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 완판 현대어본
1. 성대퇴기(聖代退妓)숙종대왕(肅宗大王,19대) 즉위 초에 성덕이 넓으시사 성자성손(聖子聖孫)은 계계승승하사, 금고옥적(金鼓玉笛)은 요순(堯舜)의 태평시절이요, 의관과 문물은 우(禹)임금과 탕(湯) 임금의 버금이라, 좌우 보필은 주석지신(柱石之臣-중임의 대신)이요, 용양호위(龍양虎衛-무관 정3품)의 각위(各衛)에는 간성지장(干城之將)이라.
조정에 흐르는 덕화, 향곡(鄕曲)에 퍼졌으니 사해에 굳은 기운이 원근에 어리어 있더라. 충신은 조정에 가득하고 효자와 열여는 가가재(家家在)라. 미재미재(美哉美哉-아름답도다)라. 우순풍조(雨順風調)하니 함포고복(含哺鼓腹) 백성들은 처처에 격양가(擊壤歌)라.
이때에 남원부(南原府)에 월매(月梅)라 하는 기생이 있으되,삼남의 명기로서 일찌기 퇴기하여 성(成)씨라는 양반을 데리고세월을 보내되, 나이 바야흐로 사십이 넘었으나 일점 혈육이 없어 이로 한이 되어 장탄수심(長歎愁心)의 병이 되겠구나.
일일은 크게 깨쳐 옛사람을 생각하고 남편을 청입하여 공손히하는 말이, [들으시요. 전생에 무슨 은혜를 끼쳤던지 이 생에 부부되어, 창기 행실 다 버리고 예모도 숭상하고 길쌈도 힘썼건만 무슨 죄가 이리 많아 일점 혈육 없으니, 육친무족(六親無族) 우리신세 선영(先塋)의 향화 뉘 받들며, 죽은 뒤의 감장(監葬)을 어이하리. 명산대찰(名山大刹)에 불공이나 도드리어 남녀간 낳기만하면 평생의 한을 풀 것이니 당신의 뜻은 어떠하시오.]성참판 하는 말이, [일생 신세 생각하면 자네 말이 당연하나, 빌어서 자식을 낳을진댄 자식 없을 이 뉘 있으리오.]하니 월매 다답하되, [천하 대성 孔子님도 이구산(尼岳山)에 빌으시었고, 정나라 정자산(鄭子産)은 우형산(右荊山)에 빌어서 낳았으며, 우리동방의 강산을 이룰진대 명산대찰이 없을소냐. 경상도 웅천(熊川)의 주천의(朱天儀)는 늙도록 자녀 없어 최고봉(最高峰)에 빌었더니 대명천자(大明天子) 나 계시사 대대명천지 밝았으니 우리도 정성이나 드려 보사이다. 공든탑이 무너지며 심은 나무가 꺾일손가.]
2. 선아환생(仙娥幻生) 이날부터 목욕 재계 정히 하고 명산승지 찾아갈 때 오작교(烏鵲橋) 썩 나서서 좌우 산천 둘러보니, 서북의 교룡산(蛟龍山)은 서북방을 막아 놓고, 동으로는 장림(長林-숩 이름) 수풀 깊은 곳에 선원사(禪院寺) 은은히 보이고, 남으로는 지리산이 웅장한데, 그 가운데 요천수(蓼川水)는 일대장강 푸른 물 되어 동남으로 둘렸으니 별유 건곤(乾坤)이 여기로다.
푸른 숲을 더위 잡고 산수를 밟아 들어가니 지리산이 예였구나. 반야봉 올라서서 사면을 둘러보니 명산대천이 완연하다. 상봉에 단을 모아 재물을 차려 놓고, 단 아래 엎드려서 천신만고 빌었더니, 산신님 덕이신지 이때가 오월오일 갑자시 였는데, 한 꿈을 얻었으니 서기(瑞氣) 서리면서 오색이 영롱하더니 일위선녀가 청학을 타고 오는데, 머리에는 화관(花冠)이요, 몸에는 고은 옷을 입었다. 월패(月佩)소리 쟁쟁하고, 손에 계화(桂花) 한 가지를 들고 당에 올으며 손 들어 길게 읍하고 공손히 여짜오되, [낙포(洛浦-낙수의 여신)의 딸이었는데 하늘 복숭아를 진상코자 옥경(玉京-玉帝의 수도)에 나아갔다가 광한전에서 적송자(赤松子-仙人이름)를 만나 정회를 다 풀지 못하고 있을 지음,때에 늦었음이 죄가 되어 옥황상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인간세계로 내쫓으시매 갈 바 아지 못하였더니,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의 이명) 신령께서 부인댁으로 지시하기로 왔아오니 어여뻐 여기소서.]
하며 품으로 달려들새, 학의 높은 울음소리는 그의 목이 긴 까닭이라 학의 울음에 놀라 깨니, 실로 남가일몽(南柯一夢-허왕된 꿈)이라.
황홀한 정신을 진정하여 바깥양반과 꿈 이야기를 말하고, 천행으로 남아가 태어날까 기다렸더니 과연 그 달부터 태기 있어 열달이 차매, 하루는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며 오색 구름이 빛나는데 혼미한 가운데 애기를 낳으니 한날의 구슬 같은 딸이더라. 월매의 일구월심 그리던 마음에 아들은 이니지만 그만한 대로 소원을 이룬 셈이더라. 그 사랑하는 정경은 어찌 다 말하리오. 이름을 춘향(春香)이라 부르면서, 손에 잡은 보옥같이 길러내니 효행이 비길데 없고 어질고 착하기 기린과 같더라. 칠팔세가 되매 글 읽기에 마음을 붙여 예모정절(禮貌貞節)을 일삼으니, 춘향의 효행을 남원읍이 칭송치 않은 이 없더라.
이때 삼청동(三淸洞) 이한림(李翰林)이라는 양반이 있었으니, 그때의 명가요 충신의 후손이라.
하루는 전하께옵서 충효록(忠孝錄)을 올려 보시고, 충신과 효자를 가리어내시어 지방관으로 임명하시는데, 이한림으로 하여금 과천(果川) 현감에사 금산(錦山) 군수를 재수하시었다가 다시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제수하시니, 이한림이 사은하여 절하며 임금을 하직하고 내행을 데리고 남원부에 도임하여 민정을 살피니, 사방에 일이 없고 지방의 백성들은 더디 옴을 칭송하더라. 태평세월을 노래하는 노랫가락이 들리어 오고 시화풍년(時和豊年)하고 백성이 효도하니 중국의 요(堯)임금 순(舜)임금 시절이라.
이때는 어느 때냐하면 놀기 좋은 화창한 봄날이라. 제비와 나는 새들은 서로 수작하고 짝을 지어 쌍쌍이 날아들고 온갖 춘정(春情)을 다투는데, 남산에 꽃이 피니 북산도 붉어졌다.
천사만사(千絲萬絲)의 수양버들 가지에 꾀꼬리는 벗을 부른다. 나무와 나무는 숲을 이루고 두견새 접동새는 다 지나가니 일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
3. 방자경설(房子景說) 이때 사또 자제 이도령이 나이가 이팔이요, 풍채는 탕나라의 잘 생긴 시인 두목지(杜牧之)와 같고, 도량은 푸른 바다와 같고, 지혜는 활달하고, 문장은 이태백(李太白)이요 글씨는 왕의지(王義之)와 같았다. 하루는 방자를 불러 말하되, [이고을애 경치 좋은 곳이 어데냐? 시흥과 춘흥(春興)이 도도하니 절승경치를 말하여라.] 방자놈이 여쭙기를, [글공부 하시는 도련님이 경치를 찾음은 부질없소.] 이도령이 이르는 말이, [너 무식한 말이다. 옛날로부터 이 고장 문장재사가 절승한 강산을 구경하는 것은 풍월과 글짓는 데 근본이 되는 것이다. 신선도 두루 돌아 널리 보니 어이하여 부당하냐? 사마장경(司馬長卿)같은 인물은 남으로 강회(江淮)에 떴다가 큰 강을 거슬러 올라갈 제 미친 물결 거센 파도에 음풍(陰風) 부르지즘 예로부터 가르치니, 천지간 만일의 병화가 놀랍고 아름다운 것이 글 아닌 게 없다. 시중천자(詩中天子) 이태백은 채석강(采石江)에서 놀고 있으매 적벽강(赤璧江) 추야월에서 소동파(蘇東坡)가 놀고 있고, 심양강 달 밝은 밤에 백낙천(白樂天)이 놀고 있고, 보은(報恩) 속리산 무장대(文章臺)에 세조대왕 노셨으니 아니 놀지 못하리라.] 이때 방자, 도련님 뜻을 받아 사방 경치를 말하되, [서울로 이를진댄 자문(紫門) 밖에 내달아 칠성암, 청련암(靑蓮庵), 세검정과 평양의 연광정(練光亭), 대동루(大同樓), 모란봉, 양양의 낙산사, 보은 속리(俗離), 문장대, 안의(安義) 수승대(搜勝臺), 진주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가 어떠한지 모르나 전라도로 이를진대 태인(泰仁)의 평양정(平壤亭), 무주의 한풍루(寒風樓), 전주의 한벽루(寒碧樓) 좋사오나, 남원의 경치 들어보십시오. 동문 밖에 나가오면 관왕묘(關王廟)는 청고영웅 엄한 위풍 어제 오늘 같사옵고, 남문 밖에 나가오면 광한루(廣寒樓),오작교,영주각(瀛州閣)이 좋사옵고, 북문 밖에 나가오면 푸른 하늘에 금부용 꽃이 빼어나 괴팍하게 웃득 섰으니 기암(奇巖)둥실 교룡산성(蛟龍山城) 좋사오니 처분대로 하사이다.]
되련님 이르는 말씀, [이애야, 네 말을 들어보니까 광한루와 오작교가 절경인 모양이로구나, 그리로 구경 가자.] 도련님 거동 보소, 사또 앞에 들어가서 공손히 말씀하시기를 , [오늘 날씨 화창하오니 잠간 나가 풍월이나 읊겠사오며 시의 운(韻)이나 생각하고저, 성이나 한바퀴 돌아보고 오겠나이다.]
