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123권에 졸옹 최해가 지은 할아버지의 묘지(墓誌) 국역문입니다
고 밀직부사 치사 박공 묘지(故密直副使致仕朴公墓誌)
공의 휘는 화(華)요, 성은 박씨이니, 선대는 밀성군(密城郡)이 본향이다. 증조부 기보(奇輔)가 일찍이 중군녹사(中軍錄事)로서 나랏일로 죽었는데, 벼슬이 대관전 직(大觀殿直)에 이르고 모관을 증직 받았으며, 조부 공승(拱升)은 작고한 위위주부동정(衛尉注簿同正)인데 위위 승(衛尉丞)을 증직받았다. 아버지 성(誠)은 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인데, 예빈 윤(禮賓尹)을 증직받았으며, 예빈부군(禮賓府君)이 음죽(陰竹) 안씨(安氏)의 딸 봉작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으니, 이때는 원조(元朝) 헌종(憲宗) 황제 2년(고려 고종 39년) 임자년이었다.
지원(至元) 15년(충렬왕 4년)에 전리사 서원(典理司書員)을 거쳐 전주 임피현위(全州臨陂縣尉)가 되었으며, 관품에 따르지 않고 내시(內侍)로 들어가서 여러 해 근로하면서 판적요직 공역사온서령자운방판관(板積窯直供驛司醞署令紫雲坊判官)을 역임하였다. 지대(至大) 3년(충선왕 2년)에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고 나가서 경상도 안찰사가 되었는데, 여러 고을을 검열하며 쌓인 문서를 적발하여 숨김이 없어서 탄핵을 입은 자가 눈을 흘겼으며, 도리어 공격을 입어 면직되었다. 연우(延祐) 3년 (충숙왕 3년)에, 장자 인간(仁幹)이 태위심왕(太尉瀋王 충선왕)의 관부에 부름받아 나가 공도 등용되어 선부 산랑(選部散郞)으로 나가서 경원부(慶原府) 수령이 되었다가 마침내 치사하였다. 태정(泰定) 원년(충숙왕 11년)에 인간이 태위왕(太尉王)을 따라 토번(吐藩)에서 돌아오니, 이때에 또 등용되어 광주 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에 통헌대부(通憲大夫)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으로 치사하였다. 후지원(後至元) 2년(충숙왕 복위 2년) 정월 12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85세였으며 3월 8일에 서울[王京] 동쪽 대덕산(大德山) 감은사(感恩寺) 북쪽 산록에 장사 지냈다.
부인 조씨(趙氏)는 김제군(金堤郡)을 봉하였는데, 작고한 정승 문양공(文良公) 휘 간(簡)의 누님이 되며, 공보다 4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자녀는 아들 다섯 딸 둘이다. 인간은 경자년 과거에 급제하고 또 을묘년 응거시(應擧試)의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진성병의익찬공신(盡誠秉義翊贊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로 현임 한양 부윤(漢陽府尹)이다. 인지(仁祉)는 신미년에 과거하여 사설서 영(司設署令)이 되었고, 인기(仁杞)는 좌우위 산원(左右衛散員)이며, 인익(仁翊)은 군부좌랑(軍簿佐郞)이며, 인우(仁宇)는 을묘년에 과거하여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가 되었다. 딸 둘은 중문 지후(中門祗候) 유소(柳韶), 판도 좌랑(版圖佐郞) 서평(徐玶)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남자가 여섯, 여자가 둘이 있다.
공은 천성이 공손 근면하고 일에 임하여서는 오직 조심스럽게 하며 구함에 청렴하였다. 집에서 여러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는 대체로 자상하게 하였는데, 반드시 학문을 하도록 권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이 없으면 무엇으로 처세하겠느냐.” 하였다. 그렇지만 허물이 있으면 또 엄하게 절실한 책망을 더하였다. 때문에 다섯 아들이 교훈을 이어서 받들어 감히 게으르고 소홀히 하지 않았으므로 세 명이 과거에 오르게 되었으며 모두 어질고 능한 것으로 칭찬을 받았다. 그 중 장자 공은, 선왕을 먼 이역 땅에 수행하여 온갖 험난을 치르면서도 한 마음으로 몸을 잊고 수고하여 마침내 공명을 성취하였으니, 이는 어버이가 가르친 옳은 방도가 일찍부터 격동하여 이룬 것이었다. 공이 젊어서 벼슬자리에 나가면서 비록 낮게 돌며 통달하지 못하였지만, 만년에는 아들이 귀하여지므로 높은 자리와 후한 녹봉을 얻어서 지내게 되었으며, 나이 90이 되어서 세상을 마쳤다. 또 더 많이 바랄 것이 있겠는가. 내가 들으니, 나랏 일로 죽은 자는 그 후손이 반드시 크게 된다고 하였는데 역시 그 선대의 보응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