逢谷)인 데서 유래한다.
부곡동은 마을 모양이 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가야시대에는
감문국(甘文國)이 이곳에 있었다 한다. 선기동은 조선시대 선주부(善州府)가 있던
마을로서 이곳 원님의 성품이 어질어 고을을 잘 다스렸으므로 선주부가 있던 터를
선지터라고 하였다.
수점동의 수점(水店)은 금오산 계곡의 물이 급히 흘러내리다가 이곳에서 잠시 쉬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소에게 풀을 먹이는 풀밭이 있는 곳이란 뜻으로 소바탕·쇠바탕·
쇠바태이라고도 하였다. 근처 주곡산 기슭에는 신명사(申命社)의 영사제(永思齊)와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의 제액(齊額)이 있다.
교육기관으로 구미1대학·경구고등학교·경구중학교 등이 있으며, 지역 특산물에 수점
밤고구마가 있다.

선주원남동 [ 善州元南洞 ] ;

면적 28.73㎢, 인구 2만 25명(2001)이다. 경상북도 구미시에
속한 동이다. 동쪽은 원평동·송정동·형곡동과 접하고 서쪽은 김천시, 남쪽은 칠곡군,
북쪽은 고아읍과 경계를 이룬다.
조선시대에는 선산군 상고면(上古面)에 속하였고, 1977년 경상북도 구미지구출장소가
설치되어 선주지소 관할이 되었다. 1978년 구미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봉곡동·
부곡동·선기동·수점동이 합쳐져 선주동이 되고, 송정동·원평동의 일부와 남통동이
합쳐져 원남동이 된 뒤 각각 구미시에 편입되었다. 1999년 행정동 통폐합에 따라
선주동과 원남동을 합해 선주원남동이라 하여 지금에 이른다.
법정동으로는 봉곡동·부곡동·선기동·수점동·남통동과 원평동·송정동 각
일부를 관할한다. 봉곡동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수홍(朴守弘)의 호 봉곡에서
유래하며, 마을에 쑥대가 많아 다붓이라고도 하였다. 수점동은 금오산(金烏山)
계곡의 물이 급히 흐르다가 이곳에서 잠시 쉬어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물이 많은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남통동은 남쪽 도수곡(盜首谷)으로 통하는
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지명에 선주터·덤바우·덤밑에·오롯골[梧洞]·장흥마을·대밭고개·역적골·
덕방(德坊)·아홉싸리[九谷山]·성안마을·댈창골[大惠創谷] 등이 전한다.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이 완료된 봉곡지구와 집단시설지구로 개발된 수점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주거환경이 조성되고 있으며,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 지방도904호선이
지난다. 관광명소로 이름난 금오산도립공원이 있고, 지역 특산물로는 수점 밤고구마가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구미1대학·경북외국어고등학교·경구고등학교·경구중학교·
구미여자중학교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금오산마애보살입상(보물 490), 조정종손가소장문적(보물 1004-2),
채미정(경북기념물 55), 금오산성(경북기념물 67) 등이 있고, 금오산에 약사암·
해운암·금오지·도선굴·대혜폭포 등의 문화유적이 전한다.

봉곡동 효열비각 ( 蓬谷洞孝烈碑閣 ) ;

2000년 9월 4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91호로 지정되었다. 구미시 다봉산(多峰山) 아래 봉곡동 입구에 있으며
1713년(조선 숙종 39)에 지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을
한 비각으로, 뒤쪽에 출입문이 있으며 내부에는 밀양박씨 경주공파 문중의
효자비 두 개가 가운데 나란히 있고 양쪽 벽면에 정려편액이 걸려 있다.
효자비는 남강(南岡) 박진환(朴震煥:1605∼1650)의 효성을 기려 1692년(숙종 18)
나라에서 내린 것으로 두 개 중 왼쪽 것이 본래의 비석이고 오른쪽 것은 6·25전쟁 때
비석이 파괴되자 새로 만든 것이다. 정려편액은 열녀 양주조씨(陽州趙氏:1696∼1724)와
함종어씨(咸從魚氏:1778∼1811)에게 나라에서 내린 것이다. 양주조씨는
경주부윤 박수홍(朴守弘)의 현손인 박항령(朴恒齡)의 아내로,
1725년(경종 5)에 정려가 내렸고, 함종어씨는 박수홍의 9세손인
박래은(朴來殷)의 아내로, 1812년(순조 12)에 정려가 내렸다.
비각의 기단은 낮고 기둥의 굵기에 비해 길이가 짧으며 지붕의 휘어진 정도가 다소 크다.
원래는 앞쪽에 홍살을 세우고 옆면과 뒷면은 심벽(心壁)으로 막았으나 홍살은 없어지고
홍살을 세웠던 흔적만 남아 있다. 앞뒷면의 기둥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고 옆면의
중간에만 모를 죽인 네모기둥을 사용하여 익공(翼工)을 얹었으며,
익공은 연꽃이 조각된 앙설형[仰舌形] 살미 두 개와 봉황머리 장식으로 구성하였다.
정면 주칸 사이에는 화반(花盤)을 하나씩 얹어 도리를 받았다.
2칸 구조를 팔작지붕으로 만들기 위하여 충량(衝樑)을 대들보 위에 가로 세로로 엇걸고
대들보 위에 접시받침을 하여 사압(四押)을 짠 뒤 추녀를 받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사압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마감하여 상부 가구를 가렸고, 바닥은 모르타르로 마감하였다.
상부 결구법과 익공 형식이 잘 보존되어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크다.
밀양박씨 경주공파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박안제;
1590년(선조23)~1663년(현종4),자는계순 형조판서 정현의 아들,1612년(광해군4)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이첨의 페모론을 반대하여 성균관의 유생들을이끌고 이에 황소했다,
1621년 정시문과에 장원, 전적이 되었으나 이이첨의 저지로 3년이나 부임하지못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해미현감, 1627년 지평, 1631년 장령,이듬해 인조의 사친추송을반대하고
목천현감에 좌천되었다, 수찬에 이어 사헌부에 벼슬을지내고,1650년(효종1)다시 수찬
이어 종성부사, 1652년 승지,판결사,뒤에 충주목사,1660년(현종1)병조참의가 뒤었다,

박길응;
자 덕일(德一). 호 진정재(眞靜齋). 음보(蔭補)로 찰방(察訪)이 되어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8년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지평(持平)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때 집의(執義) ·
승지(承旨) 등을 거쳐 참판에 이르렀다. 편저서에 《학안록(學顔錄)》이 있다.

학안록 [ 學顔錄 ] ;

목판본. 1책. 책머리의 《우주요괄》 10조(條)와
《표제요어(標題要語)》 앞에는 1654년(효종 5)에 박길응이 쓴 서문이 있고,
끝에는 1645년(인조 23)에 쓴 정극후(鄭克後)의 발문과 1655년(효종 6)에 쓴
박길응의 발문이 있다. 《학안록》에는 1627년(인조 5)에 박길응과 50년에 쓴
허목(許穆)의 서문이 있고, 책끝에는 1655년에 쓴 강백년(姜栢年) ·박길응의 발문이 있다.


박 의;
자 충국(忠國).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룡(金俊龍)을 따라 용인(龍仁)의
광교산(光敎山)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다.
그 공을 인정받아 평안도 권관(權管)이 되었다.

박지병;
자 여장(汝障)이다. 아버지 영신(榮臣)은 1624년(인조 2) 풍천부사로 재임중
이괄의 난을 만나, 방어사 이중로(李重老) 등과 함께 반란군 장수 이수백(李守百)
에게 잡혀 저항하다 피살되었다. 이수백이 이괄의 목을 베어 투항하여 죽음을 면하고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자, 동생인 지원(之垣)·지번(之蕃) 및 이중로의
아들 문웅(文雄)·문위(文偉) 등과 함께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을 계획하였다.
그가 두려움을 느껴 여주에서 두문불출하자, 스스로 죽었다는 헛소문을 내어 방심하고
관직을 구하러 서울로 올라오게 한 뒤 1634년에 기습, 살해하고 자수하였다.

김시양(金時讓) 등은 국법에 따라 살인죄로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오윤겸(吳允謙)
등 대신이 "충신 아버지를 위해 역적을 친 것"이라고 두호하여 조정에서의 논란 끝에
의성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뒤에 천거받아 정릉참봉·제용감봉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물러났다. 말년에 용양위부호군의 직함을 받았다.

박승건;
1609년(광해군 1)~1667년(현종8),자는 자이,봉례 안행의아들,1630년(인조8)진사가되고,
1650년(효종1)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승문원증자에 등용,이어 전적,예조좌랑,
병조좌랑을거쳐1652년(효종3)정언,사서,직강,예조정랑을 지냈다,
정언으로있을때 형조판서 허적을 논쟁하였으며,1661년(현종2)지평,전라도도사,
이듬해 장령이되었다,
1663년 종부시정에올라 정조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들어가다가
병으로 되돌아왔으며,제용감정을거쳐 1664년 상주목사로 재직중 정부미를 방출하여
기민을 구제하고 민역에 충당한사실로 가자되었다,

박승휴;
자 자미(子美). 성균관 유생 때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이(李珥) ·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하였다.
뒤에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을 거쳐,
1650년(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전적(典籍) ·호조좌랑 ·병조정랑 등을 거쳐,
1655년 사간(司諫) 등을 역임한 뒤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지냈다.
1659년 집의(執義)가 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효자로 알려졌다.

박경지;
자 형보(亨甫). 1635년(인조 13)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무과중시에 장원,
여러 무과직을 거쳐 1643년(인조 21)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이어서 전라남도 ·경상좌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1660년(현종 1)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66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669년에는 한성부좌윤 등을 거쳐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박신규;
자 봉경(奉卿), 호 죽촌(竹村), 시호 청숙(淸肅)이다.
1652년(효종 3) 진사가 되고, 1660년(현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주판관(全州判官)으로 부임하였다. 선정(善政)을 베풀었기 때문에
임기가 끝났으나 백성들의 진정(陳情) 상소로 재임하였다.
뒤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역시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1680년(숙종 6) 형조판서에 특진하고, 이듬해 아들 성의(性義)가 범한 죄로 인하여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좌천되었다. 곧 재등용되어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경술(經術)·문학에 힘쓰고, 서예(書藝)로도 이름이 높았다.
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다가 일찍 죽으니,
왕은 그의 죽음을 개탄하면서 유족에게 쌀 100섬을 하사하고 집을 마련해 주는 한편,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매옹한설 [ 梅翁閒說 ] ;

필사본. 1책.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정두경(鄭斗卿) ·이이(李珥) ·홍명하(洪命夏) ·권필(權嗔) ·홍우정(洪宇定) ·
김창문(金昌文) ·정언황(丁彦璜) ·심지원(沈之源) ·박신규(朴信圭) ·
정태화(鄭太和) ·윤지완(尹趾完) ·이수광(李專光) ·이항복(李恒福) ·
조석윤(趙錫胤) ·한흥일(韓興一) ·이태연(李泰淵) ·이언막(李彦莫) ·
윤안국(尹安國) ·박미선(朴토善) ·유혁연(柳赫然) ·이이택(李以澤) ·
강서(姜緖) 등의 일화가 실려 있다. 책 끝에 최석문(崔錫文) 등의 소(疏)가 수록되었다.