사도 크게 기뻐하시며 허락하시되, [남주(南州)풍물을 구경하고 돌아오되 시제(詩題)를 생각하여라.] [아버님 가르치시는 대로 하오리다.] 물러 나와, [방자여, 나귀 안장 지어라.]
4. 호화치장(豪華治裝) 방자 분부 듣고 나귀에 안장 짓는다. 나귀에 안장 얹을 때 붉은 실로 만든 굴레와 좋은 채찍과 좋은 안장, 아름다운 언치, 황금으로 만든 자갈 청홍사 고운 굴례며 주락상모(珠絡象毛)를 덤썩 달아 층층 다래 은잎 등자 호피(虎皮) 돋음의 전후걸이 줄방울을 염불법사(念佛法師) 염주 매듯 하여 놓고는 [나귀 등대하였소.]
도련님 거동 보소. 옥안 선풍(仙風) 고운 얼굴, 전판(剪板) 같은 채 머리, 곱게 빗어 밀기름에 잠재와 궁초댕기 석황 물려 맵시 있게 잡아 땋고, 성천수주(成川水紬) 접동베 세백저(細白苧) 삼침바지, 극상세목(極上細木) 겹버선에, 남갑사 대님 치고, 육사단(六紗緞) 겹배자 밀화단추 달아 입고 통행전을 무릅 아래 늦추 매고, 영초단(影초緞) 허리띠, 모초단(毛초緞)도리낭(주머니의 일종), 당팔사 갖은 매듭 고를 내어 늦추 매고, 쌍문초(雙紋초) 긴동정, 중추막에 도포 받쳐 흑사띠를 가슴 위로 놀러 매고 육분당혜(肉粉唐鞋) 끄을면서, [나귀를 붙들어라!]
등자 딛고 선뜻 올라 뒤를 싸고 나오실 때, 금물 올린 호당선(胡唐扇)으로 일광을 가리우고, 관도(官道) 성남 넓은 길에 생기 있게 나갈 때, 취하여 양주(楊州)에 오던 杜牧之의 풍채런가. 시시오불(時時誤拂)하던 주랑(周郞)의 고음(顧音)이라, 향가자백(香街紫栢)은 춘성(春城)안이요. 성안 백성 보는 자 뉘 아니 사랑하랴.
광한루에 얼른 올라 사면을 살펴보니 경개가 장히 좋다. 적성(赤城-순창의 지명) 아침날의 늦은 안개 끼어 있고, 녹수(錄樹)의 저문 봄은 화류동풍(花柳東風) 둘러 있다. 붉은 누각에 해 비치고 벽방(壁房)과 금전(錦殿)이 서로 영롱하여 임고대(臨高臺)를 일러 있고, 다락마루가 드높음은 광한루를 두고 하는 말이로다. 악양루(岳陽樓) 고소대(姑蘇臺)와 오초(吳楚)의 동남수(東南水)는 도정호(洞庭湖)로 흘러가고, 연자(燕子-중국 누가 이름)서북의 팽택(彭澤-중국 지명)이 완연한데, 또한곳 바라보니 백백홍홍이 난만한 속에서 앵무 공작이 날아들고, 산천 경개 둘러보니예구분반(蘂丘粉畔) 송솔 떡갈잎은 아주 춘풍을 못 이기어 흐늘흐늘, 폭포유수 시냇가의 계변화(溪邊花)는 빵긋빵긋, 낙낙 장송은 울창하고 녹음과 향기로운 잡초가 봅꽃보다 나을 때로구나. 계수나무, 자단(紫壇) 모란, 벽도(碧桃)에 취한 사색, 장천 요천(蓼川-남원 남쪽을 흐르는 강) 풍덩실 잠기어 있고, 또한 곳 바라보니 어떠한 여인이 봄새 울음과 같은 자태로 온갖 춘정 이기지 못해 두견화 질끈 꺾어 머리에도 꽂아 보며, 함박꽃도 질근 꺾어 입에 담쑥 물어 보고, 옥수 남사(羅衫) 반만 걷고 청상유수맑은 물에 손도 씻고 발도 씻고 물 마시며 양치하며 조약돌 덥석 쥐어 버들가지 꾀꼬리를 희롱하니, 꾀고리를 깨워 일으킨다는 옛 시가 이 아니냐. 버들잎도 주루룩 훑어, 물에 훨훨 띄워 보고 백설같은 흰 나비 웅봉자접(雄峰雌蝶)은 꽃 수염 물고 너울너울 춤울 춘다. 황금 같은 꾀꼬리는 숲숲에 날아든다.
5. 작교풍류(鵲橋風流) 광한 진경(眞景) 좋거니와 오작교가 더욱 좋다. 바야흐로 이르되 호남의 제일성(第一城)이라 하겠다. 오작교가 분명하면 견우직녀 어데 있나? 이런 승지(勝地)에 풍월이 없을소냐. 도련님이 글을 두 귀를 지었으니, 드높고 밝은 오작의 배에 광한루 옥섬돌 고운 다락이라 누구냐 하늘 위의 직녀란 별은 흥 나는 오늘의 내가 견우일세 (高明烏鵲船 廣寒玉階樓 借問天上誰織女 至興今日我牽牛) 이때 내아(內衙)에서 잡술상이 나오거늘 한잔 술 먹은 후에 통인 방자에게 물려주고, 취흥이 도도하여 담배 피워 입에다 물고이리저리 거닐 적에, 경처(景處)애 흥을 재워 충청도 곰산(熊山), 수영(水營) 보령암(寶蓮庵)을 자랑한댔자 이곳 경치를 당할 수 있으랴. 붉은 단(丹), 푸른(靑), 흰색(白), 붉을 홍(紅), 고몰고몰이 단청(丹靑) 버드나무 꾀꼬리가 짝 부르는 소리는 내 춘흥(春興)을 도와준다. 노랑벌 흰니비 황나비도 향기 찾는 거동이다. 날아가고 날아오니 춘성(春城)의 안이요, 영주(瀛州-삼신산)는 바야흐로 봉래산(蓬來山)이 눈아래 가까우니, 물은 본시 은하수요, 경치도 잠깐 천상 옥경(玉京)과 같다. 옥경이 분명하면 월궁(月宮)의 항아(姮娥-월중선녀)가 없을소냐.
이때는 춘삼월이라 일렀으되, 오월 단오일이렸다. 일년 가운데 제일 좋은 시절이다. 이때 월매 딸 춘향이도 또한 시서음율(詩書音律)이 능통하니, 천둥절(天中節-단오)를 모를소냐. 그네를 뛰려고 향단이를 앞세우고 내려올 때, 난초같이 고은 머리, 두 귀 늘러 곱개 땋아 금봉(金鳳)비녀를 바로 꽂고 비단치마 두른 허리 다 피지 아니한 버들들이 힘 없이 드리운 듯, 아름답고 고운 태도로 아장거려 흐늘거리며 가만가만 다닐 적에 장림(長林) 속으로 들어가니, 녹음방초 우거져 금잔디 좌르륵 깔린 곳에 황금 같은 꾀꼬리는 쌍쌍이 오고 갈제, 백자 길이로 높이 매고 그네를 뛰려할 제 수화유문(水禾榴紋)초문장옷, 남방사 홑단치마 훨훨 벗어 걸어두고, 백장사 진솔속곳 턱밑에 훨씬 추고, 연숙마 그네줄을 섬섬옥수(여자의손) 넌짓 들어 양수에 갈라 잡고, 백릉버선 두 발길로 살짝 올라 발 구를 제, 세류 같은 고운 몸이 단정히 노니는데 뒤단장 옥비녀 은죽절(銀竹節)과 앞치례 볼 것 같으면 밀화장도(密花粧刀), 옥장도며 광원사(비단이름) 겹저고리 제색 고름이 모양이 난다.
[향단아 밀어라!] 한 번 힘을 주어 두 번을 굴러 힘을 주니 발밑의 가는 티끝 바람 따라 펄펄, 앞뒤 점점 멀어가니 머리 위의 나뭇잎은 몸을 따라 흔들흔들. 오고 갈 제 살펴보니 녹음 속의 붉은 치마자락이 바람결에 내비치니, 구만장천(九萬長天) 흰구름 속에 번개불이 비치는듯 문득 보면 앞에 있더니 문득 다시 뒤에 있네. 앞에 얼른 하는 양은 가벼운 저 제비가 도화일점(桃花一點), 떨어질제 차려하고, 쫓아가듯 뒤로 번듯하는 양은 광풍에 놀란 나비 짝을 잃고 날아가다 돌치는듯, 무산선여(巫山仙女-중국의 초나라왕이 만났다는 선여) 구름 타고 양대(陽臺) 위에 내리는듯, 나뭇잎도 물어보고 꽃도 질근 꺾어 머리에다 실근실근 하며, [이애 향단아! 그네 바람이 독해서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그네를 붙들어라.] 붙들려고 무수히 진퇴하며 한창 이렇게 노닐 적에, 시냇가 반석 위에 옥비녀 떨어져 쟁그렁 소리나니, [비녀 비녀!]하는 소리, 산호체(산호로 만든 머리꽂이)를 들어 옥소반을 깨치는듯, 그 태도 그 형용은 세상인물 아니로다. 춘향전(6)...物各有主제비는 삼춘(三春)에 날아오고 날아가자, 이도령 마음이 울적하고 정신이 어찔하여 별 생각이 다 나는 것이다.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오호(五湖-중국 太湖근방의 5개 호수)에 편주를 타고 범소백(范小伯-吳나라를 멸하고 西施湖에서 사라졌다.)을 쫓았으니, 서시(西施)도 올 리 없고, 해성(垓城) 달밤에 슬픈 노래로 패왕을 이별하던 우미인(虞美人)도 올 리 없고, 단봉궐(丹鳳闕) 하직하고 백룡퇴로 간 연후에 독류청총(獨留靑塚)하였으니 왕소군(王昭君)도 올 리 없고, 장신궁(長信宮) 깊이 닫고, 백두음(白頭吟)을 읊었으니 반첩여(班첩女)도 올 리 없고, 소양궁(昭陽宮) 아침 날에 시중들고 돌아오니 조비연(趙飛燕)도 올 리 없다. 낙포(洛浦)의 선녀란 말인가 무산(巫山)의 선녀란 말인가.] 도런님은 혼이 중천에 날아 일신이 고단하다. 진실로 미혼지인(未婚之人)이로다.
