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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중조

한들 약초방 2015. 3. 14. 17:00

언부(彦孚)

太師公派

고려 문종조 최충과 더불어 태사 중서령을 역임하고 벼슬이 문하시중 밀성 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 졌다. (문하시중 도평의사) 종파인 은산부원군파, 행산부원군파의 중시조 이시다.[ 출처 동사평람]
遺址는 豊角花山 이라하나 傳하질않는다,

忠北 沈川郡 伊院面 龍坊里 遠德祠 配享하다,

원(元)

四門進士公派

언부->의신(義臣)의 아들. 사문진사를 역임하였다.

高麗 仁宗時에 工部尙書 韓義臣 謚文烈公의 嫡子로 塼學能文하사 掌敎四門學하시다,遺址는 密陽郡 下南邑 貴明洞이라하나 今失傳되어 全北 金提市 上東洞 三水里 三松齊 後嶝에設壇享祀하고 있으며 十二中祖派 派祖로 沈川 遠德祠에 配享되어있다,配位는 鷄林金氏 이다,

壇祭日은 每年 陰 三月十四日 恒定

척(陟)

忠憲公派

언부->의신->윤->창연->지형(之瑩)의 아들. 고려 충선조 밀성군으로 분봉되었다. 시호가 충헌공 이시다.

高麗 忠宣王朝에 內部時承이며 純忠同德贊化公臣 으로 三中大匡封 密城君 이며 推恩加上 金紫光錄大夫이다,

謚號를 忠憲이라 增하고 增賜牌地하야 功臣子孫으로 하여금 世受秋綠하다,

配位는 鷄林郡夫人 慶州李氏이며 墓는 密州 守山縣에 있고 遺址는 豊角花山에 있다 하였다,

여기에서 忠憲公의 事實을 詳考하면 이에 앞서 忠宣王이 世子로있을當時 鄭可臣과 閔潰등과 같이 元나라에 불모로 가 있었는데 三年이 지나서 公이 元나라에 들어가서 金深과 더불어 謨議하여 藩王의 阻止방해함을 물리치고 世子(忠宣王)을 받들어 돌아왔다,

忠宣王이 양위한後에 王惟紹와 宋邦英이 침노함에 公이 公論을 이글어 義定하여 紹와英 兩人을 誅殺하니 王이 이로부터 國政에 專念하게 되었고 또 李混의 主張을 罷하여 法을 選擇하여 베푸니 人望이 모여져 朝野가 太平하였다,

이事實은 花山聯系譜에 보인다, 賜牌地는 守山縣에 있다고 하였으나 傳하지않으니 外地에 禹居하는 子孫의 家第에 採錄되어 있었다,

景募齊 뒤에 옛날부터 壇을모아 제사지내오다 壇이 극히 초라하여 新羅紀元 二千三十五年(西紀一九七八年)戊午에 二十四世孫 容甫가 盡誠損財하여 改修하였으며 本來 景募齊는 密陽 下南 良洞에 있었으나 先瑩 祭享에 不便함이있어 新羅紀元 二千五十一年(一九九四年)甲戌에 貴明洞 大提學公 陵下로 移建하고 아울러 祭壇과 碑를 移設하여 祭享하다,

密陽市 下南邑 貴明里 景募齊의 享祀는 陰 十月 初三日이다,

忠北 沈川 遠德祠에 配享하다,

중미(中美)

密直府院君派

언부-> 의신->윤-호연 5 대손. 고려 공민조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밀직부원군으로 분봉되었다.

一諱 仲美라 한다, 高麗 忠穆王朝에 登第하여 恭愍王朝에 벼슬이 平章事에 이르고 久帶中書하다 己亥에 紅巾賊王居敬이 西京을陷落함에 공이 安裕 李芳實과 더불어 쳐부수다,辛丑에 紅巾賊이 大擧侵入하여 京城이 陷落하고 朴文臣이 戰死하니 王이 太后를 모시고 福州(今安東)로 南辛하시니 公과 洪彦傳등 數十人이 호종 하였다,秋九月에 王이 都할때 福州로부터 淸州에 머무르니 王이 北樓에서 五言詩를 짖고 群臣에게 和韻하라하니 公이 삼가 和하여 樓價增三培, 吾王止輦初, 風煙繞態度, 雲物人圖書, 野曠眉峰列, 林旒眼界盧 라 하였다, 乙巳에 左司議大夫 判典校事 寶文閣大提學을 拜受하고 純誠輔理功臣 大匡輔國崇綠大夫 封密直府院君에 錄勳되다, 遺址는 豊角花山이라 한다,太祖가 登極하여 三徵하였으나 不起하고 卒하니 王이 禮葬하고 謚號를 文肅이라 贈하다, 墓는 風角 妙峰里 酉坐에 있고 墓碑가 있다, 配位는 府夫人朴氏이고 典理佐郞大將軍 文有의 딸이다,墓는 公과 同原이다, 淸道郡 豊角面 妙峰里의 墓所下에 妙峰齊가 있어 陰 十月 初七日 享祀하다,

현(鉉)

糾正公派

언부->공필->윤공->광례 4대손. 사 헌부규정이시며 규정공파의 시조이시다.