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노비 [ 光陽松川寺址悔隱長老碑 ] ;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회은장노의 선대는 남원에 거주하였고, 속성은 기씨이며 자는 응준,
호는 회은이라 하였다. 어려서 출가하여 옥지노사가
머리를 깎아주어 승려 생활을 시작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 전라순찰사 이시방이 관군을 동원하자
이에 호응하여 벽암대사 각성이 일으킨 승병에 참가하여 참모로 활약하였다.
그뒤 조정에서는 회은에게 절충과 양호도총섭을 제수하였고,
1647년에는 지렵지공으로 가선대부와 팔도도총섭을 받았다.
1660년(현종 1)에 자헌에 가자되고 승병대장이 되었으며,
1663년에 정헌으로 특별히 가자를 받아 군무에 재임하였다.
회은장노비는 음기에 의하여 순찰사 박신규와 당시 광양현감 안시익,
그리고 송천사가 함께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황명숭정병자후사십이년정사월일(皇明崇禎丙子後四十二年丁巳月日)’
에서 1677년(숙종 3)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음기는 비 건립에 참여한
순찰사와 광양현감 외에도 본사질·각수·도편수·연화질·도감·
삼강 등의 명록이 포함되어 있다.
전액은 회은장로비명, 비명은 ‘유명조선국전라도광양백운산송천사지
고정헌대부팔도도총섭겸승병대장회은장노비명
( 有明朝鮮國全羅道光陽白雲山松川寺址故正憲大夫
八道都摠攝兼僧兵大將悔隱長老碑銘)’이다.
비의 크기는 전체높이 292cm, 비신높이 185cm, 비폭 76.2cm이며,
이수·비신· 좌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수의 전면에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노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후면에도 용을 비롯하여 게·개구리·
자라 등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비문은 대체로 판독이 가능한 양질의 돌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비신 여러 곳에 탄환 자국이 있으며 비의 모서리는 농부들이 낫을 갈아 훼손되었다.
비명에 승려의 법명이 아닌 회은이란 호를 썼던 것은 회은이 승려로서보다는
승병대장으로 더 유명하였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비의 이수에 용을 비롯한
동물들이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승려를 낮게 평가하는 조선시대에
순찰사나 현감이 비의 건립에 앞장선 점도 특이하다.

박성석;
1650년(효종1)~1709년(숙종35),자는여정, 현감 동주의아들,
송시열의 문인, 1676년(숙종2) 무과에 급제하여, 1680년(숙종6년)비변사의
낭관에 보직되고,1682년에는 창성방어사, 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되었다,
1689년(숙종15)기사환국으로 한때벼슬을물러났다가 통진현감을거쳐
제주목사에 부임했다,
1691년 유배된 장휘제를 체포하러온 의금부관행의 비행을 벌하다가
오히려 무고를받아 파직되었으나 1703년 무죄가 인정되어 복직,
1709년 전라도 수군 절도사로 기용되었다,

박세증;
1653년(효종4)~1727년(영조3),자는 제경,호는 호계,
의금부도사 정린의아들 송시열과 친척간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11년(숙종37)순무사 이만성의 천거로 이듬해 현릉참봉이되고,
뒤에 장수도 찰방이되었으나,1721년(경종1)신임사화로 노론4대신이귀양가고
정국이 바귀자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같다,
1725년(영조1)아들필정이 시정의 공으로 오위장이되고,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박 권;
자 형성(衡聖). 호 귀암(歸菴). 1684년(숙종 10) 사마시에 급제하고
16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전적(典籍)을 지낼 때 윤의제(尹義濟) 등의
처벌이 가볍다고 논핵하다 도리어 이산(理山)에 유배되어 1692년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로 병조좌랑이 되었고 정언(正言) 등을 거쳐 동래부사를 지냈다.
1703년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1711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2년 한성부우윤으로 있을 때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의 접반사(接伴使)로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그 후 청나라 사신의 원접사(遠接使)를 거쳐
대사헌 등을 지내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백두산정계비 [ 白頭山定界碑 ] ;

정계비라고도 한다.
백두산이 청조(淸朝) 발상의 영산(靈山)이라 하여 그 귀속을 주장하던 청은,
1712년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내어 국경문제를 해결하자는
연락을 해왔다. 조선에서는 참판(參判) 권상유(權尙游)를 접반사(接伴使)로 보내었으나,
청의 사절이 함경도로 입국함에 따라 다시 참판 박권(朴權)을 접반사로
출영(出迎)하게 하였다. 이때 조선측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 자신이 조선측의 접반사 군관(軍官) 이의복(李義復),
감사군관(監司軍官) 조태상(趙台相), 통관(通官) 김응헌(金應縉) 등만을 거느리고
산정에 올라가 거의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그 지점은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km, 해발 2,200m 지점이었으며,
비면(碑面)에는 위에 대청(大淸)이라 횡서하고 그 밑에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 각서(刻書)하고 양쪽의 수행원 명단을 열기하였다.
그뒤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大砒 ) 을 보내어 간도 개척에 착수하자,1783년 조선측은 어윤중(魚允中)·
김우식(金禹軾)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그 뒤 9월에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 종사관 조창식(趙昌植)을 보내어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청은 토문(土門)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여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뒤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개축 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하여,
남만주에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지방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 비는 만주사변(滿洲事變) 때 일제가 철거하였다.

강화산성 [ 江華山城 ] ;

사적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1232년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착공하였는데,
공사가 완공되기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여 2년 후인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영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의 성은 내성(內城) ·중성 ·외성이 있었는데,
내성은 현재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3,874자(1,174m), 중성은 둘레가 5,381m로
1250년에 축성하였고, 외성은 1233년에 축조를 시작하였다. 이 성들은 모두 토성인데,
중성의 위치는 선원면(仙源面)의 토성터인 것으로 추정되고,
외성은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길이가 3만 7070자(1만 1232m)였다.
그러나 1270년 개경(開京)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조선 전기에 규모를 축소하여 다시 축성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고,
1677년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로 돌성[石城]을 쌓았다. 1709년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다시 개축하였고,
조선 후기에 보수가 계속되었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소가 있고, 암문(暗門)이 4개소, 수문(水門)이 2개소 있었다.
성문의 문루는 남쪽에 안파루(晏波樓), 서쪽에 첨화루(瞻華樓),
북쪽에 진송루(鎭松樓), 동쪽에 망한루(望漢樓)가 있었다.
첨화루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건립하였고,
안파루는 쓰러진 것을 1973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며,
진송루는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1783년 성을 개축할 때 건립하였다.
수문은 갑곶진(甲串鎭)으로 옮겨져 있으며,
동문쪽은 강화 시가지가 되어 성도 문루도 없어졌다.
인천공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다.

간도문제 [ 間島問題 ] ;

간도(젠다오)는 본래 여진족(女眞族)의 거주지였으며,
고구려 때에는 파루(把婁)의 땅으로 고구려에 속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발해가 5경(五京)을 두었을 때에는 동경(東京)의 용원부(龍原府)에
속하기도 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후 여진족이 살면서 이 땅을 자주 침범하므로
고려 시대에는 윤관(尹瓘), 조선시대에는 김종서(金宗瑞) 등이 정벌하였다.
세종은 이 지방에 6진(六鎭)을 두었고, 여진족은 번호(藩胡)라 칭하여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청나라 건국과 함께 여진족이 중국본토로 이주하자 청나라는 간도를
봉금지(封禁地)로 설정하여 주민의 이주를 금하였으나, 산둥[山東]지방 등의 유민과
조선 사람들이 많이 잠입하여 청국인과의 대립이 잦았다.
1710년(숙종 36) 조선인이 청국인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양국의
불분명한 땅을 조사시키기 위하여 오라총관(烏喇摠管:吉林) 목극등(穆克登)을
이 지방에 파견하고 국경실사(國境實査)를 명하였다. 목극등은 12년 조선의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회담하고, 압록 ·토문(土門:松花江의 지류) 두 강의
분수령인 백두산 산정 동남방 약 4km, 해발고도 2,200m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그 비문에 “서쪽으로는 압록, 동쪽으로는 토문이 있으니, 그 분수령 위에 돌을
세우고 기록한다…”라고 새겼다. 여기에 지칭한 토문강은 분명히 쑹화강의 지류로서,
두만강의 상류가 아님에도 후일 청나라는 이것이 두만강을 지칭한 것이라 하여
간도귀속을 둘러싼 양국의 분쟁의 씨가 되게 하였다. 그 후에도 조선인은 계속
봉금(封禁)을 무시하고 간도에 이주하여 개척하였으며, 한인(漢人)도 이 지방에 이주하여
서로 섞여 살게 되었다. 그러자 청국은 1882년(고종 19), 토문강 이북 ·
이서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청국인으로 간주하겠다고 통고하고, 그 이듬해 간도를
개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부분의 조선인을 철수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은 간도국경문제 해결을 청나라에 제의,
토문강 이남은 조선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청나라는 ‘토문강이 곧
도문강(圖們江:두만강)’이니 두만강 이북은 자국영토라 주장하여 3차에 걸친 회담이
모두 결렬되었다.
이와 같은 분쟁은 1894∼95년 청 ·일전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1900년(광무 4) 청나라의 약세를 틈타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하였다.
정부에서는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에 파견하여 주민을 위무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그를 북간도관리사로 임명하며 이를 주한청국공사에 통고하는 한편,
포병을 양성하고 조세를 올려받아 계속해서 간도영유권을 관철하여 나갔다.
그러나 일본이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에 따라 간도문제는
청 ·일 간의 현안문제로 넘어가고, 일본은 1907년(융희 1) 간도에 통감부(統監府)
출장소를 설치하여 군대 ·헌병 ·경찰관을 파견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으나 그 근본목적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떻든 일본은 처음에 ①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며,
② 한국인을 중국의 재판에 굴복시키지 말 것,
③ 중국관헌의 대(對)한국인 세금징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④ 중국관헌이 발하는 대(對)간도의 모든 법령은 통감부 파출소가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러 ·일전쟁 후 러시아에서 얻은 철도 ·탄광 등 만주에 있어서의
이권문제가 엇갈리게 되자 양국협상을 통하여 ‘청나라는 일본이 간도가 청국영토임을
인정하면 만주에 있는 일본의 이권에 대해 양보하겠다’는 확약을 받고,
1909년(융희 3) 9월 4일 한국영토인 간도를 마음대로 청나라에 넘겨 주는 ‘
간도에 관한 청 ·일협약(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에 따라 통감부
간도파출소는 폐쇄되었으나 일본총영사관으로 대체됨으로써,
간도에 있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을 억압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그대로
지속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집중화할 수 있는 효과까지 얻었다.
1909년 현재 간도지방 주민조사로 나타난 한국인은 8만 2,900여 명이고,
청국인은 2만 7,300여 명이었다.

박 선;
자 성재(聖在). 호 도와(陶窩). 1696년(숙종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현감(縣監) ·병조정랑(兵曹正郞)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경상도 인동(仁同)의 도완서원(陶浣書院)에 배향되었고,
《도와문집(陶窩文集)》을 남겼다.

박치화;
자 사이(士邇), 호 설계(雪溪)·읍건재(泣愆齋)·손재(巽齋), 초명 치원(致遠)이다.
1708년(숙종 3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典籍) 및 예조·
병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양성현감(陽城縣監)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장령(掌令)으로서, 연잉군(延燥君: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그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하다가, 소론(少論) 조태구(趙泰耉)·
최석항(崔錫恒) 등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신임사화로 노론(老論)이 실각하자,
이듬해 고성(固城)에 유배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종부시정(宗簿寺正)에 기용되고,
이어 시강원의 보덕(輔德)을 거쳐 사간(司諫)에 올랐다.
소론 일파를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다가 왕의 탕평책에 거슬려,
1728년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1754년 풀려나와 다시 조정에 들어가
돈령부동지사(同知事)를 거쳐, 1756년 중추부지사(知事)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집 《설계수록(雪溪隨錄)》이 있다.

설계수록(雪溪隨錄) ;

雪溪隨錄(奎12046), 朴致遠(朝鮮)著, 愼敦恒(朝鮮)編.
27卷 附錄 合11冊 筆寫本 31.5×20.5cm.