[통인(通仁)아!] [예!] [저 건너 화류중에 오락가락 희뜩희뜩 얼른얼른 하는게 무엇인지 자세히 보고 오라.] 통인이 살펴보고 말하기를, [다른 무엇이 아니오라, 이 고을 기생이던 월매란 사람의 딸 춘향이란 계집아이입니다.] 도런님이 엉겁결에 하는 말이, [장히 좋다. 훌륭하다.] 통인이 말하기를, [제 어미는 기생이오나 춘향이는 도도하여 기생구실 마다하고 백화쵸엽(百花草葉)에 글자도 생각하고, 여공재질(女工才質)이며 문장을 겸전(兼全)하여 여염집 처자와 다름이 없나이다.] 도령이 허허 웃고 방자를 불러서 분부하기를, [들은즉 기생의 딸이라니 급히 가 불러오라.] 방자놈이 대답하기를, [흰 눈 같은 살결에 꽃 같은 얼굴이 남방에 유명키로 방첨사(方僉使-관찰사의 별명) 병부사(兵府使), 군수, 현감, 관장(官長)님네 엄지 손가락이 두 뼘 가웃씩 되는 양반 외입장이들도 무수히 보려하되, 장강(莊姜-周文王의 어머니)의 색과 임사(任사)의 덕행이며, 이두(李杜-李太白과 杜甫)의 문필이며 태사(太사)의 화순하는 마음과 이비(二妃)의 정절을 품었으니, 금천하의 절이요, 만고 여중(女中)의 군자이오니 황공하온 말씀으로 함부로 다루기 어렵내다.]
도령이 대소하고, [방자야, 네가 물건이란 각각 주인이 있음을 모르느냐? 형산(荊山-중궁의 옥 산지)의 백옥과 여수(麗水-중국의 금산지)의 황금이 임자가 각각 있느니라. 잔말 말고 불러오라.]청조전신(靑鳥傳信)방자 분부를 듣고 춘향 초래 건너갈 때에, 맵시 있는 방자녀석 서왕모(西王母-중국 구대의 선녀) 요지의 잔치에 편지 전하던 청조(靑鳥)같이, 이리저리 건너가서, [여봐라 이애 춘향아.]하고 부르는 소리에 춘향이 깜짝 놀라, [무슨 소리를 그 따위로 질러 사람의 정신을 놀라게 하느냐] [이애야 말 말아라, 일이 났다.] [일이란 무슨 일?] [사도 자제 도련님이 광한루에 오셨다가 너 노는 모양 보고 불러 오란 영이 났다.] 춘향이 화를 내어, [네가 미친 자식이다. 도련님이 어찌 나를 알아서 부른단 말이냐? 이 자식 네가 내 말을 <종달새가 열씨 까듯>하였나 보다.] [아니다. 내가 네 말을 할 리 없으되, 네가 그르지 내가 그냐. 너 그른 내력을 들어 보아라. 계집아이 행실로 추천을 할 양이면 네 집 후원 담장 안에 줄을 매고, 남이 알까 모를까 은근히 매고 추천하는 게 도리가 당연하다. 광한루 머지 않고 또한 이곳을 논할진대 녹음방초 승화시라, 방초는 프르른데 버들이 초록장 두르고 뒷내의 버들은 유록장 둘러 한가지 늘어지고, 또 한가지 펑퍼져 광풍이 겨워 흐늘흐늘 춤을 추는데 광한루 구경처에 그네를 매고 네가 뛸제 외씨 같은 두 발길로 백운간에 노닐적에 홍사자락 펄펄, 백방사(白紡絲) 속옷가래 동남풍에에 펄렁펄렁, 박속 같은 네 살결이 백운간에 희뜩희득, 도련님이 보시고 너를 부르실제 내가 무슨 말을 한단 말이냐. 잔말말고 건너 가자.] 춘향이 대답하되, [네 말이 당연하나 오늘이 단오일이다. 비단 나 뿐이랴. 다른집 처자들도 예서 함께 추천 하였으며 그럴 뿐 아니라 또 설혹 내 말을 할지라도 내가 지금 기적에 있는 바도 아니거늘 여염 사람을 함부로 부를 일도 없고, 부른대도 갈 리도 없다. 당초에 네가 말을 잘못 들은 모양이다.]
방자 경우에 빠져 광한루로 디시 돌아와 도련님께 여짜오니 도련님 그 말 듣고, [기특한 사람이다. 말인즉 바른 말이로되 다시 가서 말을 하되 이리이리 하여라.]춘향전(8)...월태화용(月態花容) 방자 전갈 모아 춘향에게 건너가니 그 사이에 제집으로 돌아갔거늘, 저의 집을 찾아가니 모녀간 마주앉아 점심이 방장이라. 방자 들어가니 [너 왜 또 오느냐?] [황송타, 도련님이 다시 전갈하시더라. <내가 너를 기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들으니 네가 글을 잘 한다기로 청하는 것이니, 여염집에 있는 처녀 불러보는 것이 소문에 괴이하기는하나, 험으로 아지 말고 잠깐 와 다녀 가라>하시더라.]
춘향이 도량한 뜻 연분되랴고 그랬던지, 홀연히 생각하니 갈 마음이 나되 모친의 뜻을 몰라 묵묵히 한참이나 말 않고 앉았더니, 춘향모 썩 나 앉으며 정신 없게 말하되, [꿈이라 하는 것이 아주 전혀 허사가 아닌 모양이다. 간밤에 꿈을 꾸니 난데 없는 청룡 한마리 벽도못(碧桃池)에 잠겨 보이기에 ,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까 하였더니,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들으니 사또 자제 도런님이 이름이 몽룡이라 하니 꿈몽자 용용자 신통하게 맞추었다. 그러나 저러나 양반이 부르신데 아니 갈 수 있느냐. 잠깐 가서 다녀오라.] 춘향이 그제서야 못 이기는 체하고 겨우 일어나 광한루로 건너갈제 대명전 대들보에 명매기 걸음으로, 양자 마당의 씨암닭 걸음으로, 백모래밭에 금자라 걸음으로, 월태화용(月態花容) 고운 태도 연보로 건너갈 제 흐늘흐늘 월나라의 서시가 토성보습(土城習步)하던 걸음으로 흐늘거려 건너올 제, 도런님 난간에 절반만 비껴서서 폈다 굽혔다 하며 바라보니 춘향이가 건너오는데, 광한루에 가까와진지라 도련님 좋아라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요요정정(妖妖貞靜)하여 월태화용이 새상에 무쌍이고, 얼굴이 조촐하니 청강에 노는 학이 설월(雪月)에 비친 것 같고, 붉은 입술과 흰 이가 반쯤 얼리니 별 같기도 하고 구슬 같기도 하다. 연지를 품은듯 아래 위로 고운 맵시 어린 안개 석양에 비치는 듯, 푸른 치마 아롱지니 무늬는 은하수의 물결과 같다. 연보(蓮步)를 정히 옮겨 천연히 다락에 오라 부끄러이 서 있거늘 통인 불러, [앉으라고 일러라.]
춘향이 고운 태도 얼굴을 단정히 하여 앉은 모습 자세히 살펴보니 백석(白石) 창파 새로 낵린 비 뒤에 목욕하고 앉은 제비 사람을 보고 놀라는듯, 별로 단장한 일 없이 천연한 국색(國色)이라. 옥안을 상대하니 구름 사이의 명월과 같고, 붉은 입술을 반쯤 여니 수중의 연꽃과 흡사하다. 신선은 내 알 수 없으나 영주에서 놀던 선녀가 남원에 귀양와서 사니, 월궁에 모여 놀던 선녀가 벗 한 사람을 잃었구나. 네 얼굴 네 태도는 새상 인물 아니로다. 춘향전(9)...李成之合 이 때 춘향이 추파를 잠깐 들어 이도령을 살펴보니, 이세상의 호걸이요, 진세(塵世)의 기남자였다. 이마가 높았으니 소년공명 할 것이고, 이마와 턱과 코와 좌우의 광대가 조화를 이루었으니 보국 충신 될 것이니, 마음에 흠모하여 아미를 숙이고 무릎을 여미며 단정히 앉을 뿐이었다.
이도령이 입을 열어, [성현도 성이 같으면 장가가지 않는다 하였으니, 네 성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이뇨.] [성은 성씨옵고 나이는 열 여섯이로소이다.] 이도령의 거동 보라.