高麗朝 中葉에 文科에 登第하여 벼슬이 司憲府糾正으로서 三品에 이르다, 老後에 鄕里에 돌아와 八十七歲에 卒하다, 道學으로 中外에 이름이 翕然하였다, 忠節錄에 이르기를 大司諫 朴尙哀 王에게 아뢰기를 糾正公 朴鉉은 仁義를 體德하여 忠孝가 뚜렷하니 東方道學의 組宗이라 할수있다, 하였다, 李文靖公(嗇)이 王에게 아뢰어 崇義殿에 配享하고 致祭하여 位田을 下賜하였다, 傳하는 바에 依하면 高麗太師 功臣 淸白吏 糾正公朴鉉은 大學文風하여 斯道를 復明함이 文成公 安裕와 文憲公 崔沖과 같다, 하였다, 이로서 公의 子孫은  支庶를 不分하고 淸路에 擇用하라 하여 東西銓曺에 記錄되었다, 哲宗은 己未(一八五九)에 全北 任實 中洲書院 世德祠에 享祀하였고 壬戌에 忠北 沈川 遠德祠에 配享하였다,配位및墓所는 알수없으나 長瑞郡 長道面 杜梅里 聖主洞에 있었다하니 傳하지 아니하고 高陽郡 (現高陽市)元堂洞 凡橋里 豆應村(元陵驛前)에 設置 祭享하고 全州 鳳捷洞에 設壇 祭享하며 長興의 世德祠 慶山 珍良의 栗山書院에 配享하다,

언상(彦祥)

都評議事公破

도평의사 밀직 부원군이시며 언부의 동생이시다[출처 고려사]

祥을 商으로도 말한다, 高麗朝에 벼슬이 都評議事에 이르고 密直君 에 封하였다, 遺址는 風角花山이라하나 傳하지아니한다, 忠北 沈川郡 伊院面 龍坊里 遠德祠ㅇ 配享하다,

언인(彦仁)

左僕射公派

밀직군이시며 언부의 동생이시다.

高麗朝에 벼슬이 壁上三重大匡門下平章事 尙書左僕射이고 密直君에 封하다, 忠北 沈川 伊院面 龍坊里 遠德祠에 配享하다, 一九七九年(己未)에 後孫의 檢議가 모아저 忠北 永同郡 沈川面 高塘里에 世德祠를 重建하며 奉享하다, 享祀日 陰 十月初一日이다,

양언(良彦)

密直副使公派

밀직부사공 이시다.

高麗朝에 벼슬이 奉翊大夫密直副使에 이르나 文獻이 散逸하여 其外는 分明치 않고 遺址마저 傳하지 아니한다, 忠北 沈川  遠德祠에 配享하다

원광(元光)

令同正公派

양언의 6대 손 영동정 이시다.

諡는 襄惠公이요 高麗朝에 벼슬이 令同正에 이르고 行宰相中書令을 지냈다

恭愍王朝때 紅巾賊이 西京陷落時 에 安裕 李芳實과 함께 擊退하였으며 辛丑年에 朴文臣가 戰沒한즉 洪彦傳과 함께 大駕扈從하여 平亂의 功을 세워 輔理功臣輔國崇綠大夫가 되여 密直府院君을 封하였다, 그遺址는 傳하지 아니하고 忠北 沈川 遠德祠에 配享하다,

천익(天翊)

判圖判閣公派

판도판각공 이시다.

高麗 宣宗朝에 벼슬이 判圖判閣에 이르다, 遺址는 傳하지 아니하고 忠北  沈川 遠德祠에 配享하며 密陽市三浪津邑 儉世里에 設壇祭享하다, 陰 九月 二十日이 享祀日이다,

을재(乙材)

三司左尹公派

삼사좌윤공 이시다.

高麗朝 明宗 丁巳에 文科 벼슬이 判三司左尹密直副使에이르다, 號는 雄川이며 配位는 昌寧趙氏이고, 直提學繼芳의 따님이다, 墓所와 其他 文狀은 失傳하다, 遠德祠에 配享하며 密陽市 淸道 古法里 修德齊의 景賢祠에 奉安하며 春秋로 陰 三月十五日과 陰九月十五日 享祀하다,

위(威)

靖國君派

을재의 8대손.정국군(靖國君)고려 말에 극성했던 왜구를 격퇴한 무관으로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 도순문사(都巡問使: 외관적으로 주. 부의 장관을 겸함)가 되아 쓰시마를 공격해 전선 3백여 척을 불태웠으며 뒷날 이성계와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하여 그 공으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면서 충신이 되었다.