雪溪 朴致遠(1680∼1764)의 詩文集이다. 그의 姻親이자 門生인 愼敦恒이 부輯하여
成編하고 손자인 龍赫이 1804년(純祖 4)에 宋煥箕의 序文을 받아 ㅡ本을 繕寫하여 家
藏하였던 것을 5代 旁孫인 永壽 등이 1886년(高宗 23)에 刊印하였던 것인데 本集은 이
를 臺本으로 후에 필사한 것이다. 저자의 初名은 致遠이나 후에 改名하여 致和라 불렀
으며 字는 士邇요 號는 雪溪·泣愆齋·巽齋. 本貫은 密陽이다. 1708년(肅宗 34) 式年
文科에 丙科로 及第하여 掌令 등 淸要職을 지냈다. 1721년(景宗1)에 老論으로서 王世
弟(英祖)의 代理聽政을 주장하다가 少論의 반대로 실패하고 이듬해 固城에 유배되었다
. 1724년 英祖가 즉위하자 宗簿寺正에 起用되고 이어 輔德을 거쳐 司諫에 올라 少論一
派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甲山에 유배되었다. 1754년(英祖 30) 풀려나와 同知敦寧府事
에 보직되고, 1756년 知中樞府事에 이르러 耆老所에 들어갔다. 卷頭에는 1804년에 宋
煥箕가 쓴 序文과 無聲窩序가 실려있고, 이어서 大司諫 安榮이 지은 行狀, 右參贊安光
直의 識, 趙命夏의 跋文, 徐有英이 지은 後舒가 실려 있다. 卷{1}:周禮의 總論에 對한
解說. 卷{2}:周禮의 王官總論, 王制, 附皇王帝覇論, 所尙, 宮制, 天官, 師傅保, 三公
六卿統論, 三士府史胥徒, 六官分數, 天官屬官人數多少辨등 23편의 論辨. 卷{3}:周禮의
天官총宰第一에서 41節目(太宰, 小宰, 宰夫, 宮正, 宮伯, 膳夫, 포人, 甸師, 獸人, 醫
師, 鹽人, 司書, 追師, 夏采 등)에 對한 解說과 論辨. 卷{4}:周禮의 地官司徒第二의 5
0個節目(大司徒, 小司徒, 鄕師, 鄕 大夫, 州長, 黨正, 늠人, 稿人 등)에 對한 解說과
論辨. 卷{5}:周禮의 春官大宗伯第三에서 31個節目(大宗伯, 小宗伯, 肆師, 大祝, 司巫,
車僕 등)과 夏官司馬第四의 22個節目(大司馬, 司勳, 馬質, 校人, 趣馬등). 卷{6}:周禮
의 秋官司寇第五에 21個節目(大司寇, 士師, 朝士, 司儀 등)과 冬官考工記第六의 23個
節目(輪人, 輿人, 梓人, 匠人, 弓人 등)의 解說 및 論辨. 卷{7}:春秋의 總論. 卷{8}:
春秋의 5편(隱公, 桓公, 莊公, 閔公, 僖公)의 문제점의 해설, 論辨. 卷{9}:春秋의 7편
(文公, 宣公, 成公, 襄公, 昭公, 定公, 哀公)의 解說및 辨論. 卷{10}:儀禮 8편(士冠禮
, 冠義, 士昏禮, 士相見禮, 鄕飮酒禮, 鄕射禮, 燕禮, 大射儀)의 問題點을 論辨한 글.
卷{11}:儀禮 4편(聘禮, 公食大夫禮, 覲禮, 士喪禮)에 관한 글. 卷{12}:禮記6편(曲禮上
下, 檀弓上下, 王制, 月令)에 관한 論辨). 卷{13}:禮記의 13편(曾子問, 文王世子, 禮
運, 禮器, 郊特牲, 內則, 玉藻, 明堂位, 喪服小記, 大傳, 少儀, 學記, 樂記)에 관한
論辨. 卷{14}:周易繫辭上傳에 12章과 下傳에. 5章에 대한 解說, 論辨. 卷{15}:易學啓
蒙 4편(本圖書第一, 原卦畵第二, 門蓍策第三, 考變占第四)에 관한 解說, 論辨. 卷{16}
:家禮 7편(序, 通禮, 祠堂, 深衣制度, 寇禮, 婚禮, 喪禮), 綱目 15편(初命晋大夫, 三
家分晋氏, 司馬公論智伯, 胡氏論豫讓, 楚人殺吳起, 司馬公論孟嘗君, 魏염弑秦惠后, 殺
君, 王燭魯連, 司馬公論魏염, 난王後八秦紀, 司馬公論蒙恬, 韓上黨降趙, 楚人陳勝齊人
田??, 項籍矯殺宋義)의 解說, 論辨. 卷{17}:律呂新書一에 19편(律呂新書, 律呂本原,
黃鍾第一, 黃鍾之實第二, 黃鍾生十一律第三, 十二律之實第四, 變律第五, 附變六律元數
, 律生五聲圖第六, 變聲第七, 附五聲二變實數, 附二變元數, 八十四聲圖第八, 六十調圖
第九, 候氣第十, 審度第十一, 嘉量第十二, 謹權衡第十三, 十二律圖), 律呂新書二에 律
呂證辨 11편(造律第一, 律長短圍徑之數第二, 黃鍾之實第三, 三分損益上下相生第四, 和
聲第五, 五聲小大之次第六, 變宮變徵第七, 六十調第八, 候氣第九, 度量權衡第十, 附律
呂總論). 여기 律呂新書에 실린 글은 동양음악을 연구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卷{18}:皇極經世書와 洪範皇極內篇과 黃帝素問에 7편(五運六氣樞要圖, 六十年紀運圖,
十二起運圖, 十二支司天訣, 五行生死順逆圖, 論五行順逆第ㅡ, 論十干第二)과 八陣圖說
解. 卷{19}:詩 131首(春日獨坐, 自挽 등), 贊 16首(敬義贊, 屈三閭贊, 退溪先生贊, 栗
谷先生贊, 尤庵先生贊 등), 箴 2首(自警箴), 祝文 1首(新居開基祝文), 祭文 3편(祭朴
公相得文 등), 書 8편(答人書, 답愼子常書 등). 卷{20}雜識:理氣, 天地, 日月星辰, 曆
法, 渾天儀, 河圖 洛書, 象數, 算數, 江海, 鬼神魂魄, 葬理, 廟祀 등을 論辨. 卷{21}
雜識:性理學, 聖賢, 老佛, 仙道 및 中國 및 朝鮮의 人物 등을 論辨. 卷{22}雜識:人倫,
化生, 大學, 論語, 孟子, 中庸, 詩經, 書經, 禮記, 周易 등 諸經, 諸書에 對하여 論辨
. 卷{23}雜識:漢高祖, 漢文帝, 漢昭烈, 君道, 用人, 巡狩朝聘, 治道, 時弊, 心跡, 臣
道 등에 對한 論評. 卷{24}雜識:곤師之道, 守宰之道, 皇帝王覇, 經綸, 飮食, 堂屋, 字
音, 聲詩, 音樂 등에 관한 論辨. 卷{25}:雜識로 禮樂, 冠禮, 婚禮, 拜禮, 嬪御, 姬妾,
服制, 射, 田賦, 四民, 封建, 碑誌 등에 관한 論辨. 卷{26}雜識:敗穀, 驛郵, 學校, 官
制 등에 관한 論評. 卷{27}雜識:兵制, 城堡, 役法, 奴婢, 春秋 등에 관한 論辨. 附錄
으로 愼敦恒 등의 祭文 5편과 뇌辭 6편이 실려 있다. 卷尾에는 1886년에 5代旁孫 永壽
가 쓴 跋文이 실려 있다.

박성원;(性源)
1697년(숙종23)~1767년(영조43), 자는사준,호는포암,
진사로서 예학에 뛰어나고음운학에 밝았다,
저서에 《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
《화동협음통석(華東瀯音화通釋)》 《제례초(祭禮抄)》 등이 있다.

박성원;(聖源)
자 사수(士洙), 호 겸재(謙齋)·광암(廣巖), 시호 문헌(文憲),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21년(경종 1) 생원이 되고, 1728년(영조 4)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감찰(監察) 등을 지냈다. 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유배되고,
1746년 풀려났다.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世孫: 正祖)을 보도(輔導)하였으며,
그뒤 참판(參判)에 이르러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집 《겸재집》, 저서에 《돈령록(敦寧錄)》 《보민격언(保民格言)》
《돈효록(敦孝錄)》 등이 있다.

박 서;
자 성응(聖應). 호 주천(朱川). 1746년(영조 22) 참봉(參奉)에 임명되나,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경학 ·예학 ·선불(仙佛) ·
복서(卜筮) ·의약(醫藥) ·천문 ·지리 ·재정(財政) ·군사 등에 모두 통달하였다.
저서에 《대학구문통변(大學句問通辨)》 중용구문통변(中庸句問通辨)》
《태극도변의(太極圖辨疑)》 《동유예휘(東儒禮彙)》 《상례상변(喪禮常變)》
《홍범연의(洪範演義)》 《고금성현총록(古今聖賢摠錄)》 등이 있다.

박도상;
1728년(영조4)~?,자는 난사, 필선 윤동의 손자,징의 아들,
1750년(영조26)진사가되고, 177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을거쳐
승지에 이르렀다,변려문,제술에 능하여 영조가 문신들에게 시문을짓게할때
여러번 일등에 뽑혔다,

박제가;
자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 초정(楚亭)·정유·
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1776년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 2)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여
《북학의(北學議)》 〈내외편(內外篇)〉을 저술, 이듬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그뒤 진하사(進賀使)·
동지사(冬至使)를 수행,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4년 춘당대(春塘臺)
무과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1798년 《북학의》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하고, 1801년(순조 1) 사은사를 수행,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사돈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연좌로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저서에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 《유정집》이 있다.

북학 ( 北學 ) ;

북학을 하자는 주장은 북학론(北學論)이며,
북학을 하였던 학자들의 학문내용과 현실인식 지향성 등 사상전반을 종합적으로
지칭할 때는 북학사상(北學思想)이라고 한다. 원래 북학이란 《맹자(孟子)》
〈등문공장구(웽文公章句)〉에서 진량(陳良)과 같은 남만(南蠻)의 지식인이
"주공공니지도(周公孔尼之道)", 곧 유학(儒學)을 북쪽 중국에 가서 배운다고 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 1778년 박제가(朴齊家)가 이 부분을 인용하여 중국의
문물을 배울 것을 주장한 자신의 저서 제목을 《북학의(北學議)》라 이름한 이후,
북학은 청나라에 남아 있는 중화(中華)의 선진문물을 배운다는 의미로 널리 사용하게 된다.
인조대(仁祖代)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을 당한 이후 조선에서는 오랑캐 청에
대해 복수하고자 "북벌(北伐)"을 주장하고 북벌대의론(北伐大義論)을 내세워 청의
문물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영정조대 서울의 일부 학자들은 조선문화의
후진성을 자각하고, 오랑캐인 청나라의 문물이 바로 선진 중화(中華)문화임을
인정하여 그를 받아들이자는 "북학"의 주장을 폄으로써 커다란 사상적 전환을 모색하였다.
이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 이하 박제가·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서형수(徐瀅修)·서유구(徐有而) 등 서울의 경화사족(京華士族)
학자들이 국제질서와 조선구사회 내부의 변화에 부응하여 민생을 이롭게 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용적 학풍을 추구하였던 결과였다. 홍대용의
《의산문답(醫山問答)》과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그리고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구체화된 이들의 북학론은 처음에는 청의 문물 가운데 유용한 것을
받아들이자는 선택적인 문물 수용론이었다. 처음에는 이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차츰 북학은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서구 ·서유구 등은
이용후생을 중시하는 학풍을 유지 발전시키며 청조의 문학과 고증학도 수용하는
과도적인 면모를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순조대 이후로는 이를 토대로 정약용(丁若鏞)·신작(申綽)·성해응(成海應) 등
많은 학자들이 북학론의 개진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북학을 하고, 청의 문물 뿐 아니라
청의 학술인 고증학(考證學)과 예술까지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나타났다.
이는 청나라 학자들과의 직접적 교류 위에 김정희(金正喜)·권돈인(權敦仁)·
조인영(趙寅永) 등 정권을 담당하던 세도가들이 북학을 하면서 더욱 가속되었다.
이들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엄밀한 고증적 학문방법과 문화예술의 세련을 추구하여,
이용후생을 기치로 민생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던 앞 시기 북학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청조 고증학풍이 서울에 유행하고 추사(秋史) 김정희의 새로운 서화예술이 풍미하면서
조선의 학풍과 문화도 변화하고 전통주자학의 권위도 크게 약화되었다.
한(漢)나라 훈고학(訓뭍學) 전통의 계승을 표방하며 새로이 대두한
고증학(考證學:漢學)과 기존의 정통 성리학(性理學:宋學) 사이에 학문적
우위논쟁이 학계에서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 또한 청나라의 문물과 학술을 배우자는
북학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청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에 흥미를 느끼고
그 선진성을 인식하면서 서양과 직접 접촉하여 서양 문물을 수용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이는 박제가의 해외통상론을 발전시켜 이규경(李圭景)·최한기(崔漢綺) 등이
주장한 것으로 개국론, 개화론의 선구를 이루게 된다. 북학론과 북학은 조선사회의
변화와 조선사상계의 발전과정 위에서 이런 단계적 과정을 거쳐 근대적 사상으로 전환하였다.

