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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조왕릉 비명(新羅始祖王陵碑銘)

한들 약초방 2015. 3. 14. 17:17

新羅始祖王陵碑銘

 

 

嗚呼此新羅始祖王墓也傳在世宗十一年始建廟蓋周家三格之義而景宗三年又揭殿號曰崇德我聖上二十七年命書王字於位版樹墓碑命館閣臣撰其文王之裔諸朴氏旣封章得請且謂余嘗經文任屬以이筆不得辭謹按東國史旣狀錄王姓朴諱赫居世以漢宣帝地節元年壬子生十三屹如大人爲六村長所推立爲君號居西干國號徐羅時五鳳元年夏四月也先是古鮮遺民分居東海濱爲六村而無君長高墟村長望楊山麓蘿井林間有異氣若仙人궤拜狀往見之有一大卵如瓠剖得孀兒儀形端美浴於東川身生光彩鳥獸率舞六村人以其生甚異收養之至是之至是推而尊之瑚是仙桃山聖母名婆蘇所誕云以朴爲姓蓋以方音謂瓠爲朴故也五年春正月立閼英爲妃妃之生有瑞應龍見於閼英井右脇生女兒有老구異而育之名以井名及長爲王妃有令德能內輔國人稱二聖八年日本欲犯境聞王神德乃還十七年王與妃巡六部勸農桑十九年弁韓以國來降蓋亦歸仁嚮德而然也二十一年築京城號金城二十六年始作王宮三十年樂浪人欲襲掠入境見民不夜경野多露積相謂曰有道之國不可犯也撤兵而歸三十八年遣瓠公聘馬韓其王責以事大之禮瓠公曰我國自二聖肇興人事修而天時和昶늠實而人民讓眞韓弁韓樂浪倭人罔不畏懷而吾王謙虛使臣修聘可謂過於禮馬韓王欲殺之爲左右諫止越明年馬韓王薨或說王曰馬韓前辱我使今宜因其喪而征之王曰幸人之災不仁也遣使弔之五十三年東沃沮之君獻良馬二十匹曰寡君聞南韓有聖人敢有所獻時三國皆尙戰爭王獨行仁義不務威力遠近諸國聞風願附者甚衆六十一年甲子三月王薨壽七十三太子南解立是年葬王于國都南王薨之七日王妃閼英氏亦薨自南解王後以朴傳王八世昔金兩姓迭相傳襲徐羅之號至智證王時改以新羅歷年共九百九十二年惟朴氏至今繁衍爲我東大姓其源出自景明王時有八公子長曰密城次曰高陽三曰速咸四曰竹城後爲密陽高靈咸陽竹山之派五曰沙伐六曰完山七曰江南八曰月城傳以尙州全州順天慶州之貫此其最盛且著者其外別譜甚多不能盡記嗚呼王之爲王豈不誠神異而仁聖也哉王是三韓首出之君天之肇降毓以異瑞如簡狹呑卵而生契姜嫄履跡而生棄庶年大位誕撫草昧開創之業寬仁應聖作之期嵬偉著天錫之表建邦都而制度克鞏勸耕桑而課條其勤遭隣國之辱而不伐其喪致遠人之服而自집其師樂浪歎民俗之善及境而還歸弁韓慕君人之德擧國而來降至於沃沮之獻良馬無異於越裳之雉西旅之獒享國六十年做上世一王之治以基維千綿遠之祚의歟盛哉今距王之世遼且邃矣山川之雄麗民物之殷富尙有鍾靈之餘氣基王之遺跡而後裔之盛其麗不億一國之人不爲王內外派者絶稀於此尤可以徵王之至德矣我世宗修明禮樂之聖主立廟故都祝幣以祀可見異代曠感之意殿名之加王字之題又是禮視崇義一體尊奉之盛典噫碑之有無顧何關於王之盛德懿烈而韓愈撰徐偃王碑猶稱其修仁垂後之美신王神聖也可記之蹟比偃王不翅逈越我聖上命詞臣述次碑者蓋欲及史闕載石以樹殺作人主觀法之監碑惡可無也遂爲之銘曰 維羅之始天降聖王仙桃所誕大瓠爲祥剖而得孩浴則揚彩鳥창獸舞休名斯在齒裳十三君長六部德惟聖哲化以寬厚내得賢配其生亦異人謂二聖內治克備勤民力業足衣與食俗有禮讓國無兵革旣服倭奴且집浪人何以致此예王之仁不伐隣喪或獻土産享閱六紀祚跨千算于今百世式多雲仍諸派所傳厚澤可徵肇興之墟有廟孔혁 維我英陵義在象德巍巍殿名煌煌王號前後曠典祀官則告水旱之歲民蒙靈척父老曰噫餘惠未竭墓門之側貞珉屹然王命爲銘永垂萬年