[허허 그말 반갑구나. 네 나이 들어보니 나와 동갑 이팔이요, 성씨를 들어보니 나와 천정연분 분명하고나. 이성지합(李成之合) 좋은 연분 평생 동락하여 보자, 너의 부모 다 게시냐?] [편모 슬하로소이다.] [몇 형제나 되느냐?] [육십당년 나의 모친 무남독녀 나 하나요.] [너도 남의 집 귀한 딸이로구나. 천정하신 연분으로 우리 둘이 만났으니 만년락(萬年樂)을 이뤄 보자.] 춘향이 거동 보라. 눈섭을 쯩그리며 붉은 입을 반쯤 열어, 가는 목쪽을 겨우 열고 옥성(玉聲)으로 말하는 것이렸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느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 다는 데, 도런님은 귀공자요 소녀는 천첩이오라, 한번 정을 맡긴 연후에 인하여 버리시면 일편단심 이내마음 독수공방 홀로 누어 우는 한은 이내 신세 내 아니면 누가 알랴, 그런 분부 다시는 마옵소서.] 이도령 이른 말이, [네 말 들어보니 어이 아니 기특하랴. 우리 둘이 인연 맺을 때 금석(金石) 맹약 맺으리라. 네 집이 어데냐?] 춘향이 여짜오되, [방자 불러 물으소서.] 이도령 허허 웃고, [내 너드러 묻는 말이 허황하고나! 방자야!] [예!] [춘향의 집을 네 일러라.] 방자 손을 넌지시 들어 가리키는데, [저기 저 건네, 동산은 울울하고 연못은 청정한데, 양어생풍(養魚生風)하고 그 가운데 기화요초(琪花瑤草-仙界의 화초) 난만하여 나무 나무에 앉은 새는 호사를 자랑하고 바위 위의 굽은 솔은 청풍이 건듯 부니 늙은 용이 꿈틀거리는 듯, 집앞의 버드나무 유사무사(有絲無絲) 같은 양류 가지요, 들축 죽백 전나무며, 그 가운데 은향나무는 음양을 따라 마주 서고, 초당 문전에 오동, 대추나무, 깊은 산중 물푸레나무, 도포, 다래, 으름 덩굴 휘휘친친 감겨 담장 밖에 우뜩 솟았는데 송정(松亭) 죽림 두 사이로 은은히 보이는 것이 춘향의 집이오이다.] 도련님 이른 말이, [장원(墻苑)이 정결하고 송죽이 울울하니 여자의 절개 행실을 가히 알 만하고나.] 춘향이 일어나며 부그러이 말하기를, [시속 인심 고약하니 그만 놀고 가겠내다.] 도련님 그 말 듣고, [기특하다. 그럴 듯한 일이로다. 오늘 밤 퇴령(退令) 후에 너의 집에 갈터이니 괄시나 부디 마라.] 춘향이 대답하되, [나는 몰라요.] [네가 모르면 쓰겠느냐. 잘 가거라. 금야에 상봉하자.] 누각에서 내려 건너가니 춘향모 마중 나와, [애고 내 딸 이제 다녀오냐. 그래 도련님이 무엇이라 하시드냐?]
[무엇이라 하여요. 조금 ㅁ았다가 가겠노라 하고 일어나니, 오늘 밤에 우리 집에 오시마 하옵데다.] [그래 어찌 대답하였느냐?] [모른다 하였지요.] [잘 하였다.]춘향전(10)...冊室朗讀 이때 도련님이 춘향을 애연히 보낸 후에 잊을 수 없는 생각 둘데가 없어 책방으로 돌아와 만사에 뜻이 없고 다만 생각은 춘향 뿐이었다. 말소리 귀에 쟁쟁하고 고은 태도 눈에 삼삼하여 해지기만 기다리는데 방자를 불러, [해가 어느 때가 되었느냐?] [동쪽에 이제 아귀 트나이다.] 도련님이 크게 노하여, [이놈 괘씸한 놈, 서로 지는 해가 동으로 도로 가랴. 다시금 살펴보라.] 이윽고 방자 여짜온데.
[해는 떨어져 함지(咸池-태양이 모욕하는 곳)에 황혼이 되고 달은 동령에 솟사옵니다.] 져녁밥이 맛이 없어 전전반측(轉轉反側) 어이하리. [퇴령(退令)을 기다리라.]하고 서책을 보려할 제, 책상을 앞에 놓고 서책을 읽어가는데 중용, 대학, 논어, 맹자, 서전, 주역이며, 고문진보, 통사략(通史略)과 이백, 두시, 천자까지 내어놓고 글을 읽는데 시전(詩傳)이라. <관관저구(關關雎鳩) 재하지주(在河之州)요, 요조숙녀(窈窕淑女)는 군자호구(君子好逑)로다.> [서로 소리를 바꾸어 우는 정경이 새는 물가에서 노니는 도다. 아름다운 여인은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아서라, 그 글도 못 읽겠다.] 대학을 읽는데, [대학의 길은 명명한 덕에 있으며 신민(新民)에게 있으며 춘향에게도 있도다. 그 글도 못 읽겠다.] 주역을 읽는데, [원(元)은 형(亨) 코 정(貞)고 춘향이 코는 딱 댄코 좋고 하니라. 그 글도 못 읽겠다] [등왕각(藤王閣)이라-남창(南昌)은 고군(古郡)이요 홍도(紅都)는 신부(新府)로다. 옳다. 그글 되었다.] 맹자를 읽을새, [맹자께서 양혜왕을 보신대 옹왈 수(수) 천리를 머다 않고 온다. 하시니 춘향이 모사려 오시니까?] 사략을 읽는데, [태고라 천황씨도 이(以) 쑥떡으로 왕하여 세기섭제(歲起攝提)하니 무위이화(無爲而化)하시다 하여 형제 십일 인이 각각 일만 칠천 세를 누리시다.] 방자도 여짜오되, [천황씨가 목덕(木德)으로 왕이란 말은 들었으되 쑥떡으로 왕이란 말은 금시 초문이오.] [이자식 네 모른다. 천황씨는 일만 팔천 세를 살던 양반이라 이가 단단하여 목덕을 잘 자셨거니와 시속의 선배들은 목떡을 먹겠느냐? 공자님께옵서 후생을 생각하사 명륜당에 현몽하고 <시속 선배들은 이가 부족하여 목떡 못 먹기로 물씬물씬한 쑥떡으로 하라> 하여 삼백 육십주 향교에 통문(通文)하고 쑥떡으로 고쳤느니라.] 방자 듣다가 말하되, [여보 하느님이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말도 듣겠읍니다.] 도 적벽부(赤壁賦)를 들여 놓고, [임술(壬戌)지추 칠월 기망에 소자(蘇子)가 객으로 더불어 배를 띄워 적벽의 아래에 놀새 청풍은 서서히 불고 물결은 일지 않더라. 아서라. 그 글도 못 읽겠다.] 춘향전(11)...奇解千文 천자를 읽을새, [하늘 천 따 지.] 방자 듣고, [여보 도련님, 점잖은 분이 천자는 웬일이오?] [천자라하는 글이 칠서(七書-사서삼경)의 본문이라. 양나라 주사봉(周捨奉) 주흥사(周興嗣)가 하룻밤에 이 글을 짓고 머리가 희였기로 책 이름을 백수문(白首文)이라 하니라. 낱낱이 새겨보면 뼈똥쌀 일이 많으니라.] [소인놈은 천자 속은 아옵니다.] [네가 알더란 말이냐?] [알다 뿐이겠소.] [안다하니 읽어보라.] [예 들으시요. 높고 높은 하늘천, 깊고 깊은 따지, 홰홰친친 가물 현, 불타졌다 누를 황.]
[예 이놈 상놈은 적실하다. 이놈 어디서 장타령하는 놈의 말을 들었구나. 내 읽을테니 들어 보아라. 하늘이 자시에 열려 하늘을 나으니 광대(廣大) 하늘 천, 땅이 축시에 개벽하니 오행과 팔괘로 따 지, 삼십삼천 공(空)은 다시 공인 인심지시(人心指示) 가물 현, 이십팔숙(二十八宿),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정색(正色) 누를 황, 우주일월화중(宇宙日月重華)하니 옥우쟁영(玉宇쟁嶸) 집 우(宇), 연대국도흥성쇠(年代國都興盛衰), 옛은 가고 이제는 오니 집 주(宙), 우치홍수(禹治洪水) 기자 추에 홍범구주(洪範九疇) 넓을 홍(洪), 삼황오제(三皇五帝) 붕(崩)하신 후 난신적자(亂臣賊子) 거칠 황(荒), 동방이 장차 계명키로 고고천변일륜홍(고고天邊日輪紅) 번듯 솟아날 일(日), 억조창생, 격양가에 강구연월(康衢煙月)의 달 월(月), 한심미월(寒心微月) 때때로 불어나 삼오일야(三五日夜)에 찰 영(盈), 세상만사 생각하니 달 빛과 같은지라 십오야 밝은 달이 기망(旣望)부터 기울 책(책), 이십팔숙부터 하도낙서(何圖洛書) 버린 법(法), 일월성진 별 진(辰), 가련금야숙창가(可憐今夜宿娼家)라 원앙금침의 잘 숙(宿), 절대가인 좋은 풍류 나열춘추(羅列春秋)의 버릴 열(列), 의의월색(依依月色) 야삼경의 만단정회(萬端情懷) 베풀 장(張), 오늘 찬 바람이 소슬 불어오니 침실에 들어라 찰 한(寒), 벼개 높거던 내 팔을 베러 이마만큼 오너라 올 래(來), 에라 후리쳐 질끈 안고 품에 드니 설안풍에도 더울 서(暑), 침실이 덥거든 음풍(陰風)을 취하여 이리저리 갈 왕(往), 불한불열(不寒不熱) 어느 때냐 엽낙 오동 가을 추(秋), 백발이 장차 우거지니 소변풍토를 거둘 수(收), 낙목한풍(落木寒風) 찬 바람 백운강산의 감출 장(藏), 부용(芙蓉)이 지난 밤의 가는 비에 광윤유태(光潤有態) 부를 윤(潤, 이러한 고은 태도 평생을 보고도 남을 여(餘), 백년기약 깊은 맹세 만경창파 이룰 성(成), 이리저리 노닐 적에 부지세월(不知歲月) 햇 세(歲), 조강지처 불한당 아내 박대 못하느니 대전통편(大典通編) 법중 률(律), 군자호구(君子好逑)이 아니냐. 춘향 입에 내 입을 대고 쪽쪽빠니 법중여(呂)자가 이아니냐. 애고애고 보고지고.]춘향전(12)...筆才絶等 소리를 크게 질러 놓으니 이때 사또가 저녁 진지를 잡수시고 식곤증(食困症)이 나셔서 평상에 취침하시다가, [애고 애고 보고지고.] 소리에 깜짝 놀라, [이리 오너라.] [예!] [책방에서 누가 생침을 맞느냐. 신 다리를 주물렀느냐? 알아 들여라.] 통인이 들어가, [도련님 웬 목통이오? 고함소리에 사도께서 놀라시사 엄문하라 하옵시니 어찌하오리까?] [딱한 일이다. 남의 집 늙은이는 이롱증(耳聾症)도 있느니라마는 귀 너무 밝은 것도 예사 일 아니로구나.] 도련님 크게 놀라, [이대로 여쭈어라. 내가 논어라는 글을 읽다가 슬프다 나의 도가 오래 된지라 꿈에 주공을 뵙지 못하여 나도 이대목을 보다가 나도 주공을 뵈오면 그리하여 볼까 하여 흥취로 소리를 높아졌으니, 너 그대로 여쭈어라.]