한객건연집 ( 韓客巾衍集 ) ;

필사본. 4권 1책. 장서각도서.
유득공의 숙부인 금(琴)이 편집하여 1777년(정조 1) 간행하였다.
권1은 이덕무, 권2는 유득공, 권3은 박제가, 권4는 이서구의 찬(撰)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책머리에 중국인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廷筠)이 1777년에 쓴 서문이 있다.

박지원 [ 朴趾源 ] ;

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
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埋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사가시 [ 四家詩 ] ;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냉재(冷齋) 유득공(柳得恭)·
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형암(炯庵) 이덕무(李德懋)의 시를 유득공의 숙부
유탄소(柳彈素)가 엮어 《건연집(巾衍集)》이라는 표제로 청나라에 소개하였다.
이 네 사람은 모두 박지원(朴趾源)의 문하로서, 실학사대가(實學四大家)로도 일컬어졌는데,
당시 중국의 대학자인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으로부터
"사가(四家)"로 일컬어졌다.

청성잡기 [ 靑城雜記 ] ;

필사본. 1책. 성대중은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벼슬길에 순조롭게 오르지 못할 처지였으나 영조의 탕평책에 편승한 서얼통청운동으로
청직(淸職)에 임명되었으며, 박제가 ·박지원 ·유득공 등과 교유관계를 가졌다.
내용은 취언(帥言) ·질언(質言) ·성언(醒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취언이란 ‘헤아려 쓴 말’이라는 뜻으로 10편의 중국 고사를 쓴 뒤
‘청장평왈(靑莊評曰)’로 시작되는 평론이 붙어 있다. 질언이란 ‘딱 잘라 한 말’
이라는 뜻으로 댓구로 이루어진 120여 항의 격언을 모아놓은 것이다. 성언이란
‘깨우치는 말’이라는 뜻으로 100여 편의 국내 야담을 모아놓았다.
원본은 이병도(李丙燾)가 소장하였으며, 1964년 김화진(金和鎭)의 소개로 《도서》
제6호에 전문이 활자화되어 소개되었다.

이송 [ 李淞 ] ;

본관 전주(全州). 자 무백(茂伯)·고청(孤靑). 호 노초(老樵)·
서림(西林).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의 후손, 세자시강원보덕(輔德)
민곤(敏坤)의 아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아버지가 귀양가던 도중
금성역(金城驛)에서 불타죽는 참상을 보고 벼슬을 단념, 서산(西山)에 은거하며
실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실학자들인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하였고, 수차례 임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저서에 《노초집》이 있다.

전주사가시 [ 箋註四家詩 ] ;

활자본. 4권 1책. 유금(柳琴)이 이들 4가의 시 가운데서
초록한 것을 박제경(朴齊景)이 주를 달고 뒤에 백두용(白斗鏞)이 교정하여
1917년 간행하였다. 권1은 형암(炯菴) 이덕무의 각종 시 99편,
권2는 냉재(冷齋) 유득공의 시 100편, 권3은 초정(楚亭) 박제가의 시 100편,
권4는 소완정(素玩亭) 이서구의 시 100편이 수록되었다.
책머리에 1915년에 쓴 윤희구(尹喜求)의 서문과 1777년에 쓴 중국인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의 평이 있다.

성해응 [ 成海應 ] ;

본관 창녕(昌寧). 자 용여(龍汝). 호 연경재(硏經齋).
1783년(정조 7) 진사가 된 후, 1788년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었다.
벼슬은 부사(府使)에 그쳤으나 영조 ·
정조 시대의 대표적 실학자로서 경학(經學)에 정통했다.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과 친교를 맺었다.
저서에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 《주한잡사고(周漢雜事攷)》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가 있다. 본집 ·외집 ·별집으로 구성된
《연경재전집》을 남겼다.

이서구 ( 李書九 ) ;

본관 전주(全州). 자 낙서(洛瑞), 호 척재(三齋) ·강산(薑山).
177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 ·지평을 거쳐 승지 ·대사간 ·이조판서 ·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왕명으로 《장릉지(莊陵誌)》 《춘추(春秋)》
《정조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명문장가로서 특히 시명(詩名)이 높아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과 함께 한시(漢詩)의
4대가로 알려졌으며, 오언고시(五言古詩)에 능했다. 문집으로 《척재집》
《강산초집(薑山初集)》이 전한다.

김이안 ( 金履安 ) ;

본관 안동. 자 원례(元禮). 호 삼산재(三山齋). 시호 문헌(文獻).
학자 원행(元行)의 아들.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762년(영조 38)
학행으로 천거받아 경연관(經筵官)에 기용되고,
1781년(정조 5)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지냈다.
1784년 지평(持平) ·보덕(輔德) ·찬선(贊善) 등을 거쳐 1786년 좨주(祭酒)가 되었다.
당시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와 교유하며
실학(實學)에 관심을 보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예설(禮說)과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어 《의례경전기의(儀禮經傳記疑)》
등의 저술을 남겼다. 문집에 《삼산재집》이 있다.

박윤묵;
자 사집(士執), 호 존재(存齋), 정이조(丁彛祚)의 문인이다. 정조와 영의정
김조순(金祖淳)의 신임을 받았고,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1835년(헌종 1)
평신진 첨절제사(平薪鎭僉節制使)로서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시문(詩文)에도 뛰어났으며 서예는 왕희지(王羲之)·조맹부(趙孟홰)의 필법을 이어받았다.
문집 《존재집(存齋集)》이 있다.

왕태 [ 王太 ] ;

자 보수(步棨 ). 호 수리(數里). 일명 한상(漢相).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영조 ·정조 때 천수경(千壽慶)을
중심으로 장혼(張混) ·김낙서(金洛瑞) ·조수삼(趙秀三) ·박윤묵(朴允默) ·
차좌일(車佐一)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일원으로 시를 읊었고,
윤행임(尹行恁)의 천거로 어전에서 시를 지었다. 무과(武科)에 급제,
조령별장(鳥嶺別將)에 이르렀다.

송석원시사 ( 松石園詩社 ) ;

서인(庶人)·중인(中人) 출신의 위항인(委巷人)들이
모여 살던 서울 서촌(西村:지금의 인왕산 밑 옥인동 일대)의 소나무 숲 사이로 계류가
흐르는 곳에 천수경(千壽慶)이 정원(亭園)을 짓고 살면서 김정희(金正喜)가 쓴
송석원(松石園)이라는 편액(扁額)을 걸고 불우한 시인(詩人)들과 어울려 시와 술로
소요자적하였다. 당시 이곳에 출입하던 시인들을 송석원시사 시인이라 일컬었으며,
후일에 흥선대원군도 여기에 나와 큰 뜻을 길렀다 한다.
그 시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천수경·장혼(張混)·조수삼(趙秀三)·
차좌일(車佐一)·김낙서(金洛瑞)·왕태(王太)·박윤묵(朴允默)·최북(崔北)·
엄의길(嚴義吉)·엄한빈(嚴漢賓)·엄한명(嚴漢明)·엄계승(嚴啓昇)·
엄계흥(嚴啓興)·엄계응(嚴啓膺)·지도성(池道成)·지덕구(池德龜)·지한상(池翰祥)·
박영석(朴永錫)·서경창(徐慶昌)·임득명(林得明)·노윤적(盧允迪)·이경연(李景淵) 등이다.

박승휘;
자 광오(光五). 호 사고(社皐). 시호 문정(文貞).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1848년(헌종 14) 사성(司成)으로
교정낭청(校正郞廳)이 되어 《삼조보감(三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1855년(철종 6) 대사간, 1864년(고종 1)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문집 《사고집》이 있다.

삼조보감 [ 三朝寶鑑 ] ; 활자본. 4권 4책. 34×21.8 cm. 1848년(헌종 14) 간행. 조인영(趙寅永)
등이 편찬한 것으로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일부이다.

박문일;
자 대수(大殊). 호 징암(懲菴) ·운재(雲齋) ·운암(雲菴). 시호 문헌(文憲).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도사(都事) ·집의(執義) ·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평안도 태천(泰川)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평안도 일대, 특히 태천 ·정주(定州) 등지에 그의 제자들이
많이 있어서, 각 지방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자주 서울에 출입하였으나 권문(權門)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문집으로 《운암집(雲菴集)》이 있다.

운암집 [ 雲菴集 ] ;

고활자본(목활자). 12권 12책. 규장각도서.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서문과 발문이 없어 정확한 간년(刊年)은 미상이다. 박문일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말년에 잠시 사헌부 집의를 맡기도 하였다. 이 문집은 서북 인사들과
그곳에 연관되는 사실이 많이 기록되어 있고, 또 서북인사이면서 이항로 ·
김평묵(金平默) ·이중문(李仲文) ·유중교(柳重敎) ·최익현(崔益鉉) 등의 유명
인사들과의 편지 교류도 보이고 있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심설(心說)> 등
성리학에 대한 논설이 있는데, 대체로 이항로의 학설을 따르고 있다.
그는 <선고박도정행장(先考朴道精行狀)> <선비행장(先흼行狀)> 등 부모의 행장을
직접 지은 바 있는데, 여기에는 양반으로서 소작생활을 하여 50무의 밭을 마련하는
과정과 그것으로 가계를 이루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어 19세기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서북 출신 선비들의 문집이 희귀하다는
점에서도 이 문집의 가치가 돋보인다.

이항로 [ 李恒老 ] ;

자 이술(而述). 호 화서(華西). 초명 광로(光老). 시호 문경(文敬).
양근(楊根) 출생. 3세 때 《천자문(千字文)》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十八史略)》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부정(不正)이 있음을 알고 단념하였다.
1840년(헌종 6)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참봉(徽慶園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獄死) 때 체포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석방되고,
1864년(고종 1)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다.
그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거쳐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승진,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경복궁(景福宮) 중건의
중지와 취렴(聚斂)의 시정을 촉구하는 등 최초로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하여 배척을 받았다.
조선 후기의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로 학설은 주리론(主理論)으로 우주론(宇宙論)에서는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였다.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화서문집(華西文集)》이 있고, 편저에 《화동합편강목(華東合編綱目)》
《벽계아언(蘗溪雅言)》 《문인어록(門人語錄)》 《주역석의(周易釋義)》
《주자대전집차의집보(朱子大全集箚疑輯補)》 등이 있다.

박세화;
자 연길(年吉), 호 의당(毅堂), 함경남도 고원(高原) 출생이다. 어릴 때
유학(儒學)을 배웠으며, 문명(文名)과 효도로 유명하였다.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내다가 사퇴하고 태백산에 들어가 수도(修道)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시해사건으로 분기하여 도사(都事) 윤응선(尹膺善)과 함께
경상북도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하다 체포되었으며,
그 후 석방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자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을미의병 [ 乙未義兵 ] ;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분함을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한술 더 떠 친일내각이 황후폐위조치를 내리자 유생들은 토역소(討逆疏)를
냄은 물론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였다. 11월에는
충청도의 제천과 유성에서는 유인석(柳麟錫)·문석봉(文錫鳳) 등이 중심이 되어
거의토적(擧義討賊)의 기치를 들었다. 그 위에 친일내각이 전국에 내린 단발령은
전국적으로 반일감정을 확산시키는 한몫을 하였다.
1896년 1월 경기 지역에서는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하여 일어났으며,
충청 지역에서는 홍주의 김복한(金福漢)·이설(李乾) 등과 제천의 유인석과
그의 문인 서상렬(徐相烈) 등이, 강원 지역에서는 춘천의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이소응(李昭應)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 뒤 이들은 합류하여
단양군수와 청풍군수를 처치하고 충주부를 점거하여 관찰사 김규식(金奎軾)도
처단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산청에서 곽종석(郭鍾錫)이,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許蔿) 등이 기병하였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전라도 지역에서도 기우만(奇宇萬) 등이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고
곧 흩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전국적인 의병의 봉기에 놀란 조정은 선무사를 파견하는 한편 주력부대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혼란의 틈을 근왕세력인
이범진(李範晋) 등의 정동파(貞洞派)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함으로써
친로내각(親露內閣)이 등장하였다. 새 내각은 단발령의 철폐와 의병의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냈으며, 이와 함께 각종 공세를 탕감하는 조치도를 취함으로써
의병봉기의 명분을 없애기에 노력하였다. 이후부터 의병활동은 사그러들었다.