 

高麗 恭愍王朝에 金海府使로 盆山城을 築造하였다, 西紀一三七六年 丙辰에 晋州牧使, 一三八四年 鷄林 府尹, 一三八五年 甲子에 慶尙道

元師兼都巡問使, 一三八七年에 東萊城을 築城 蔚山 神鶴城 築城, 一三八八年 戊辰에 慶尙道上元帥 征遼出征, 一三八九年 己巳 慶尙道 節制使 對馬島征伐 十一月 判玆惠府使, 一三九十年 庚午에 知門下府使封忠義君門下評議兼大司憲, 一三九二年 壬申 封靖國君,一三九八年 戊寅 參贊門下府使都提調, 八月二十六日 都鎭撫로 卒하다, 墓所는 없고 密陽市 武安面 鼎谷里 華南書院에 配享하고 沈川 遠德祠에 配享하며 密陽市 淸道 古法里 修德齊의 景賢祠에 配享하여 陰 二月末丁日에 祭享하다, 遺所는 昌原市 龍池公園에 神道碑가 保存되고 金海市 益城頂上에 忠義閣 山城內에 築城記念碑가 있고 鎭海市 앞바다에 朴威(0) 이있어 設壇 祭壇碑가 있다,

 

신남서원에 봉향된 정국군 박위(靖國君 朴위)(1332(?)∼1398)는 공민왕초에 우달치(于達赤)로 보임되었다가 김해, 진주, 계림 고을의 수령을 거쳐서 세 번이나 합포의 진수(鎭守)를 하였다. 박위 장군의 큰 전적으로는 황산강 싸움과 대마도 정벌 등을 들 수 있는데 전략상으로는 김해 분산성과 동래성의 축성, 그리고 울산 신학성 축성의 자문과 그것의 준공일 것이다.

1375년 겨울 왜구가 침범하여 김해가 폐허화되었을 때 부사로 부임하여 난민 구호와 파괴된 가옥의 복구를 위해  전심전력하였다. 김해는 원래 삼면이 물과 갈대로 둘러싸여 왜적이 쉽게 침입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분산성을 구축하였는데 후에 황산강 싸움 때 이 산성을 이용하여 적을 크게 물리쳤다.

 

산성 경내에 박위 장군의 축성 사적비가 남아 있고, 분산성은 사적(史蹟) 66호로 지정되어 있다. 1384년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재임시 성균사예 이문화(李文和)가 당시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폐허화되어 있던 울산 복구를 위하여 자문을 구하자 울산 신학성 축성을 권유하였고, 성곽이 완공될 무렵 박위는 원수 겸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합포로 진을 옮기게 되었다.

1388년에는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요(遼)의 정벌에 나섰다가 회군하여 경상도 절제사(節制使)가 되었고, 1389년 2월에는 대마도정벌에 나섰다. 그때 일본은 대마도와 일기도를 중심으로 고려의 변방을 약탈하고 방화, 살륙을 자행하였다. 그때마다 고려는 방어에만 힘섰고 일본에 사자를 보내어 왜구의 금지를 교섭하였지만 일본 막부의 명령은 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박위는 부사로서 김해 분산성(盆山城)을 쌓고 도순문사(都巡問使)로서 신학성(神鶴城)을 완공케하고 동래성을 쌓아 왜구를 방어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전함 100척을 인솔하여 대마도 정벌에 나서 대승하였다. 후에 이성계를 도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오르고 충의백(忠義伯)으로 봉해졌다. 

조선 개국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지내고 정국군(靖國君)에 봉해졌다. 즉 장군은 국난 극복의 굳은 신념과 자연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왜적 방어에 대비하겠다는 장수로서의 지략도 아울러 갖추고 있었는데, 1390년에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박위는 위화도 회군과 공양왕 옹립까지는 이성계와 보조를 같이 하였으나 고려말 이성계의 전권에 대항하였다는 김종연 사건에 연루되어 풍주로 유배되었고, 1년여의 유배생활에서 풀려났으나 붕괴 직전의 고려조를 위해 구국충정을 가졌지만 정몽주마저 피살되는 대세를 막을 수 없어 이성계의 회유에 시기를 기다렸었다.

 

1392년에는 이태조가 등극하였고, 1393년에는 양광도절제사(揚廣道節制使)가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명에 의해 두문동에 있는 고려조의 충신들을 찾아가기도 하였고, 고려 왕조의 회복을 위해 이흥무에게 미래에 대해 점을 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히게 되었고, 장군의 덕망과 무인으로서의 기상과 재조(才操)를 잘 아는 이성계의 특별한 배례(配禮)로 무죄가 되어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로 보직되었지만 계속적인 대간(臺諫)들의 상소로 결국 파직되고 말았다.

이성계는 박위의 덕망과 무인(武人)으로서의 기상을 아껴 수감 중인 박위를 직접 가서 위로를 하였고, 사헌부의 연이은 탄핵에도 불구하고 옹호하여 무죄로 특사케 하였으나 결국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방원의 추종세력에 의해 피살되었다. 범을 잡으려 범굴에 들어갔다가 범은 잡지 못하고 희생만 당한 격이 되고 말았으니 혼자의 힘으로 역사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