통인이 들어가 그대로 여쭈니 사또는 도련님에게 승벽(勝癖)이 있음을 크게 기꺼워하여, [이리 오너라! 책방에 가서 목랑청(睦郞廳)을 가만히 오시래라.]
낭청이 들어 오는데 이 양반이 어찌 고리게 생기었던지 채신머리가 없는 걸음으로 조심없이 덤썩 들었던 것이라.
[사또 그새 심심하신지요?] [아 괜치 않네. 할말이 있네. 우리 피차 고우(故友)로서 동문수업(同門修業) 하였거니와 어릴 때 글 읽기처럼 싫은 것이 없건마는 우리 아이 시흥(詩興)을 보니 어이 아니 즐겁손가.] 이 양반은 아는지 모르는지 하여간 대답하는 것이엇다.
[아이 때 글 읽기처럼 싫은 게 어디 있으리요.] [일기가 싫으면 잠도 오고 꾀가 많아지지. 이 아이는 글 읽기를 시작하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쓰고 한단 말이여.] [예 그러하옵니다.] [배운 바 없어도 필재가 대단하지.] [그렇지요.] [점 하나만 툭 찍어도 고봉투석(高蜂投石-훌륭한 필법)같고, 한 일(一)을 그어 놓으면 천리진운(千里陳雲)이요, 갓머리는 작두첨(雀頭添-획의 모양이 참새 머리 같아야한다는 말)이요, 필법을 논할지면 풀랑뇌전(風浪雷電)이요, 내리 그어 치는 획은 노송도괘절벽(老松倒掛絶壁)이라, 창과로 이를진댄 바른 등(藤) 넝쿨같이 뻗어갔네, 도리깨 치는 데는 성낸 손우 끝같고 기운이 부족하면 발길로 툭 차 올려도 획대로 되나니.] [글씨를 가만히 보오면 획은 획대로 되옵니다.]
[글쎄 들어보세. 저 아이 아홉살 먹었을 제 서울 집 뜰에 늙은 매화가 있는 고로 매화 나무를 두고 글을 지으라 하였더니 잠시 지었으되 정성 들인 것과 필요한 것만을 간추리는 솜씨가 대단하여 한 번 본 것은 문득 기억 하였으니 정부의 당당한 명사가 될 것이요, 눈을 남으로 돌리면서 북쪽을 돌아보며 춘추의 한수를 읊었데그려.] [장래 정승을 하오리다.] 사또 너무 감격하여, [정승이야 어찌 바랄 것이겠나마는 내 생전에 급제는 쉬 할 게고 급제만 쉽게하면 육품의 벼슬에 오르는 것이야 어련히 하겠나.]
[아니요, 그리 할 말씀이 아니오라 정승을 못하면 장승(長丞-나무로 만든 里程標)이라도 하지요.] 사또 호령하되, [자네 뉘 말로 알고 대답을 그리 하는가?] [대답은 하였아오나 뉘 말인지는 모릅지요.] 그렇다고 하였지만 그게 또 다 거짓말이었다. 춘향전(13)...靑紗燈龍 이때 이도령은 퇴령(退令) 놓기를 기다리다가, [방자야!] [예!] [퇴령 놓았나 보아라.] [아직 아니 놓았소.]조금 있더니, [하인 불러라.]퇴령소리 길게 나니, [좋다. 좋다. 옳다. 옳다. 방자야 초롱에 불 밝혀라.]통인 하나 뒤를 따라 춘향이의 집으로 건너 갈 때 자취 없이 가만 가만 걸으면서, [방자야, 상방(上房)에 불 비친다. 등롱을 옆으로 감춰라!] 삼문 밖에 썩 나서니 좁은 길 사이에는 월색이 영롱하고 꽃 사이에 푸른 버들 몇 번이나 꺾었으며 투기(鬪技)하는 소년 아이들은 밤에 청루(靑樓)에 들어갔으니 지체 말고 어서 가자. 그렁저렁 당도하니 좋은 이 밤은 죽은 듯이 고요한데 가기물색(佳期物色)이 아니냐. 가소롭다. 어주자(魚舟子)는 도원(桃源) 길을 모르던가. 춘향의 문전에 당도하니 인적은 드물고 월색은 삼경이더라. 뛰는 고기는 출몰하고 대접 같은 금붕어는 임을 보고 반기는 듯, 월하의 두루미도 흥에 겨워 짝을 부른다.
이때 춘향이 칠현금(七絃琴) 비껴안고 남풍시(南風詩)를 희롱하다가 침석에서 졸더니 방자가 안으로 들어가되 개가 짖을까 염려하여 자취 없이 가만가만 춘향 방 영창(影窓) 밑에 가만히 살짝 들어가서, [이애 춘향아, 잠들었냐?]춘향이 깜짝 놀라, [네 어찌 오냐?] [도련님이 와 게시다.]춘향이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울렁울렁 속이 답답하여 부끄럼을 이기지 못하여 문을 열고 나오더니 건넌방에 건너가서 저의 모친을 깨우는데, [애고 어머니, 무슨 잠을 이다지 깊이 주무시오?]춘향이 모 잠을 깨어, [아가 무엇을 달라고 부르느냐?] [누가 무엇을 달랬오?] [그러면 어째서 불렀느냐?]엉겁결에 하는 말이, [도련님이 방자 모시고 오셨다오.]춘향이 모친 문을 열고 방자 불러 묻는 말이 [뉘 왔냐?]방자 대답하되, [사또 자제 도련님이 와 계시오.]춘향모 그 말을 듣고, [향단아!] [네.] [뒤 초당에 좌석과 등촉을 신칙감시하여 포진하라.]당부하고 춘향모가 나오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춘향모를 칭송하더니 과연 그 이유가 있었다. 예로부터 사람이 외탁(外託)을 많이 하는 고로 춘향 같은 딸을 낳구나. 춘향모 나오는데 거동을 살펴보니, 반백이 넘었는데 소탈한 모양이며 다정한 거동이 표표정정하고 살결이 윤택하여 복이 많게 보이더라. 점잖은 걸음으로 걸어 나오는데 가만가만 방자가 뒤를 따라 온다.
춘향전(14)..含情無語 이때 도련님이 천천히 거닐며 뒤 돌아보고 흘겨보기도 하며무료히 서 있을 때 방자가 여짜오되, [저게 춘향모로소이다.] 춘향모가 나오더니 공수(拱手)하고 우뚝 서며, [그 사이 도련님 문안이 어떠시오?] 도련님 반만 웃고는, [춘향이 모친이라지...평안한가?] [예 겨우 지냅니다. 오실 줄 진정 몰라 영접이 불민하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춘향모 앞을 서서 인도하여 대문 다 지나고 후원을 돌아 가니 해묵은 별초당(別草堂)애 등촉을 밝혔는데 버들가지 늘어져 불빛을 가린 모양이 구슬 발(簾)이 갈고랑이에 걸린 듯하고, 오른쪽의 벽오동은 맑은 이슬이 뚝뚝 떨어져 학이 꿈을 눌래 주는 듯하고, 좌편에 섰는 반송(盤松)은 청풍이 건듯 불면 늙은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고, 창 앞에 심은 파초, 일란초(日暖初) 봉미장(鳳尾長-파초의 속 잎이 봉의 꼬리 같다는 말)은 속잎이 빼어나고 수심여주(水心如珠) 어린 연꽃 물 박에 겨우 떠서 옥로는 비껴 있고, 대접 같은 금붕어는 고기 변해 용되려하고 때때로 물결쳐서 출렁출렁 굼실 놀 때마다 조롱하고, 새로 나는 연잎은 받을 듯이 벌어지고 금연상봉석가산(금然上蜂石假山-뜰에 돌로 쌓아 놓은 산)은 총총히 쌓였는데 계해의 학두루미 사람을 보고 놀래어 두 쪽지를 떡 벌리고 긴 다리로 징검징검 낄룩뚜르룩 소리하며, 계화 밑에 삽살개 짖는구나. 그중에 반가운 것은 못 가운데 쌍오리는 손님 오시노라 두둥실 떠서 기다리는 모양이요, 처마에 다다르니 그제야 저의 모친의 영을 받들어 사창을 반쯤 열고 나오는데 그 모양을 살펴보니 뚜렸한 일륜명월(一輪明月)이 구름 밖에 솟았는 듯 황홀한 그 모양은 측량키 어렵다. 부끄러이 당에 내려 천연스레 서 있는 거동은 사람의 간장을 다 녹인다. 도련님 반만 웃고 춘향더러 묻는 말이, [곤(困)치 아니하여 밥이나 잘 먹느냐?] 춘향이 부끄러워 대답치 못하고 묵묵히 서 있거늘 춘향모가 먼저 당에 올라 도련님을 자리로 모신 후에 차를 들여 권하고 담배 붙여 올리니, 도련님 받아 물고 앉았을 때 도련님 춘향의 집 오실 때는 춘향에게 뜻이 있어 와 게시는 것이지 춘향의 세간 기물 구경 온 게 아니로되, 도련님의 첫 외입인지라 박에서는 무슨 말이 있을 듯하더니, 들어가 앉고 보니 별로이 할말이 없고 공연히 기침 기운이 나서 오한증(惡寒症)이 들면서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할 말이 없었다. 방 한가운데를 들러보며 벽 위를 살펴보니 상당한 기물들이 놓여 있다. 용장(龍欌)과 봉장(鳳欌), 가께수리 여기저기 벌려 있고 그림을 그려 붙여 있으되, 서방 없는 춘향이요, 학문하는 계집아이가 세간과 그림이 왜 있을까 마는 춘향모가 유명한 명기라 그 딸을 주려고 장만한 것이었다.