大提學 趙觀彬 撰

判府事 兪拓基 篆

知義禁 洪鳳祚 書

 

 

신라시조왕릉비명(新羅始祖王陵碑銘) 역문(譯文)

아! 이는 신라시조왕(新羅始祖王)의 능(陵)이다. 옛날 世宗十一年에 처음으로 사당을세웠으니 대개 周나라에 삼각의 의이며 경종(景宗)三年에 또 숭덕전(崇德殿)의 전호(殿號)를 표시하게 하시고 우리 성상(聖上) 二十七年에 위판(位版)에 왕자(王字)를 쓰게 하시고 묘비(墓碑)를 세우게 하심에 관각(館閣)의 신하에게 명하여 비문(碑文)을 짓게 하시니 왕의 후손(後孫)인 여러 朴氏가 이미 상소(上疏)하여 윤허(允許)를 얻고 내가 일찍이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해서 글을 부탁하니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동국사(東國史) 및 장행록(狀行錄)을 상고하오니 王의 姓은 朴氏요 휘(諱)는 혁거세(赫居世)시니 한선제(漢宣帝) 지절원년(地節元年) 임자(壬子)에 탄생(誕生)하사 十三歲에 의젓하게 어른 다워서 육촌장(六村長)의 추대(推戴)로 임금이 되시어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컫고 나라이름을 서라(徐羅)라 하니 그 때는 오봉(五鳳)元年 四月이다 이보다 앞서 고조선(古朝鮮)의 유민(遺民)들이 동해(東海)가에 나누어 살며 六村을 이루었으나 임금이 없었는데 고허촌장(高墟村長)이 양산(陽山) 기슭에 있는 나정(蘿井)의 숲사이를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떠오르고 신선(神仙)이 꿇어 앉아 절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 가서 보니 박과 같은 큰알(卵)이 있으므로 쪼개어 보니 어린 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端正)하고 아름다음으로 동천(東川)에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光彩)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추며 기뻐하더라 六村 사람들이 그 출생(出生)함이 심히 신기(神奇)하다하여 거두어 길렀는데 이제 추대(推戴)하여 왕으로 모신 것인데 이 박 같은 알은 선도산(仙桃山)의 성모(聖母) 파사소(婆娑蘇)가 낳으셨다 한다 朴으로 姓을 한 것은 방언(方言)에 호(瓠)를 朴이라하기 때문이다 五年 봄에 閼英(알영)을 맞이하여 왕비(王妃)를 삼으니 王妃도 나실때에 상서로운 증조가 있었는데 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서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女子)아이가 태어낳으므로 늙은 할머니가 신기(神奇)하다 하여 거두어 키우고 샘 이름을 따라 이름하였는데 장성(長成)하여 王妃가 됨에 또한 덕이 높고 내조(內助)의 공(功)이 커서 백성들이 이성(二聖)이라 일컬었다 八年에 일본이 국경(國境)을 침범(侵犯)하려 하다가 王의 신덕(神德)함을 듣고 돌아갔고 十七年에 王이 王妃와 함께 六部를 순시(巡視)하여 농업과 양잠(養蠶)을 장려하시고 十九年에 변한(弁韓)이 나라를 받쳐 항복하니 또한 王의 덕(德)에 감화(感化)하여 귀순(歸順)한 것이다 二十一年에 서울의 성(城)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이름하고 二十六年에 왕궁(王宮)을 지으시다 三十年에 낙랑(樂浪)이 국경(國境)에 침입하였다가 밤에 민가(民家)에서 門을 잠그지 않고 들에는 곡식을 노적(露積)해 있는 것을 보고 서로말하기를「도덕(道德)을 지키는 나라이니 침범(侵犯)할 수 없다」하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으며 三十八年 표공(瓢公)을 마한(馬韓)에 보내 방문하여 안부를 물으니 마한(馬韓)왕이「대국(大國)을 섬기는 예(禮)에 어긋남을 책망함에」표공(瓢公)이 말하기를「우리나라가 이성(二聖)이 건국(建國)하신 이후로 사람으로서 도리(道理)를 다하고 천시(天時)에 화합하여 곳간에는 곡식이 가득하고 백성(百姓)은 사양하는 미덕(美德)을 지키므로 진한(辰韓)과 변한(弁韓)과 낙랑(樂浪)과 왜인(倭人)들 까지모두 두려워하고 덕(德)을 사모(思慕)하나 우리 임금님께서 겸손하여 사신(使臣)을 보내 빙문(聘問)의 예(禮)를 닦으시니 오히려 禮에 지나친 일이라 하겠노라」마한(馬韓)王이 표공(瓢公)을 죽이려 했으나 가까이 모신 신하들이 간하여 그만 두었는데 그 이듬해 마한(馬韓)王이 훙(薨)함에 어느 신하가 王에게 말하기를「마한(馬韓)이 전날에 우리 사자(使者)를 욕보였으나 이번에 그 국상(國喪)을 틈타서 정벌(征伐)함이 어떠합니까?」