박문오;
자 대화(大化). 호 성암(誠菴).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서 경학(經學) 연구에
전념하는 한편, 서당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고종 때 관찰사 남정철(南廷哲)이
기자묘수호소(箕子墓守護所)를 설치하고, 도내에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인사를
뽑는 자리에서 입직수호생(入直守護生)과 주학교수(州學敎授)로 임명되자
사퇴하였다가 마지못해 보름 동안 일하였다. 당시 관서(關西) 제일의 학자로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문하에서 박은식(朴殷植)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문집 《성암문집(誠菴文集)》이 있다.

박은식 [ 朴殷植 ] ;

본관 밀양. 자 성칠(聖七). 호 겸곡(謙谷)·백암(白巖)·
태백광노(太白狂奴). 10세 이후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고,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주자학
연마에 심혈을 기울여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날렸다. 학문적 계보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찍부터 신기영(申耆永)·정관섭(丁觀燮) 같은 정약용(丁若鏞)의 문인들과도 접촉하면서
그의 실학사상을 체득하였다. 26세를 전후하여서는 박문일(朴文一)·박문오(朴文五)
형제에게서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사사하였다.
1885년 향시에 합격, 1888∼1894년까지 숭인전참봉·동명왕릉참봉의 벼슬을 지냈다.
1890년대 서울에 거주하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사상도 종래의
정주학(程朱學) 중심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바탕으로 교육·언론가 또는 민족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하여,
1904년 《학규신론(學規新論)》을 간행하는 한편, 서우학회(西友學會)를 발기하고
1908년 그 후신인 서북학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기관지 《서우》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교육·학회 활동뿐만 아니라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자리를 옮겨 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언론활동을 계속했다.
이 밖에도 그는 1909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하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여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유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의 공작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민중계몽 ·교육 ·언론 활동도 1910년 국권피탈과
더불어 일단 막을 내리고, 1911년 가을 만주 위안런현[桓仁縣]으로 망명하면서
나라 밖에서 구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나라 잃은 슬픔을 국사연구를 통하여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등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1912년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고, 상하이에 박달(博達)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했다.
1914년 잠시 홍콩에 머물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는데, 이때 《안중근전》과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지었다.
1915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당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또한 신규식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8년에는 러시아에서 한인교포 잡지 《한족공보(韓族公報)》
발행에 관여하던 중 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이하였다. 이에 그는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기 시작,
이듬해 이를 간행하였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임정은 독립운동의 이념·방법·지연·인맥 등의
파벌 암투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임정의 헌법을 개정,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그 해 8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무위원을 선임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 해 11월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 통일’을 당부하는 유촉(遺囑)을 남기고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정의 국장으로 상하이 정안길로(靜安吉路)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정부에 의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는 그의 독립활동과 많은 저술들을 통해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역사서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정신주의적·관념적 역사관에
머물긴 했지만 역사 연구와 서술을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항로 [ 李恒老 ] ;

자 이술(而述). 호 화서(華西). 초명 광로(光老). 시호 문경(文敬).
양근(楊根) 출생. 3세 때 《천자문(千字文)》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十八史略)》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부정(不正)이 있음을 알고 단념하였다.
1840년(헌종 6)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참봉(徽慶園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獄死) 때 체포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석방되고,
1864년(고종 1)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다.
그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거쳐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승진,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경복궁(景福宮) 중건의
중지와 취렴(聚斂)의 시정을 촉구하는 등 최초로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하여 배척을 받았다.
조선 후기의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로 학설은 주리론(主理論)으로 우주론(宇宙論)에서는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였다.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화서문집(華西文集)》이 있고, 편저에 《화동합편강목(華東合編綱目)》
《벽계아언(蘗溪雅言)》 《문인어록(門人語錄)》 《주역석의(周易釋義)》
《주자대전집차의집보(朱子大全集箚疑輯補)》 등이 있다.

박병하;
자 문혁(文赫). 전북 고창(高敞) 출생. 1910년(융희 4)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자 외국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하여
자결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박용대;
자 성기(聖器), 서울 출생이다. 1865년(고종 2) 진사에 오르고 3년 뒤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1871년 홍무관부수찬에 이어, 평북감시(平北監試)·경시관(京試官)·
충청우도암행어사·응교를 거쳐 1875년 호조참의를 지냈다. 1886년 이조참판,
1888년 별시초시시관(別試初試試官)·한성좌윤, 이듬해 승정원일기청당상과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91년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에 참여, 의정부교정당상(議政府校正堂上)에 중용되어
제도개혁에 힘썼으며 의정부도헌(都憲)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중추원의관칙임 4등이 되고, 1897년 중추원의관칙임 3등,
이듬해 봉상시제조가 되었다. 1899년 정2품 비서원경에 임명,
법규교정소의정관을 겸임하였다. 1900년(광무 4) 충청도관찰사,
1903년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1905년 법부대신(法部大臣),
1906년 홍문관 학사, 규장각 제학이 되어 《문헌비고》를 편찬하였다.
국권피탈 후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 朝鮮-藝術家同盟 ] ;
에스페란토식 표기의 머리글자를 따서 "카프(KAPF)"로 약칭한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지정책이 문화정치로 전환하고,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단체이자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문학예술가 조직이다.
1922년 9월 이호(李浩), 이적효(李赤曉), 김두수(金斗洙), 최승일(崔承一), 박용대,
김영팔(金永八), 심대섭(沈大燮), 송영(宋影), 김홍파(金紅波) 등이 조직한 염군사(焰群社)와 1923년 박영희(朴英熙), 안석영(安夕影), 김형원(金炯元), 이익상(李益相), 김기진(金基鎭),
김복진(金復鎭), 연학년 등이 조직한 파스큘라(PASKYULA)가 결합하여 1925년 8월 결성되었다.
창립 당시 구성원은 박영희, 김기진, 이호, 김영팔, 이익상, 박용대, 이적효, 이상화(李相和),
김은, 김복진, 안석영, 송영, 최승일, 심대섭, 조명희(趙明熙), 이기영(李箕永),
박팔양(朴八陽), 김양 등이다.
이들의 초기활동을 흔히 신경향파 문학 혹은 자연발생적 프로문학으로 부른다.
이 시기의 주요 논객으로는 김기진과 박영희를 들 수 있고, 주요 작가로는 최서해(崔曙海),
이기영, 이익상, 주요섭(朱耀燮), 이상화 등을 들 수 있다.
본격적인 활동은 1926년 준기관지 성격의 《문예운동》을 발간하고 다음해 9월 조직
개편과 함께 본격적으로 체제를 정비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계급성을 강조하는 박영희와
형식을 중요시하는 김기진 사이에서 논쟁이 전개되어 이를 계기로 제1차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신간회(新幹會) 결성과 일본 나프(NAPF)의 변화,
특히 후쿠모토주의[福本主義]의 영향 때문이었다.
자연발생적 단계에서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활동하며 작품활동뿐만 아니라 정치투쟁을
위한 투쟁예술의 방법으로 조직의 임무를 강조하여 더욱 정치적인 성향이 강해졌다.
도쿄에서 활동하던 조중곤, 이북만, 홍효민(洪曉民), 한식 등(제3전선파)이 제1차 방향
전환을 주도하였고, 1930년대에 도쿄에서 활약하던 안막(安漠), 김남천(金南天), 임화(林和), 권환 등(무산자파)이 볼셰비키를 제창하며 제2차 방향 전환을 주도하였다.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주장하며 예술운동 전 부문에 걸쳐 확대하여 전문적·기술적
전국동맹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재조직 중지, 검거사건, 역량부족 등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1927년에 발간한 기관지 《예술운동》도 폐간되었고, 《전선》 《집단》 등을 발간하려 했으나 원고 압수, 검열 등으로 발행하지 못하였다.
1931년 8~10월에는 조선공산당협의회사건과 연루된 세칭 "카프 1차사건"을 겪었다. 도쿄에서
발행된 《무산자》의 국내 배포와 영화 《지하촌(地下村)》 사건으로 김남천 등 11명의
동맹원이 체포되어 카프의 조직활동이 크게 위축된 것이다. 이런 중에 예술대중화나
농민문학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과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론이
제기되었다. 송영, 이기영, 한설야(韓雪野), 김남천, 이북명, 임화, 권환 등이 정치적 색채가
강한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카프 1차사건을 계기로 조직활동이 정체되었다가 1933년부터 "신건설사 사건"으로 이기영,
한설야, 윤기정(尹基鼎), 송영 등 23명이 체포되는 2차 검거사건을 겪으면서 급속도로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병참기지화 및 황국신민화정책을 본격화하면서
모든 합법운동을 금지시킴에 따라 사실상 개인적인 창작활동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상태였다.
결국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는 유명한 전향문을 쓴
박영희와 백철(白鐵) 등이 조직에서 이탈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직접적으로 해산 압력까지 받은 지도부는 1935년 5월 카프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해체하였다.
이 무렵 소련의 라프(RAPP)와 일본의 나프에 영향을 받아 임화, 안함광(安含光) 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의를 벌였고, 이기영의 《고향》, 강경애(姜敬愛)의
《인간문제》 등이 이때의 대표작이다. 이후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문학
진영은 전체적으로 침체기에 빠졌다가 8·15광복 후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조선문학가동맹으로 재건하였다.

증보문헌비고 ( 增補文獻備考 ) ;
활자본. 250권 50책. 《문헌비고(文獻備考)》라고도 한다. 최초의 편찬은
1770년(영조 46)에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을 받아 상위(象緯)·여지(輿地)·
예(禮)·악(樂)·병(兵)·형(刑)·전부(田賦)·재용(財用)·호구(戶口)·시적(市母)·
선거(選擧)·학교(學校)·직관(職官)의 13고(考)로 분류하여 100권으로 만들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라 하였다. 그러나 사실(史實)에 어긋난 점과
누락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법령(法令)과 제도가 많이
변경되었으므로 1782년(정조 6) 왕명으로 이만운(李萬運) 등에게 이를 바로잡아
보편(補編)토록 하였다.
이것이 제2차의 편찬이며, 9년 여에 걸쳐 《동국문헌비고》의 13고(考)에 대해
오류를 바로잡고 누락된 것을 채우는 한편 , 새로이 물이(物異)·궁실(宮室)·
왕계(王系)·씨족(氏族)·조빙(朝聘)·시호(諡號)·예문(藝文)의 7고(考)를 증보하여
146권을 편성하고 이를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라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간행되지 못하고 100여 년 뒤인 고종 광무 연간에 이르러
제3차 보편을 하였다. 즉, 1903년(광무 7)에 특별히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고
박용대(朴容大) 등 30여 명의 문사들에게 명하여 이를 보수하게 한 것이다.
박용대 등은 5년 여에 걸쳐 《증보동국문헌비고》에 수록된 20고 중에서 물이는 상위에,
궁실은 여지(輿地)에, 시호는 직관에 포함시키고 왕계는 제계(帝系)로 고쳐서
씨족(氏族)에 포함시켰다. 또 조빙을 교빙(交聘)으로 고쳐 상위·여지·제계·
예·악·병·형·전부·재용·호구·시적·교빙·선거·학교·직관·예문의
16고 250권으로 편성하고 이를 《증보문헌비고》라 이름붙여 1908년(융희 2)에 간행하였다.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백과사전으로서 제도·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승정원일기 ( 承政院日記 ) ;
1999년 4월 9일 국보 303호로 지정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승정원에서 편찬한 일기로 필사본이며, 3,243책이다. 이 일기의 작성은 승정원의
주서(注書)와 가주서(假注書)의 소임으로, 한 달에 한 권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건이 많을 경우에는 2권 이상으로도 작성하였으며, 반드시 그 다음달 안으로
완성하여 보존하였다.
원래 조선 개국 초부터 일기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1623년(인조 1)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270여 년간의 일기만이 현존한다. 또, 1744년(영조 20)의 승정원
화재로 인하여 《승정원일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46년(영조 22)에
일기청(日記廳)을 설치하고 홍계희(洪啓禧)·임정(任珽)·이철보(李喆輔) 등 45명에게
개수(改修)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사료(史料)는 거의 소실되었으므로, 1623년부터 1721년(경종 1)까지의 일기만 개수하기로 결정하여 1747년(영조 23)에 548책의 개수를 완료하였다. 이 책의 개수시에는 기사마다 그 출처를 명시하고,
책 끝에 서역낭청(書役郞廳)과 교정낭청(校正郞廳)의 성명을 기입하여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한 것이 하나의 특색이 되었다.
1888년(고종 25)에 또다시 승정원에 화재가 발생하여 1851년(철종 2)부터 1888년까지의
일기 361책이 소실되었으므로, 1889년에 박용대(朴容大)·김종한(金宗漢)·김병수(金炳洙)·
민영달(閔泳達) 등 15명에게 재차 개수토록 하여 1890년에 이를 완료하였다. 이
《승정원일기》는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관제(官制)의 변경에 따라
《승선원일기(承宣院日記)》 《궁내부일기(宮內部日記)》 《비서감일기(秘書監日記)》
《비서원일기(秘書院日記)》 《규장각일기(奎章閣日記)》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국권침탈 때까지 계속 작성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최고 기밀기록이며,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등과 더불어 국사연구에 귀중한 사료이다. 1961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원본의
초서(草書)를 해서(楷書)로 고치고 구두점을 달아 축쇄(縮刷)한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2001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박중빈;
자 처화(處化). 호 소태산(少太山).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白岫面)에서 출생하였다.
한학을 수학하던 9세에 우주의 자연현상에 깊은 의심을 품고 수도에 들어가 20여 년 간
구도 끝에, 1916년 4월 28일 대각(大覺)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뒤에 이 날을 원불교의
개교일(開敎日)로 정하였다.
1924년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를 조직, 일원(一圓)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하고 이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대체(大諦)를 밝혔다.
이것이 원불교의 시작이었다. 1943년 대법문(大法門)을 강설하고 입적하였다.
저서에 《원불교교전(敎典)》 《불조요경(佛祖要經)》 등이 있다.