조선의 유명한 명필 글씨가 붙어 있고 그 사이에 붙인 명화 다후리쳐 던져 두고 월선도(月仙圖)란 그림이 붙어 있으니 월선도의화제(畵題)가 다음과 같았다.
임금님이 높이 앉아 군신의 조회를 받는 그림(上帝高絳降朝節),청년거사 이태백이 황학전(黃鶴展)에 끓어앉아 황정경(黃庭經) 읽는그림, 백옥루(白玉樓) 지은 후에 자기 불러 올려 상량문(上樑文) 짓는그림, 칠월 칠석 오작교에서 견우 직녀 만나는 그림, 광한전 달 밝은밤에 약을 찧던 항아(姮娥)의 그림, 층층이 붙였으나 광채가 찬란하여정신이 산만하였다.
또 한 곳을 바라보니, 부춘산엄자릉(富春山嚴子陵)은 강의대부(諫議大夫) 마다하고 백구를 벗을 삼고 원학(遠鶴)으로 이웃 삼아양구(洋구)를 떨쳐 입고 추동강(秋桐江) 칠리탄(七里灘)애 낙시줄던진 경치를 역력히 그려 놓았다. 방가위지(方可謂之) 성경이라. 남자의 좋은 짝이 놀 데가 바로 여기라. 춘향이 일편단심으로 일부종사하려고 글 한 수를 지어 책상 위에 붙었으되,
운을 띤 것은 봄바람의 대나무요 향불을 피운 것은 밤에 책 읽을러라 (帶音春風竹 焚香夜讀書) [기특하다 이글 뜻은 목란(木蘭)의 절개로다.] 이렇듯 칭찬할 때 춘향모 말하기를, [귀중하신 도련님이 변변찮은 집에 와 주시니 황공하고 감격하옵니다.]춘향전(15)...探花蜂蝶 도련님 그 말 한 마디에 말구멍이 열리었제.
[그럴 리가 왜 있는가. 우연히 광한루에서 춘향을 잠간 보고 연연히 보내기로 탐화봉접(探花蜂蝶-여색을 좋아함) 취한 마음, 오늘 밤에 오는 뜻은 춘향의 모 보러 ㅇ거니와 자네 딸 춘향이와 백년언약을 맺고저 하니 자네의 마음 어떠한가?] 춘향 모 대답하되, [말씀은 황송하오나 들어보오. 자핫골 성참판 영감이 보후(補後-내직에 들어가기 전 잠간 왜관에 임한 것)로 남원에 좌정하실 때 소리개를 매로 보고 수청을 들라 하옵기로 관장의 영을 어길 수가 없어 모신 지 삼삭만에 올라가신 후 뜻 밖으로 잉태하여 낳은 것이 저것이라. 그런 연유로 성참판께 아뢰니 <젖줄 떨어지면 데려가련다> 하시더니 그 양반이 불행하여 세상을 버리시니 보내지 못하옵고 저것을 길러 낼 때, 어려서 잔병조차 그리 많고 일곱 살에 소학 읽혀 수신제가(修身齊家) 화순심(和順心)을 낱낱이 가르치니, 씨가 있는 자식이라 만사를 달통하고 삼강행실, 뉘라서 내 딸이라 하리요. 가세가 부족하니 재상가(宰相家)에는 부당하고 사(士), 서인(庶人) 상하에 다 미치지 못하니 혼인이 늦어져서 주야로 걱정이나 도런님 말씀은 잠시 춘향과 백년기약한다는 말씀이오나 그런 말씀 말으시고 노시다가 가시기나 하시오.] 이 말 참말 아니라 이도령님 춘향을 얻는다 하니 앞일 몰라 뒤를 눌려 하는 말이었다.
이도령 기가 막혀, [호사에 다마로세. 춘향도 미혼 전이나 나도 미장가 전이라 피차 언약이 이렇고 육례는 못할망정 양반의 자식이 일구이언 할 가닭이 있겠나?] 춘향의 모 이 말 듣고, [또 내 말 들으시오. 고서에 하였으되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이 없고, 아들을 아는 것은 아비만한 이 없고 딸을 아는 것은 어미만한 이 없다 하지 않았는가? 내 딸 내가 알지요. 어려서부터 절곡한 뜻이 있어 행여 신세를 그르칠까 의심이오. 일부종사 하려 하고 일마다 하는 행실 철석같이 굳은 뜻이 청송록죽 전나무 사시절을 다투는듯 상전벽해 될지라도 내 딸 마음 변할 손가. 금은 보화가 산같이 쌓여 있을 지라도 받지 아니할 것이오. 백옥 같은 내 딸 마음 청풍인들 미치리요. 다만 옛날의 큰 뜻을 본받고자 할 뿐인데 도련님은 욕심부려 인연을 ㅁ었다가 미장가 전 도련님이 부모 몰래 깊은 사랑 금석같이 맺었다가 소문나 버리시면 옥결 같은 내 딸 신세 문채 좋은 대모(玳瑁-열대지방산 거북), 진수, 고운 구슬, 군역노리 깨어진 듯, 청강에 노든 원앙새가 짝 하나를 잃었다 한들 어이 내 딸 같을손가. 도련님의 속 마음이 말과 같을진대 깊이 알아 행하소서.]춘향전(16)...酒盤等待 도련님 더욱 답답하여, [그건 두번 다시 염려 마소. 내 마음 혜아리니 특별간절 굳은 마음 흉중에 가득하니 분의(分義)는 다를망정 저와 나와 평생 기약을 맺을 때에 전안납폐(奠雁納幣-결혼예식의 하나) 아니한들 창파같이 깊은 마음 춘향 사정 모를 손가.] 이렇듯 설화(說話)하니, 청실홍실 육례를 가춰 만난다 해도 이 위에 더 뾰족할 것인가.
[내 저를 첫장가 모양 여길 터이니 시하(侍下)라고 염려 말고 미장가 전이라고 염려마오. 대장부 먹은 마음으로 박대하는 행실을 할 것인가? 허락만 하여 주오.] 춘향의 모 이말을 듣고 이윽히 앉았더니 몽조(夢兆)가 있는지라 연분인 줄 짐작하고 흔연히 허락하여, [봉(鳳)이 나매 황(凰)이 나고 장군 나매 용마 나고 남원의 춘향 나매 이화춘풍 꽃다웁다. 향단아, 주반(酒盤) 등대하였느냐?]
[예.] 대답하고 주효를 차릴 때에 안주들을 보자하니 고음새도 정결하고 대양판(大양板) 갈찜, 소양판 제육찜, 풀풀 뛰는 숭어찜, 포도동 날으는 매추리 탕에, 동래, 울산 대전복, 대모장도(玳帽粧刀) 잘드는 칼로 맹상궁의 눈썹과 같이 어슥비슷 오려 놓고 염통, 산적, 양보끔과 춘치자명(春稚自鳴) 생치(生稚) 다리 적벽(赤壁) 대접 분원기(分院器)에 냉면조차 비벼 놓고, 생밤, 찐밤, 잣송이며, 호도, 대추, 석류, 유자, 준시, 앵두, 탕기(湯器) 같은 청술레(푸른 배)를 볼품 있게 고였는데 술병 치례를 볼 것 같으면 티끌 없는 백옥병과 푸르른 산호병과 엽락금정(葉落金井-중국에 있는 섬) 오동병과 목이 긴 황새병, 자래병, 당화병, 쇄금병, 소상동정 죽절병, 그 가운데 품질이 좋은 은으로 만든 주전자, 적동자, 쇄금자 등을 차례로 놓았는데 빠짐 없이도 구비하여 놓았구나. 술 이름을 말할진대 이적선(李謫仙) 포도주와, 안기생(安期生) 자하주(紫霞酒-이슬을 받 만든 술)와, 산림처사(山林處士) 송엽주(松葉酒)주와, 과하주(過夏酒), 문방주(方文酒), 천일주, 백일주, 금로주(金露酒), 팔팔 뛰는 화주(火酒), 약주, 그 가운데 향기로운 연엽주(蓮葉酒) 골라 내어 알모양으로 동그란 주전자에 가득 부어 천동화로 백탄 불에 남비 냉수 끓는 가운데 동그란 주전자에 부어 차지도 덥지도 않게 데워냉어 금잔, 옥잔, 앵무새 주등이 같은 잔을 그 가운데 띄웠으니, 옥경, 연화 피는 곳에 태을선녀(太乙仙女)가 배를 띠우듯 대광보국(大匡輔國-벼슬 이름) 연ㄱ잎 영의정 파초선을 띄우듯 두둥실 띄워 놓고 권주가 한 곡조에 한잔 한잔 또 한잔이라. 이도령 하는 말이, [오늘 밤에 하는 절차 보니 관청이 아닌 바에 어이 그렇게 구비한가?]춘향전(17)..一喜一悲 춘향모 말하기를, [내 딸 춘향 곱게 길러 요조숙녀는 군자의 짝으로 가려서 금실을 벗하여 평생을 동락하올 때에 사랑에 노는 손님 영웅호걸, 문장들과 죽마고우 벗님네들과 주야로 즐기실 때, 내당의 하인 불러 밥상 술상 재촉할 때, 보고 배우지 못하고는 어찌 곧 대등하리오? 안사람이 민첩지 못하면 남편의 낯을 깍는 것이니 내 상전에 힘써 가르쳐 아무 쪼록 빛받아 행하려고 돈이 생기면 사모으고 손으로 만들어서 눈에 익고 손에도 익히려고 잠시라도 놀지 않고 시킨 보람이오니 부족다 말으시고 구미대로 잡수시오.] 하며 앵무베 술잔에 가득히 술을 부어 도련님께 드리오니 이도령 잔 받아 손에 들고 탄식하며 하는 말이, [내 마음대로 한다면은 육례(六禮)를 행할 것이나 그렇게는 못하고 개구멍 서방으로 들고 보니 이 아니 원통하냐. 이애 춘향아, 그러나 우리 둘이 대례 술로 알고 먹자.] 한 잔 술 부어 들고, [내 말 들어라. 첫재 잔은 인사주요. 둘재 잔은 합환주(合歡酒)니, 이 술이 다른 술이 아니라 근원 근본으로 삼으리라. 순임금 때의 아황(娥皇)과 여영(如英)이 귀히 만난 연분이 귀중하다 하였으되 원로(月老)의 우리연분, 삼생(三生) 가약을 맺은 연분, 천만년이라도 변치 않을 연분 대대로 삼대(三臺-삼의정) 육경(六卿-육판서) 자손이 많이 번성하여 자손 증손 고손이며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죄암죄암 달강달강 백 살까지 살다가 한 날 한 시 마주 누어 선후 없이 죽게되면 천하에 제일 가는 연분 아닌가.] 수잔 들어 먹은 후에, [향단아, 술 부어 너의 마나님께 드려라.] [장모, 경사술이니 한 잔 먹으소.] 춘향의 모 술잔 들고 슬프기도 하고 기뿌기도 하여 하는 말이, [오늘이 우리 딸의 백년의 고락을 맺는 날이라, 무슨 스픔 있을까마는 저것을 길러낼 때 애비없이 길러 이 때를 당하오니 영감 생각이 간절하여 비창하여라.] 도련님 하는 말이, [기왕지사 생각 말고 술이나 먹소.] 춘향모 수 삼배 먹은 후에 도련님 통인 불러 상 물려 주면서, [너도 먹고 방자도 먹여라.] 통인과 방자가 상을 물려 먹은 후에 대문 중문 다 닫히고 춘향의 모는 향단을 불러 자리를 보게 할 때에 원앙금침 잣 벼개와 샛별 같은 요강, 대야까지 갖춰 자리 보전을 정히 하고, [도련님 편안히 쉬시옵소서.] [향단아, 나오너라 나하고 함께 가자.] 두리 다 건너 갔구나.
