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문유사(允文遺事)
공의휘는 윤문이요,자는 질천이니 삼중대광보문각대제학 에 밀성군이다,
고(아버지)의 휘는 원이요,판전교시사에 밀성군으로 황증 문화찬성사 이다, 조(할아버지)의 휘는 성진이요 조현대부로 흥성가의 청남장군으로 고려 충렬왕 6년에 부장군으로 상장군인 박지량과 같이 군사 이만오천을 거너리고 일본정벌로같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실이 고려사에서 볼수있고 고려조의 명인으로 밀성 읍지와 동국여지승람의 인물고에 공(휘성진)의 이름이 첯머리에 실려있으며 또한 일본정벌사기에도 실려있다,
증조할아버지의 휘는 척이요 삼중대광 밀성군이다,
공(휘 척)이 지평으로서 부모상을당하여 복천에서 시모살이를 할적에 예절에 따라,집행함이 매우건실하여서경까지 소문이나니 한시대의 고관선비들이 그효행을 친찬하여 아름다운일로서 가정재집과 청구집(책)에서 볼수있다,
충목왕 원년 1345년에 서면을 설직하고 문사삼십인을 선발하여 날짜를 바꾸어 가며 시두할적에 공은 기거량으로서 주찬하여 저술한 문장이 많이 동문선에 실려있다,
배(부인)는 해양군부인으로 광산김씨이니 험의 정승으로 치사(선비의뜻을 이름)한 문정공 호 결흔인 태현의 여(女)이다,
아들은 휘밀양이니 봉순대부로 판전교시사(전법판서)요, 다음은 대양이니 랍착고인으로 삼중대광 전법판서로 진희관의 대제학이요,
삼남은 소양이니 진사로 널리천하를 관람하러 중국에들어가 돌아오지 못한 사실이 목은(이색)집에서 볼수있다,
사남은 삼양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다,
다섯째가 계양이니계명(그시대에 불리워지던 이름)은 돈지요, 정헌대부로 험교 참찬에 의정부사이다,
장위량으로 극밀원사이다,
부인의 묘지는 포은 정몽주 문충공이 찬술하고 십일대손인 신이 동래부사로 있을때 배석과 망주석을갖추고 십이대손인 중규가 성주목사로 있을때 다시세웠다,
후손 진우, 근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