원불교중앙총부 ( 圓佛敎中央總部 ) ;
1924년 9월에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이 교법을 완성한 후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옛 교명)
창립을 준비하면서 교화 기지로 건립하였다. 서중안(徐中安)이 희사한 3,945평의 대지와
각처에서 모인 건축 희사금으로 9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목조 초가 2동 17간을
완공하였다. 지금은 10만 평 대지에 박중빈 생존시에 건립한 구역과 개교(開敎) 반백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확장한 구역에 25동의 건물이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중앙총부 건설 당시 최초로 세운 본원실(本源室)과 세탁원을 비롯하여
대각전, 조실(금강원), 종법실(구조실), 공회당(양잠실), 송대 및 사가(私家)로 쓰인
청하원, 정신원(淨信院), 구정원 등과 영모전, 소태산 대종사 기념관, 반백년 기념관,
교정원 구관, 법은관, 원로원, 수도원, 상주선원 , 원광대학교의 원불교학과,
예비교역자들의 기숙사인 학림사와 정화원,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원불교 문화회관 등이 있다.
이밖에 대종사 성탑과 성비, 정산종사 성탑, 종각(원음각), 정문 등이 있다.
본원실은 불법연구회의 첫 사무소로서 도치원이라고도 한다. 불법연구회 간판을
처음 걸었으며 박중빈의 거처이기도 했다. 1932년 함석 지붕을 얹고 유리창을 달았다가
1985년 원형대로 보수하였다. 세탁원은 본원실과 함께 건립한 건물로 엿집 또는
꼭두마리집이라고도 한다. 식당과 사무실, 여자 숙소 등으로 쓰다가 지금은 세탁
업무을 담당하고 있다. 1985년 도로 확장 공사로 일부가 헐렸다가 본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대각전은 1935년 4월에 준공하여 최초로 법신불 일원상을 봉안한 건물이다. 현재
중앙총부의 정기 법회 및 각종 행사와 수양의 도량으로 쓰인다. 조실(금강원)은
1929년에 건립하여 박중빈이 말년에 머무르면서 설법이나 집회를 가졌다. 종법실은
1928년 5월에 지었다. 처음에는 사무실, 숙소 및 대중 집회 장소로 사용하다가
이후 박중빈과 후계 종법사인 정산종사가 머물렀다. 지금은 박중빈과 정산종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송대는 중앙총부 북쪽 소나무 숲에 지은 건물로 교단 기관지인 《원광(圓光)》이
창간된 곳이다. 옆에는 대종사 성탑과 성비가 있다. 영모전은 박중빈 이하 역대 선영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개교 반백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71년에 건립하였다.
매년 6월과 12월 두 차례 향례를 가진다. 영모전 옆에 정산종사 성탑이 세워져 있다.
소태산 대종사 기념관은 박중빈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1991년에 건립한 건물로
그의 유품과 초기 교단의 사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반백년 기념관은 1971년에
개교 반백년 기념사업으로 건립하여 강당과 사무실 및 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한다.
교정원 구관은 반백년 기념사업 때 지어 교정원 각부가 사용하고 있다. 법은관은
박중빈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때 건립하여 종합회관으로 쓰고 있다.
상주선원은 1929년에 건립한 교단 초기의 교역자 양성소이며,
유일학림(唯一學林:원광대학교의 전신)이 개원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교리 훈련을 맡는 상주선원의 사무실과 강의실 및 남자 선원객의 숙소로 쓴다.

송추 ( 宋樞 ) ;

본관 야로(冶城). 호 정산(鼎山). 일명 규(奎).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생.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영광(靈光)에서 원불교 창시자인 박중빈(朴重彬)의
영향으로 원불교에 귀의, 19세 때 수위포(首位圃) 중앙이 된 후 5년간 교전(敎典) 편찬에
참여했으며, 6년간 영산 지부에 성지를 건설하는 일에 전념했다.
1943년 박중빈이 죽자 종법사의 대통을 이어받고 1946년 교명(敎名)을 원불교로 선포했다.
한편 인재양성을 위하여 유일학림(唯一學林)을 설립하였는데,
후에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로 승격되었다. 또 동산선원(東山禪院)·중앙선원(中央禪院)·
원광여자중고교를 설립하는 등 후생양성에 힘썼다.
저서에 《금강경논평(金剛經論評)》 《예전(禮典)》 《세전(世典)》 《악전(樂典)》
《법전(法典)》 등이 있다.

김기천 ( 金幾天 ) ;

본명 성구(聖久). 법호 삼산(三山). 전남 영광 출생.
일찍부터 한학(漢學) 공부를 하고 16세에 서당 훈장을 하다가 1916년 원불교에 귀의,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교조(敎祖) 박중빈(朴重彬)의 9인 직제자 중 한 사람으로 원불교
초기에 저축조합·방언공사(防堰工事) ·혈인기도(血印祈禱) 등을 주관하였다.
이어 영광 지부장과 총부(總部)의 서무부장 ·교무부장 등을 역임하여 교단 형성과정에서
공헌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성리학(性理學)에도 조예가 깊어
교조로부터 최초로 견성인가(見性認可)를 받았다. 저서 《철자집(綴字集)》은 초기
원불교의 교리서에 나오는 한자를 모아 엮은 것으로, 초신자들에게 좋은 교리
안내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종사위(宗師位) 존호로 불린다.

구수산 ( 九岫山 ) ;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이 태어나 득도한 영산성지
북서쪽에 자리한 산이다. 주능선 삼발재 아래에 있는 마당바위와 기도실은 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반드시 거쳐가게 되는 곳인데 소태산이 산신을 만나 삶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11세 때부터 5년간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바다와 인접한 산인 만큼 정상이나 주능선에서 휘둘러 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북쪽으로는 계마리 금정산(264m)의 왼쪽, 서해바다에 떠 있는 위도가 가물거린다.
금정산 오른쪽 아래로는 옛날 우리나라로 불교가 처음 들어왔다는 법성포가 뚜렷하게 보인다.
산자락 끄트머리에는 원불교의 상징인 동그란 원이 산꼭대기 바위벽에 그려져 있는
옥녀봉(152m)이 솟아 있다. 옥녀봉 아래 노송 군락지에는 소태산이 태어난 생가와
아홉 제자들이 최초로 세운 교당이 있었다는 구간도실터가 있다.

원불교교전 ( 圓佛敎敎典 ) ;

《교전》이라고도 한다. 원불교 교리의 강령을 밝힌
《정전(正典)》과 교조의 언행을 수록한 《대종경(大宗經)》을 합하여 1962년에 간행되었다.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朴重彬)이 교단을 세우고 교화를 시작하면서 1927년
《수양연구요론》을 쓰고 1932년에는 《육대요령(六大要領)》을 써서 교서로 삼았다.
그뒤 《육대요령》에 불교의 경(經)과 논(論)을 추가하여 1943년 《불교정전》을
간행하고 기본 경전으로 사용하다가 여기에서 경과 논은 분리하고 대신 교조의
언행록을 보충하여 발행하였다. 《정전》은 총서, 교의, 수행의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서편에는 개교의 동기와 교법의 총설이 있고 교의편에는 일원상(一圓相),
사은사요(四恩四要), 삼학팔조(三學八條), 사대강령 등 근본 교리를 밝혀놓았으며
수행편에는 훈련과 수행에 관련된 법문이 실려 있다. 《대종경》은 15품 54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자들이 수집한 교조의 언행과 법문 중에서 가려 뽑은 내용으로
기본 교리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부안 실상사지 ( 扶安實相寺址 ) ;

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었다.
실상사는 내변산의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689년(신문왕 9)에 초의선사
(草衣禪師)가 창건하였고, 조선시대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최근에 와서는 원불교 교조 박중빈(朴重彬)이 이 절에서 수련하여 도통하였다고 전해진다.
변산에는 실상, 내소, 선계, 청림 등 4대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고려시대에 만든 불상과 대장경 등 중요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1950년 6·25전쟁 때
사찰과 함께 전부 소실되었다. 또 이곳에는 《효령대군원문(孝寧大君願文)》
《고사경(古寫經)》 《고인경(古印經)》 등 수백권의 책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와편 등이 출토되었고, 3기의 석조부도가 있다.
그 중 2기는 종형부도(鐘形浮屠)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6·25전쟁 전에는 대웅전,
나한전(羅漢殿), 산신각(山神閣),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특히 대웅전 안에는
《화엄경소》 등 경판이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불교교리도 ( 圓佛敎敎理圖 ) ;

교조 박중빈(朴重彬)이 1943년 1월 열반하던 해에 제정,
발표하였다. 대체로 3단계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으며 첫번째 교리도는 1932년판
《육대요령(六大要領)》에, 두번째 교리도는 1943년판 《불교정전》에, 세번째 교리도는
1962년판 《원불교교전》에 있다. 현재 널리 쓰이는 것은 세번째 교리도로 게송(偈頌)을
넣어 일원종지(一圓宗旨)의 성격을 밝힌 것이 특징이다.
교리도는 크게 나누어 일원종지, 신앙문, 수행문, 사대강령으로 요약된다.
맨 위에 일원상(一圓相)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그 밑에 일원상의 진리와 게송을 배치하였다.
네 모서리에는 사대강령인 지은보은(知恩報恩), 정각정행(正覺正行), 무아봉공(無我奉公),
불교보급(佛敎普及)을 각각 배치하였다. 일원상의 진리 왼쪽에는 사은사요(四恩四要)의
신앙문을 배치하고 오른쪽에는 삼학팔조(三學八條)의 수행문을 배치하였다.
교리도는 전체적으로 거북모양을 이루며 일원상은 신앙의 대상인 동시에 수행의
표본으로서 신앙과 수행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일원상 ( 一圓相 ) ;

우주 만유의 본원 또는 막힘이 없는 법을 상징한다.
선종에서는 1천 7백 화두 중 하나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일원(一圓)의 근본을 추구하는
화두로 통한다. 선방(禪房)에서는 흔히 벽에 이 상을 그려놓고 참선을 하는데,
이는 언어가 끊어진 선정에 들기 위해서이다. 휴정이 지은 《선가귀감(線家龜鑑)》
에는 혜능(慧能)이 제자들에게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난 것도 아니고 죽음도 없었다. 이름지을 길이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이 한 물건이 무엇인고?’라고 묻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하택 신회는 ‘모든 부처의
근본이요, 신회의 성품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한 물건이 바로 일원상이다.
한편 《신심명》에서는 ‘허공같이 뚜렷하여 모자랄 것도 없고, 남을 것도 없다고 한 말이 있다. 마음이라고 하거나 도라고 하거나 역시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 어떤 이름을 붙여도 맞지 않고 무슨 방법으로도 그 참 모양을 바로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원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자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다. 교조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은 20여 년 간 수행한 뒤 깨달았을 때의 심경을 언어나 문자를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원으로 표시하고, 일원은 곧 우주 만물의 본원이며 모든 부처와 성인의 심인(心印)이고 중생의 본성 자리라고 하였다. 또 생겨남도 사라짐도 없는 도와 인과응보의 이치가 서로 융합되어 기틀[相]을 세운다고 하였다.
원불교에서 일원상은 인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4은(四恩), 즉 천지·부모·동포·
법률에 보답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천지는 유일무이한 것이고, 부모는 원만평등하며,
동포는 순환하여 궁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법률은 그 자체에 진리성이 드러나는 것을 뜻한다.