춘향전(18)...綠水鴛鴦
춘향과 도련님이 마주 앉아 놓았으니 그 일이 어찌 되겠느냐.
사양(斜陽)을 받으면서 삼각산 제일봉에 봉황이 앉아 춤추는 듯 두 활개를 살포시 들고 춘향의 섬수옥수를 반듯이 겹쳐 잡고 의복을 교묘하게 벗기는데 두 손길 썩 놓더니 춘향의 가는 허리를 담쑥 안고,
[치마를 벗어라.] 춘향이가 처음 일일 뿐 아니라 부끄러워 고개를 숙여 몸을 틀며 이리곰실 저리곰일 녹수(綠水)의 홍련화(紅蓮花)가 잔바람을 만나 흔들리는 듯, 도련님이 치마 벗겨 제쳐 놓고 바지와 속옷을 벗길 때에 무한이 힐난한다. 이리 굼실 저리 굼실 동해의 청룡이 굽이를 치는 듯하더라.
[아이고 놓아요, 좀 놓아요.] [엣다 안될 말이로다.] 힐난하는 중에 옷끈 끌러 발가락에 딱 걸고서 지그시 누르며 기지개를 켜니 발길 아래 떨어진다. 옷이 화작 벗겨지니 형산(荊山-중국의 산명-옥의 산지)의 백옥덩이가 춘향에 비길소냐. 옷이 활짝 벗겨지니 도련님 거동을 보려하고 슬금히 놓으면서, [아차차 손 빠진다.] 춘향이 금침 속으로 달려든다. 도련님이 왈칵 쫓아 드러누워 저고리를 벗겨 내어 도련님 옷과 모두 한데다 둘둘 뭉쳐 한편 구석에 던져 두고 둘이 안고 마주 누웠으니 그대로 잘리가 있는가. 애를 쓸 때에 삼승(三升-굵은 배) 이불이 춤을 추고 샛별 요강은 장단을 마추어 청그렁 쟁쟁 문고리는 달랑달랑, 등잔불은 가물가물, 맛이 있게 잘 자고 났구나. 그 가운데의 진진한 일이야 오즉하랴.
하루 이틀 지나가니 이런 것들이라 신맛이 간간 새로와 부그러움은 차차 멀어지고 이제는 희롱도 하고 우수운 말도 있어 자연히 사랑가가 되었구나. 사랑하고 노는데 꼭 이 모양으로 노던 것이더라.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동정칠백(洞庭七百) 월하초에 무산(巫山-중국의 산 이름) 같이 높은 사랑 목단(目斷) 무변수(無邊水)에 하늘 같고 바다 같은 깊은 사랑 오산전(五山顚) 달 밝은데 추산천봉(秋山千峰) 반달 사랑 증경학무(曾經學舞)하올 적에 하문취소(何問吹蕭)하던 사랑 유유낙일(慾慾落日) 월렴간(月簾間)에 도리화개(桃李花開) 비친 사랑 섬섬초월 분백(粉白)한데 함소함태(含笑含態) 숱한 사랑 월하의 삼생(三生)연분 너와 나의 만난 사랑 허물 없는 부부 사랑 화우동산(花雨東山) 목단화 같이 펑퍼지고 고운 사랑 연평 바다 그물 같이 얽히고 맺힌 사랑 청루미녀(靑樓美女) 금침같이 혼솔마다 감친 사랑 시냇가의 수양같이 펑퍼지고 늘어진 사랑 남창(南倉) 북창(北倉) 노적(露積)같이 다물다물 쌓인 사랑 은장(銀藏) 옥장(玉藏) 장식같이 모모이 잠긴 사랑 영산홍록(映山紅綠) 봄바람에 넘노드니 황보(黃蜂) 백접(白蝶) 꽃을 물고 질긴 사랑 녹수청강 원앙조격으로 마주 둥실 떠 노는 사랑 년년칠월 칠석야에 견우직녀 마난 사랑 육관대사 성진(六觀大師 性眞-九雲夢에 나온 주인공)이가 팔선녀와 노는 사랑 역발산(力拔山) 초패왕(楚覇王)이 우미인(虞美人)을 만난 사랑 당나라 당명왕(唐明王)이 양귀비(楊貴妃)를 만난 사랑 명사십리(明沙十里-원사부근의 해변) 해당화 같이 연연(娟娟)히 고운 사랑 네가 모두 사랑이로구나 어화 둥둥 내 사랑아 어화 내 간간 내 사랑이로구나.] [여봐라 춘향아!] [저리 가거라 가는 태도 보자 빵긋 웃고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도 보자 너와 나와 만난 사랑 연분을 팔자한들 팔 곳이 이디 있어 생전 사랑 이러하고 어찌 사후(死後) 기약이 없을소냐 너는 죽어 될 것 있다 너는 죽어 글자 되되 따 지자(地), 그늘 음자(陰), 아내 처자(妻) 게집 여자(女) 변(邊)이 되고 나는 죽어 글자 되되 하늘 천자(天), 하늘 건자(乾), 지아비 부자(夫) 사내 남자(男) 아들 자자(子) 몸이 되어 여(女) 변(邊)에다 붙이면 좋을 호자(好)로 만나보자 또 너 죽어 될 것 있다 너는 죽어 물이 되되 은하수, 폭포수, 만경창해수(萬頃滄海水) 청계수(淸溪水), 옥계수(玉溪水), 일대장강(一帶長江) 던져 두고 칠년 대한(大旱) 가물 때 또 일상진진 젓어 있는 음양수란 물이 되고 나는 죽어 새가 되어 두견새도 되지 말고 요지(瑤池) 일월 청조, 청학, 백학이며 대붕조(大鵬鳥-구만리를 난다는 큰 새) 그런 새가 될랴말고 쌍거쌍래 떠날 줄 모르는 원앙조란 새가 되어 녹수의 원앙격으로 어화 둥둥 떠놀거든 나인 줄을 알려무나 사랑 사랑 내 간간 내 사랑이야.]춘향전(19)...情字打鈴 [아니 그것도 내 아니 되려오] [그러면 너 죽어서 될 것이 있다.
경주 인경도 되려 말고 전주 인경도 되려 말고 송도 인경도 되려 말고 장안 종로 인경 되고 나는 죽어 인경 치마 되어 삼십삼 천(天-욕계의 제이천)이십팔 숙(宿)을 응하여 질마재에 봉화 세 자루 꺼지고 남산에 봉화 두 자루 꺼지면 인경 첫마디 치는 소리 그저 뎅뎅 칠 때마다 다른 사람 듣기에는 인졍 소리로만 알아도 우리 속으로는 "춘향 뎅 도련님 뎅이라" 만나 보자구나 사랑 사랑 내 간간 내 사랑이야.] [아니 그것도 나는 싫소.] [그러면 너 죽어 될 것 있다.
너는 방아 확이 되고 나는 죽어 방아 공이가 되어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의 강태공 조작 방아 그저 떨구덩 떨구덩 찧거들랑 나인 줄 아려무나 사랑 사랑 내 사랑 내 간간 사랑이야.] 춘향이 하는 말이, [싫소, 그것도 내 아니 될라오.] [어이하여 그말이냐.] [나는 항시 어찌 이생이나 후생이나 밑으로만 된다는 법 있소? 재미 없어 못 쓰겠소.] [그러면 너 죽어 위로 가게하마. 너는 죽어 맷돌 웃짝이 되고 나는 밑짝이 되어 이팔 청춘 홍안 미색들이 섬섬옥수로 밑대줄 잡고 슬슬 돌리면 천원지방(天圓地方)격으로 휘휘 돌아가거든 나인 줄을 알려무나.] [싫소. 그것도 아니 되려오. 위로 생긴 것이 부아나게만 생기었소. 무슨년의 원수로서 일생 한 구멍이 더하니 아무 것도 나는 싫소.] [그러면 너 죽어서 될 것 있다.