하니 王이 말씀하시기를「다른 사람의 재앙(災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진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하시고 사신을 보내 조위(弔慰)하였다. 五十三年 동옥저(東沃沮)의 임금이 양마(良馬) 二十필(匹)을 올리며「과군(寡君)이 남한(南韓)에 성인(聖人)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감히 이것을 드립니다.」하였다 이때에 삼국(三國)이 모두 전쟁(戰爭)을 일삼았으나 王은 홀로 인의(仁義)를 행하여 위력(威力)을 힘쓰지 않으므로 이웃나라들이 성덕(聖德)에 감동(感動)하여 속국(屬國)되기를 원하였다. 六十一年 갑자(甲子) 三月에 王께서 훙(薨)하시니 수(壽)는 七十三歲시다. 太子 남해(南解)께서 왕위(王位)에 올라 이해에 국도(國都)의 남쪽에 왕을 장사하고 장사후 七日에 왕비(王妃) 알영씨(閼英氏) 또한 훙(薨)하시다. 남해(南解)왕으로 부터 朴氏에게 王位를 전승(傳承)하기를 八世이었고 석씨(昔氏)와 김씨(金氏)가 번갈아 전습(傳襲)하게 되었고 서라(徐羅)의 칭호(稱號)는 지증(智證)王때 신라(新羅)로 고쳐서 九九二年 동안 국조(國祚)를 이어 갔으나 오직 朴氏가 지금까지 번성하여 우리 동국(東國)의 대성(大姓)이 되었으니 그 근원(根源)은 경명왕(景明王)때 팔공자(八公子)가 있었는데 맏분이 밀성(密城)이요 다음이 고양(高陽)이요 셋째분이 속함(速咸)이요 넷째분이 죽성(竹城)이니 후에 밀양(密陽) 고양(高陽) 함양(咸陽) 죽산(竹山)의 파(派)가 되었고 다섯째분이 사벌(沙伐) 여섯째분이 완산(完山) 일곱째분이 강남(江南) 여덟째분이 월성(月城)이니 상주(尙州) 전주(全州) 순천(順天) 경주(慶州)의 관향(貫鄕)이 되었는데 이것이 가장 성하게 나타났고 그 외에 별보(別譜)로 된 派도 심히 많아서 모두 기록 못한다. 아 ! 능(陵)에 비(碑)가 있고 없는 것이 王의 성(聖)한 덕(德)과 큰 공업(功業)에 관계(關係) 될 것이 없으나 한유(韓愈)가 서언왕(徐偃王)의 비문(碑文)을 지었는데그의 인덕(仁德)을닦아 뒷세상에 드리움을 기렸는데 더욱이 시조(始祖)왕은 신성(神聖)히신 군주(君主)로서 기록에 남을 만한 업적(業績)이 언왕(偃王)에 비할바가 아니므로 우리 聖上께서 사신(詞臣; 글 잘하는 臣下)에게 명령하여 碑文을 짓게 하시니 대개 역사(歷史)의 궐문(闕文; 빠진 글)에 까지 미치게 하여 석(石)에 기록하여 후세(後世)의 임금에게 귀감(龜鑑)이 되게 하심이니 비(碑)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명(銘)하노니. 오직 신라(新羅)의 처음에 하늘이 신성(神聖)한 임금 내리시니 선도성모(仙桃聖母)께서 王을 탄생하셨도다 상서(祥瑞)로운 큰 박을 쪼개보니 아기가 나왔기로 동천(東川)에 목욕시킴에 광채(光彩)가 찬란하고 새와 짐승 춤을 추니 아름다움 이름 여시서 나왔도다, 나이 겨우 열세살에 육부(六部)에 임금되시매 聖스럽고 밝으시와 너그럽고 인후(仁厚)하사 백성(百姓)이 감화(感化)하고 어진 夫人 얻으시니 그 분의 태어남도 또한 신이(神異)하여 二聖이라 우러러서 내치(內治) 또한 극진하시다. 백성(百姓)을 장려하여 생업(生業)에 힘쓰게 함에 의식(衣食)이 풍족하고 예양(禮讓)의 풍속 이룩되고 전쟁이 없으며 나라안이 고요하다. 이웃나라 항복하고 낙낭(樂浪)사람 진정하니 어째서 이러하고 임금님의 인덕(仁德)일세. 이웃나라 초상 당해 쳐부시지 않으심에 토산물을 올리면서 속국(屬國)되기 원하더라. 六十年을 王位에 계옵시고 천년(千年) 국조(國祚) 누리시어 백세(百世) 지금까지 후손(後孫) 번창하여 여러 파(派)를 이룩하니 두터운 덕택(德澤)을 증명(證明)함이다. 처음세운 옛터에 우뚝솟은 사랑있으니 세종(世宗)께서 덕(德)을 추모(追慕)하여 세우셨고 숭덕전(崇德殿) 높은 이름과 빛나는 王字 칭호(稱號)는 전후(前後)의 융숭한 의전(儀典)이 더욱 빛나도다. 참봉(參奉)이 하는 말에 수한재(水旱災) 있을 때는 백성(百姓)들 기도(祈禱)하면 영험(靈驗)이 있으므로 부로(父老; 늙은 백성)들 감탄(感歎)하여 王의 은혜(恩惠) 끝 없도다 한다더라. 묘문(墓門)옆에 우뚝 선 비석(碑石) 왕명(王名)으로 명(銘)을 세겨 천만년(千萬年) 길이 전(傳)하리라.