대한민국의 신흥종교 ;

천도교는 철종 때에 일어난 동학(東學)을 계승하고 1906년(광무 10)에 천도교라 개칭한 한국의 독특한 종교이다. 그 교리에는 유(儒)·불(佛)·선(仙) 3교는 물론,
그리스도교와 토속신앙인 한울님사상, 주술(呪術) 등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1861년(철종 12)경 교리를 완성하고 포교를 시작,
4년 뒤 붙잡혀 처형될 때까지 경상도 일대에서 교단을 형성하였다. 2대 경전인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에 의하면 의지(意志)의 신인 한울님의
가르침을 성(誠)·경(敬)·신(信)으로 실천하고, 그것을 위해 수심정기(守心正氣)하여
시천주(侍天主)할 것을 강조한다.
수도의 격식으로는 주문을 외고 영부(靈符)를 지니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긴다.
원불교(圓佛敎)는 교조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 1916년 26세 때 홀연히
깨달은 바 있었는데, 그때의 심경을 “만유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生滅) 없는 도(道)와 인과응보(因果應報)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하고, 다음해부터 간척사업과 저축운동
등 사회개척사업을 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4년 불법연구회라 칭하였다가
2대 종법사 송규(宋奎) 때 8·15광복을 맞아 원불교라 개칭하였다.
교리는 1943년에 지은 《정전(正典)》에 전하는데, 그 교리를 보면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중심으로 신앙문(信仰門)과 수행문(修行門)을 내세우고 있는데,
신앙문은 마음을 닦고 천지은(天地恩)·부모은(父母恩)·동포은(同胞恩)·
법률은(法律恩)의 4은에 보답하는 것을 밝힌 것이며, 수행문은 사람이 정신을 수양하고
사리를 연구하여 본래의 맑은 마음을 드러내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1951년에는 원광대학교를 세움으로써 원불교 사상을 정착시키는 발판을 만들었다.
그밖에 대종교(大倧敎)는 단군신앙을 고취하는 민족신앙적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경향을 가진 것에 한얼교가 있다. 국제도덕협회(國際道德協會)는 불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밖에도 증산교(甑山敎)의 유파 등 민간신앙에 바탕을 둔
신흥종교와 외래(外來)의 바하이·이슬람·천리교(天理敎) 등이 그 기반을 굳혀가고 있다.

신종교 ( new religion , 新宗敎 ) ;

이때 ‘새롭다’라는 의미는 기성종교와의 관련하에서만
쓰일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흔히 신흥종교라고도 일컬어져 왔으나 이 용어는 신종교가 교리 ·의례 ·조직의 측면에서 기성종교에 비해 정교화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결핍된
종교라는 부정적인 함축을 띠고 있기 때문에 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용어로 신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종교의 발생 원인은 아노미(anomie), 상대적 박탈감, 전통적 가치관 또는 기성 제도종교의
설득력 상실, 문화접변에 따른 충격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위기’마다 신종교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신종교가 사회적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므로
각각의 구체적 사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신종교는 교리혼합주의(syncretism),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 현실주의적 구원관, 임박한 종말론의 강조, 선민사상, 신자 집단
내의 강력한 연대감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신종교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개항기, 일제강점기와 1960∼1970년대 산업화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신종교는 동학계(東學系) ·증산계(甑山系) ·
단군계(檀君系)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도 유교계 ·불교계 ·남학계(南學系) ·
기독교계 ·무속계의 신종교가 발생하였다. 이들 신종교는 《정감록(鄭鑑錄)》 ·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 등 종말론적 대망사상과 미륵신앙, 그리고 운세사상이 사상적
기반이 되어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표방했다.
동학(東學)의 최제우나 남학(南學)의 이운규(李雲圭), 정역(正易)의 김항(金恒),
증산교(甑山敎)의 강일순(姜一淳) 등의 세계관은 모두 후천개벽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시기 신종교의 효시인 동학의 성립에는 해체기에 직면한 조선봉건사회의 체제모순과
서양제국의 침략에 따른 대내외적 위기, 18세기 중엽 이후 빈발하던 민란, 그리고 유교의
위상 약화와 천주교의 확산이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특히 18세기 중엽 이후 빈발하던
민란은 동학의 성립 배경이자 동학이 대규모 민중종교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동학은 최제우(崔濟愚)에 의해서 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성립되었다. 후천개벽을 선포했으며
연원제(淵源制) 조직원리에 기초한 접(接)과 포(包)조직을 통해서 포교를 행하였다.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이르러 삼남 일대로 교세가 크게 확대되었다. 1894년에는 교단 차원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과 민중의 변혁적 열망이 결합하여 동학농민전쟁을 수행하였다.
동학농민전쟁 이후에는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등지로 교세가 확산되어 전국 일원으로
널리 분포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3 ·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천도교청년당
(天道敎靑年黨)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적 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동학계 신종교는 천도교를 비롯해서 시천교(侍天敎) ·수운교(水雲敎) ·동학본부 등이 있다.
증산교는 증산 강일순에 의해서 1901년 전라도 모악산에서 성립되었다. 후천개벽과 해원상생
(解寃相生)이 주요 교리이다. 핵심 주문인 ‘태을주(太乙呪)’의 첫머리가 ‘흠치흠치
(度琇度琇)’로 시작하기 때문에 흠치교로 불리기도 한다. 창교주 사후 극심한 분열의
모습을 보여 일제강점기에만 100여 개의 분파가 성립하였다. 주요 증산계 신종교는
보천교(普天敎) ·태을교(太乙敎) ·태극도(太極道), 그리고 1972년 태극도에서 파생하여
박한경(朴漢慶)이 설립한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와 1980년 안경전이 설립한 증산도가 있다. 대종교(大倧敎)는 홍암(弘巖) 나철(羅喆)에 의해서 단군신화의 모티프를 근간으로 1909년에
성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등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외에도 단군계 신종교는 한얼교 ·개천교(開天敎) ·단군영모회 등이 있다. 원불교는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에 의해서 1916년에 성립된 종교이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 아래 종교신앙과 생활실천의 일치를 주장한다. 이 밖에도
금강도(金剛道) ·각세도(覺世道) ·봉남교(奉南敎:일명 찬물교), 강대성이 설립한 유교계
신종교인 갱정유도(更正儒道)가 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기에는 기독교계 신종교가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는데,
이는 기독교의 급성장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이들 신종교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과정에서 뿌리뽑힘의 위기를 겪고 있는 도시 대중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심리적 소속감을 부여하는 통로로 작용하였다. 기독교계 신종교는 대체로
신비주의적 지향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기독교적인 메시아니즘(messianism)과 종말론,
그리고 토착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전 시기의 신종교가 사회개벽 지향적, 공동체적, 농촌중심형이라면 기독교적 종말론의 강조, 개인구원 중심, 도시형 종교라는
점이 이 시기 신종교의 특징이다. 통일교(정식 명칭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
전도관(傳道館) ·승리제단(勝利祭壇) ·애천교회 등이 대표적이다.
1954년 문선명(文鮮明)이 설립한 통일교는 반공주의와 성적 타락을 주장하는 등 독특한
성경해석을 하고 있으며 주된 교리서로 《원리강론》이 있다. 국내보다 일본 ·미국 등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크게 확산하였다. 박태선(朴泰善)이 설립한 전도관은 메시아를 자처하여
1950년대부터 전도관과 신앙촌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펼쳤다. 승리제단(일명 영생교)은
조희성이 전도관으로부터 독립하여 1980년에 설립하였다. 임박한 종말과 영생 불사를
주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관성교 ·무량천도와 같은 무속계 신종교도 있다.
신종교로는 일본계의 창가학회(創價學會:일명 남묘호랭교) ·천리교, 미국계의 여호와의
증인 ·모르몬교 ·안식교, 그리고 중국계의 일관도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종교는 왜색(倭色) 시비로, 여호와의 증인교는 수혈거부와 집총거부 등으로 사회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종교는 사회구조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신종교의
발생은 사회변동에 대한 반응이자 동시에 사회변동의 촉발제가 되기도 한다.
교의 발생은 그 자체가 당대의 사회적 위기상황이나 기성종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으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기성종교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며, 그 사회와 종교를 혁신하기 위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이로 인하여 기성종교와 사회로부터 이단 ·사이비종교 ·
사교(邪敎) 등으로 배척받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신종교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상당 부분
자의적인 것이거나 결과론적인 것으로 신종교가 지니는 사회고발적 성향이나 창조성을
무시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기성종교나 사회제도의 관점에서 신종교에 가하는 평가를
신종교 일반의 성격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박해윤;

조선때 동지중추부사를역임하였다,

박기채;
저선때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박춘재;
서울 출생이다. 한문 공부를 하였으나 소리[唱]를 더 좋아하여 홍필원(洪弼元)·
박서경(朴書景)·조기준(曺基俊) 등에게 시조·경기속요·가사를 사사하고,
1900년(광무4)에는 궁내부 가무별감(歌舞別監)이 되었다.
가곡·가사·시조에 능하여 경기잡가·휘모리잡가·서도잡가·경서도 입창(立唱:선소리)
등 당시 경서도속가(京西道俗歌)의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문영수 ( 文泳洙 ) ;

평양 출생. 한말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활약했다.
이정화(李正華)와 더불어 평양 날탕패(민속가무단)에서 활동하다가,
원각사(圓覺社) 시절(1910년경) 박춘재(朴春載)와 콤비가 되어 창(唱)과 재담으로
장안의 인기를 모았다. 일제강점기 때 취입한 음반 등이 전한다.

발탈 ( 足假面(족가면) ) ;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일종의 탈놀이로 광무대
(光武臺:광무 연간에 지금의 서울 을지로 근처에 세워진 구극 전문극장)시절에 명창
박춘재(朴春載)의 장기였다.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꼭두각시놀음과 비슷한 시기에
비롯한 것으로 추정된다. 발탈의 놀이판은 꼭두각시놀음의 포장막과 비슷한데 가로 130 cm, 세로 1 m 정도의 직육면체로 위와 뒤를 터놓고 앞과 옆을 막아놓았다.
그 안에 연희자가 누워 발목만을 포장 밖으로 내놓고 발목을 전후좌우로 움직여 탈이
웃거나 화내는 표정 등을 연출한다. 꼭두각시놀음처럼 포장막 앞에 한 사람이 앉아
발탈꾼과 재담을 나누며 극을 진행시킨다. 그 옆에는 피리 ·대금(大金) ·대금(大仁) ·
장구 ·꽹과리 등의 잡이[樂士]들이 자리잡고 반주를 맡는다.
이 놀이는 먼저 잡이들이 《길군악》을 흥겹게 연주하여 구경꾼을 모은 뒤,
탈이 “어흠어흠” 큰기침을 하고는 “손님이 오셨냐”라고 어릿광대에게 묻는다.
어릿광대가 “그 사이 손님이 많이 오셨으니 인사를 여쭈어라”하고 능청을 떠는
데서 연희가 시작된다. 재담과 발탈꾼의 노래 ·춤 등이 내용의 주요 요소이며 대사와
소리는 거의 서민들 살림살이에서 나오는 희노애락을 표현한다. 발탈에 쓰이는 탈의
크기는 가로 20 cm, 세로 25 cm 정도에 빨간 상투를 틀고, 복장은 저고리와 조끼를 입었다.
박춘재의 제자인 이동안(李東安)이 기능보유자이다.

이동안 ( 李東安 ) ;

경기 화성 출생. 12세 때 남사당패에 입단하여 1921년 춤의 명인
김인호(金仁鎬)로부터 《신칼대신무》 《진쇠춤》 《태평무》 등을 전수받았다.
1922년에는 박춘재로부터 발탈을 배웠고, 1924년에는 김관보로부터 줄타기를 배웠다.
1942년 여성국보단체단장, 1947년 국악음악무용학원장, 1980년 선화예술고 ·대성여고
등지에서 무용강사를 지냈으며, 1983년 발탈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94년 10월에는
90세 기념무대를 갖기도 하였다.

이창배 ( 李昌培 ) ; 호 벽파(碧波). 서울 출생. 중학을 마친 뒤 가사와 경서도민요
(京西道民謠)의 명창 최경식(崔景植)에게 가사와 민요를, 선소리산타령의 명창
이명길(李命吉)에게 《선소리산타령》을, 다시 경기잡가의 명창 박춘재(朴春載)에게
경기잡가를 사사하였다.
1951년 국립국악원 국악사가 되고, 60년부터는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선소리산타령》의 보존회를 조직, 이의 보급과 후진양성에 힘써 왔으며, 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주요저서에 《가요집성(歌謠集成)》 《한국가창대계(韓國歌唱大系)》 등이 있다,

한국의 레코드음악 ;

한말 유성기(留聲器)와 더불어 구미에서 들여온 레코드는 실로 당시의
사회를 경도(驚倒)시킨 문명의 이기(利器) 가운데 하나였다. 1899년(광무 3) 3월 13일자
《황성신문》에는 “西洋 格致家(연구가)에서 發明한 留聲器를 買求하야… 置하였는데
其中으로 歌笛笙瑟聲이 運機하는⒭ 出하야 完然히 演劇場과 如하니…”라는 기사가 실려
있어 유성기와 레코드는 이 때 들어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도쿄[東京]의 천상당(天賞堂)에서 판매한다는 이 신기한 ‘소리판’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고, 조정에서도 이를
구경하기 위해, 일본인 기술자가 녹음장치를 가지고 고종황제 앞에서 당시 광대로서 유명한
박춘재(朴春載)의 노래를 취입하였다. 노래가 끝난 후 토시[吐手]처럼 생긴 녹음기 속에서
노랫소리가 울려나오자 고종은 깜짝 놀라며, “춘재, 네 명(命)이 10년은 감했겠구나”라고
말했다 한다. 당시 사람들은 녹음기가 정기(精氣)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에서 외국 레코드가 처음으로 판매된 것은 1908년 2월 미국 빅터회사에서 취입한
《韓國 서울 聖桃彩玉唱夫西唱》(朴容九 소장)으로 이 레코드는 한쪽 면만 녹음된 것이다.
13년 《매일신보》에는 “새 소리판 왔소. 소리 넣은 사람 宋萬甲 朴春載 金蓮玉 趙牧丹…”
이라는 레코드광고가 실려 있어 초창기의 취입은 조선창(朝鮮唱)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20년대에 들어 레코드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레코드음악은
본격적으로 대중화시대를 맞이하였는데, 26년 현해탄에서 정사(情死)한 윤심덕(尹心悳)의
유작(遺作)인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로 시작되는 《사(死)의 찬미》가
레코드음악의 확산에 기폭제적(起爆劑的)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27년에서 30년
초반까지는 ‘유행소곡(流行小曲)’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레코드가 출현하여 새로운
대중가요의 시대를 열었다. 28년 채규엽(蔡奎燁)이 취입한 《봄노래》, 29년
이애리수(李愛利秀)가 취입한 《황성옛터》가 모두 이 때의 유행가이며,
《황성옛터》의 작곡가 전수린(全壽麟)은 이 곡으로 한국적 유행가의 비조(鼻祖)가
된 셈이다. 29년 이철(李哲)은 오케레코드사를 설립함으로써 최초로 한국인에 의한
레코드사가 출현하였거니와 그는 첫 레코드로 기생출신 가수 박부용(朴芙蓉)이 취입한
《노들강변》을 내놓아, ‘신민요’라는 새로운 형태의 노래를 낳게 하였다.
그후 35년을 전후해서 레코드는 공전(空前)의 붐을 일으켜 창가 ·유행가 ·
동요와 더불어 양악도 처음으로 출반(出盤)되었는데, 계정식(桂貞植)의 바이올린에
의한 《타이스의 명상곡》, 정훈모(鄭勳謨)의 소프라노 독창 《솔베이지의 노래》가
이 때 취입되었다. 이 무렵에는 수입된 양악(洋樂) 원반의 보급도 활발하여 음악잡지의
레코드목록에 “바요링협주곡 E단조(十二웅三枚 十窩半):멘델존 작, 倫敦필하모니,
바요링에 세계적 거장 크라이스러”라고 소개되어 있어, 당시레코드의 치수와 값을
알 수 있다. 35년 12월호 《월간음악》에는 당시 축음기(蓄音機)의 보급대수가 30만
대임을 알렸다. 8 ·15광복 후에는 고려 ·서울 ·도미도 레코드사(社) 등이 주로
대중가요를 녹음하였다. 그 뒤 성음제작소가 67년 영국의 데카사(社)와 계약을 맺어
한국 최초로 라이센스음반을 내놓았으며, 86년 무렵부터는 SKC가 콤팩트디스크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국내연주가의 음반을 내놓았다.

경기소리 ( 京畿- ) ;

1975년 7월 12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경기소리는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전승되어 오던 여러
경기민요 가운데서도 특히 경기긴잡가를 가리킨다.
잡가(雜歌)란 가곡(歌曲)이나 가사(歌詞)와 같은 정가(正歌)에 상대되는 속가(俗歌)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속가 가운데 약간 긴 통절형식(通節形式)의 좌창(坐唱)을
잡가라 하며, 그 가운데 긴잡가는 느린 장단으로 된 십이잡가(十二雜歌)를 말한다.
경기잡가는 서울 문(門) 안과 근교의 장인, 밭장이, 한량(閑良) 출신 소리꾼들에 의하여
전승 발전되어 왔다. 특히 서울 만리재에서 청파(靑坡)에 이르는 일대의 소리꾼들이
잡가를 잘하였다 한다. 이들은 겨울에 파를 기르는 움집을 크게 만들었는데,
그 안에 소리방(房)을 꾸미고 여기에 둘러앉아 장고 장단에 맞추어 소리를 하였다.
잡가 명창으로는 속칭 추조박(秋曺朴)이라는 조선 말의 3인을 꼽는다. 즉 기교에
뛰어난 추교신(秋敎信), 성대를 잘 타고난 조기준(曺基俊), 잡가로 이름이 높던
박춘경(朴春景)이다. 그 가운데서도 박춘경이 잡가를 많이 짓고 잘 불렀다 한다.
이들의 뒤를 이어 한인호(韓仁浩)·주수봉(朱壽奉)·최경식(崔景植)·박춘재(朴春載)와
같은 명창들이 나왔고, 다음으로는 이창배(李唱培)·김순태(金順泰)·최정식(崔貞植)·
이진홍(李眞紅) 등이 활약하였는데 이들의 후배인 안복식(安福植:예명 安翡翠)·
이경옥(李瓊玉:예명 墨桂月)·이윤란(李潤蘭:본명 李銀主) 등은 나중에 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경기잡가에는 가사(歌詞)와 같이 긴 사설(辭說)을 도드리장단이나 세마치장단으로 짠
긴잡가와 사설시조형의 긴 사설을 빠른 장단으로 짠 휘모리잡가가 있다. 긴잡가 가운데
유산가(遊山歌)·적벽가(赤壁歌)·제비가[燕子歌]·소춘향가(小春香歌)·선유가(船遊歌)·
집장가(執杖歌)·형장가(刑杖歌)·평양가(平壤歌)·십장가(十杖歌)·출인가(出引歌)·
방물가(房物歌)·달거리[月令歌] 등을 십이잡가라 한다. 휘모리잡가의 사설이 사설시조에
보이는 서민적인 해학으로 가득 차 있는데 비하여, 긴잡가의 사설에는 판소리의 한
대목씩을 따서 극적인 장면을 노래하거나 서정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많고 흔히
통절형식으로 되어 있다.
장단은 도드리장단으로 된 것이 많고, 세마치장단으로 된 것도 있다. 선율은 서도소리에
보이는 수심가(愁心歌) 토리에 가까우나 시김새가 서도소리보다 짙지 않고, 경기민요에
보이는 경토리[京調]가 섞여서 특이한 음조를 갖는다. 경기소리 가운데 양산도(楊山道)·
방아타령·창부타령(倡夫打令)과 같은 경기민요나 곰보타령·병정타령과 같은 휘모리잡가가
흥겹고 구성진 느낌을 주는 것에 비하여 유산가·소춘향가와 같은 긴잡가는 차분하고 구수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색이다.
한편 놀량·앞산타령과 같이 소리꾼들이 늘어서서 소고(小鼓)를 치고 춤을 추며 부르는 것을
선소리[立唱]라 하는데 대해, 잡가는 늘어앉아서 장고의 반주로 부르기 때문에 좌창(坐唱)이라 하기도 한다.

박기호;
호 양우(養愚). 15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으며, 성격이 침착하고 청렴결백하였다.
노부모와 가난 때문에 과거보는 것을 단념하였다. 1825년(순조 25)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올라 직장(直長)에 이르렀으며 1837년(헌종 3) 증산현령(甑山縣令) 재임시에 선정을
베풀었는데 현령을 물러날 때는 눈물을 흘리며 고별하는 백성이 10리길을 메웠다고 한다.
곳곳에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후에 현륭원령(顯隆園令)이 되었다.

봉산면 [ 鳳山面 ] ;

면적 80.60㎢, 인구 2,067명(2001)이다. 동쪽으로 합천읍·
용주면(龍洲面), 북쪽으로 거창군 남하면(南下面), 남쪽으로 대병면(大幷面), 서쪽으로
거창군 남상면(南上面)에 접한다. 12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오도산(吾道山:1,133m)·숙성산(宿星山:889m)·인덕산(仁德山:647m)이 면의 동쪽에 있고,
면의 중앙은 합천호로 인하여 평지의 대부분이 수몰되었다. 주로 밭작물을 비롯하여 오이·
호박·가지·참깨 등이 생산된다. 교통은 합천·거창·산청 방면으로 국도와 지방도가 통한다.
높이 49m, 길이 258m로 산과 산의 계곡을 연결하는 봉산대교가 있다.
문화재로는 봉서정(鳳棲亭)과 도촌별묘(陶村別墓)(경남유형문화재 235),
옥계서원(玉溪書院:경남문화재자료 60), 박기호 불망비(朴基鎬不忘碑),
박한익 개답송덕비(朴漢翼改畓頌德碑), 권빈산성(勸賓山城), 지곡사지(智谷寺址),
고삼리 사지(高三里寺址), 최씨부자정(崔氏父子亭), 용암서원(龍岩書院),
영각사지(鈴角寺址) 등이 있다.

박내만;
자는 치영, 호는 문봉,1836년(헌종2)문과에 급제한후 승지,대사헌등을거쳐
외직으로 춘천 덕천부사 등을지내고 공조판서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같다,

박성묵;
호 양암(陽巖). 별명 영묵(永默). 경기 고양(高陽) 출생.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경희백(慶希伯)과 함께
강원도에서 활약하였고, 이듬해 강원 횡성(橫城)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남만주 환런현[桓仁縣]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다.

경희백 ( 慶希伯 ) ;

충청북도 출생. 1895년 8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11월에는 정부에서 단발령(斷髮令)을 내렸다. 그러자 전국의 유림(儒林)은
국모시해(國母弑害)의 복수와 단발령에 항의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경희백도 박성묵(朴性默) 등과 함께 관동지방에서 거병하였다가 관군과 접전
중 전사하였다.

박기수;
자는주여,호는손재,
조선고종때 돈령부 도정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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