대제학 조광빈 짓고

판부사 유척기 전서를 쓰고

지의금 홍봉조씀

【註】 ① 간적; 계(契)의 어머니 玄鳥(제비)의 난(卵)을 먹고 계(契)을 잉태(孕胎)하여 낳았는데 계(契)이 요순(堯舜)을 보좌(補佐)하여 사도가 되어 백성을 교화(敎化)한 공(功)으로 상(商)에 봉(封)하였는데 후(後)에 은(殷)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② 강원(江源); 후직(后稷)의 어머니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孕胎)하여 낳았는데 불상(不祥)하다하여 골짜기에 버렸더니 우마(牛馬)가 밟지 않고 피하여 개천의 얼음 위에 버렸더니 새(鳥)가 와서 품어 줌으로 거두어 길렀는데 성장(成長)하여 나무심기를 좋아하여 농사짓기를 즐기므로 제요(帝堯)의 농사(農師)가 되어 후직(后稷)이라 호(號)하고(처음에 버렸다해서 이름은 棄) 마침내 주(周)의 시조(始祖)가 되다. ③ 서여(西旅)의 오; 여(旅)는 서방(西方)의 만족(蠻族)인데 주무왕(周武王)에게 오(오;큰개)를 공물(貢物)로 바쳤다.

전거(典據)--영명재지(永明齋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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