너는 죽어 명사십리 해당화 되고 나는 죽어 나비 되어 나는 네 꽃송이 물고 너는 내 수염 물고 춘풍이 선듯 불거든 너울 너울 춤을 추며 놀아보자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내 간간 사랑이지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이 모두 내 사랑 같으면 사랑에 걸려 살 수 있나 어허 둥둥 내 사랑 네 예뻐 내 사랑이야 방긋 방긋 웃는 것은 화중왕 모단화가 하룻밤 세우(細雨)뒤에 반만 피고자 한 듯 아무리 보아도 내 사랑 내 간간이로구나 너와 나와 유정하니 정자(情字)로 놀아보자.] [음상동(音相同)하여 정짜로 노래나 불러 보세.] [들읍시다.] [내 사랑아 들어서라, 너와 나와 유정하니 어이 아니 다정하리 담담 장강수(澹澹長江水) 유유원객정(悠悠遠客情) 하교 불상송(河橋不相送) 강수원함정(江水遠含情) 송군남포 불승정(送君南浦不勝情) 무인불견 송아정(無人不見送我情) 한태조 희우정(漢太祖喜雨亭) 삼대육경(三臺六卿) 백관조정(百官朝庭) 도장(道場) 청정(淸淨) 각씨(閣氏) 친정(親庭) 친고(親故) 통정(通情) 난세(亂世) 평정(平定) 우리 둘이 천년 인정 월명성희(月明星稀) 소상동정(瀟湘洞庭) 세상만물 조화정(世上萬物造化定) 근심 걱정, 소지(所志) 원정(原情) 주위인정, 음식 투정 복 없는 저 방정, 송정(訟庭), 관정(官庭), 내정(內情), 외정(外定) 애송정(愛松亭), 천양정(穿楊亭) 양귀비의 심향정(沈香亭) 이비(二妃)의 소상정(瀟湘亭) 한송정(寒松亭) 빽화만발 호춘정(好春亭) 기린 토월 백운정(白雲亭) 너와 나와 만난 정 일정(一情) 실정(實情) 논지(論之)하면 내 마음은 원형이정(元亨利貞) 네 마음은 일편탁정(一片托情) 이같이 다정하다가 만일 즉파정(卽破情)하면 복통 절정(絶情)걱정되니 진정으로 원정(原情)하자는 그 정자(情字)다.]
춘향전(20)...宮字雜談 춘향이 좋아라고 하는 말이, [정속은 도저하오. 우리집 재수(財數) 있게 안택경(安宅經-경문의 일종)이나 좀 읽어 주오.] 도련님 허허 웃고, [그뿐인 줄 아느냐, 또 있지야. 궁자(宮字)노래를 들어보아라.]
[애고 얄궂고 우습다. 궁자 노래가 무엇이오?] [너 들어 보아라. 좋은 말이 많으니라.] 좁은 천지 개태궁(開胎宮) 뇌성벽력 풍우 속에 서기 삼광(三光) 둘러 있는 장엄하다 창합궁(하늘의 궁정) 성덕이 넓으시다 조림(照臨)이 어인 일인고 주지객(酒池客) 운성(雲盛)하던 은왕(殷王)의 대정궁(大庭宮) 진시황(秦始皇)의 아방궁(阿房宮) 문천하득(問天下得) 하실 적에 한태조(漢太祖) 함양궁(咸陽宮) 그 곁의 장락궁(長樂宮) 반첩여(班첩여)의 장신궁(長信宮) 당명황(唐明皇)의 상춘궁(賞春宮) 이리 올라서 이궁(離宮) 저리 올라서 별궁(別宮) 용궁 속의 수정궁(水晶宮) 월궁 속의 광한궁(廣寒宮) 너와 합궁(合宮)하니 한평생 무궁이라 이 궁 저 궁 다 버리고 네 양 다리의 수욜궁(水龍宮) 나의 심줄 방망이로 길을 내자구나.] 춘향이 반만 웃고, [그런 잡담은 말으시오.] [그것 잡담 아니로다. 춘향아, 우리 둘이 업음질이나 하여보자.]
[애고 참 잡성스러워라. 업음질을 어떻게 하오?] 업음질을 여러 번 한 듯이 말하더라. [업음질은 천하 쉬운 것. 너와 나와 활짝 벗고 업고 놀고 안고 놀면 그게 업음질이 아니냐?] [애고 나는 부끄러워 못 벗겠소.] [에라 요 계집애야, 안될 말이로다. 내 먼저 벗으마.] 버선, 대님, 허리띠, 바지, 저고리, 활짝 벗어 한편 구석에 밀쳐 놓고 우뚝 서니 춘향이 그 거동을 보고 방긋 웃고 돌아서며 하는 말이,
[영낙없는 낮도깨비 같소.] [오냐 네 말 좋다. 천지만물이 짝 없는 게 없느니라. 두 도깨비 놀아 보자.] [그러면 불이나 끄고 노사이다.] [불이 없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어서 벗어라. 어서 벗어라.]
[애고 나는 싫소.] 도련님 춘향 옷을 벗기려 할 때 넘놀면서 어룬다. 마침 청산 늙은 범이 살찐 암캐를 물어다 놓고 이가 없어 먹지는 못하고 흐르릉 흐르릉 아웅 어루는 듯, 북해의 흑룡(黑龍)이 여의주(如意珠)를 입에다 물고 색구름 사이에서 넘노는 듯, 단산(丹山-봉황이 깃들고 있다는 상상의 산)의 봉황이 대 열매를 물고 벽오동 속으로 넘나드는 듯, 구고(못의 가장 깊은 곳)청학이 난초를 물고서 오송간(梧松間)에 넘노는 듯, 춘향의 가는 허리를 후리쳐 담쑥 안고 기지개 아드득 떨며 귀와 뺨도 쪽쪽 빨고 입술도 쪽쪽 빨면서 주홍 같은 혀를 물고 오색단청 순금장(純金欌) 안의 날아가고 날아 오는 비둘기 같이 꾹꿍꾹꿍 으흥거려 뒤로 돌려 담쑥 안고 젖을 쥐고 발발 떨며, 저고리 치마 바지 속옷가지 벗겨 놓으니, 춘향이 부끄러워 한편으로 잡치고 앉았을 때, 도련님 답답하여 가만히 살펴보니 얼굴이 복찜하여 구슬 땀이 송실송실 맺혔구나. 춘향전(21)...非金非玉
[이애 춘향아, 이리 와 업혀라.] 춘향이 부끄러워 하니, [부그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이왕에 다 아는 바이니 어서 와 업혀 라.] 춘향을 업고 추기시며, [아따 그 계집아이 똥집 장히 무겁고나. 네가 내 등에 업힌 것이 마 음에 어떠하냐?] [더할 수 없이 좋소이다.] [좋으냐?] [좋아요.] [나도 좋다. 좋은 말을 할 것이니 너는 그저 대답만 하도록 하여라.] [말씀 대답할 터이니 하여보옵소서.] [네가 금(金)이지야?] [금이란 당치 않소. 팔년 풍진 초한 시절에 육출기계(六出奇計) 진평 이가 범아부(范亞父)를 잡으려고 황금 사만을 뿌렀으니 금이 어디 남으 리까?] [그러면 진옥이냐?] [옥이란 당치 않소. 영웅 진시황이 형산의 옥을 얻어 이사(李斯-진시 황 때의 정승)의 명필로 수명우천(受命于天) 기수영창(旣受永昌)이라 옥쇄(玉쇄)를 만들어 만세유전을 하였으니 옥이 어이 되오리까?] [그러면 네가 무엇이냐? 해당화냐?] [해당화라니 당치 않소. 명사십리 아니어든 해당화가 되오리까?] [그러면 네가 무엇이냐? 밀화(密花) 금패(錦貝), 호박(琥珀), 진주냐?] [아니 그것도 당치 않소. 삼정승, 육판서, 대신, 재상, 팔도방백, 수령님네 갓끈 풍잠(風簪) 다 하고서 남은 것은 경향의 일등 명기 지환 벌 허다히 다 만드니 호박 진주 부당하오.] [네가 그러면 대모(代瑁)산호냐?] [아니 그것도 아니오. 대모 간 큰 병풍을 산호로 난간을 하여 광리왕 (廣利王) 상량문(上梁文)의 수궁 보물 되었으니 대모 산호가 부당하오.] [네가 그러면 반달이냐?] [반달이라니 당치 않소. 오늘밤 초생(初生) 아니어든 벽공(碧空)에 돋은 밝은 달 내가 어찌 기울이리까?] [네가 그러면 무엇이냐? 날 홀려먹는 불여우냐? 네 어머니 너를 낳 아 곱게 길러 내어 나를 홀려 먹으라고 생겼느냐? 사랑 사랑 사랑이야. 내 간간 사랑이야. 네가 무엇을 먹으려는 것이냐? 생밤 찐밤을 먹으려 는 것이냐? 둥글둥글 수박 웃봉지 대모장도 드는 칼로 뚝 떼어 강릉 백청(白淸)을 두루 부어 은수저 반간지로 붉은 점 한 점을 먹으려느 냐?] [아니 그것도 싫소.] [그러면 무얼 먹겠느냐? 시금털털 개살구를 먹겠느냐?] [아니 그것도 내사 싫소.] [그러면 이것을 먹으려느냐? 되지 잡으랴? 개 잡아 주랴? 내 몸 통 째 먹으려느냐?] [여보 도련님, 내가 사람 잡아 먹는 것 보았소?]춘향전(22)...如此壯觀 [에라 요것, 안 될 말이로다. 어화둥둥 내 사랑이지, 이애 춘향아 내리려무나. 백사만사가 다 품앗이가 있느니라. 내 너를 업었으니 너도 나를 업어야지.] [애고 도련님은 기운이 세어서 나를 업으시거니와 나는 기운이 없어 못 업겠소.] [업는 수가 있느니라. 도두 업으려 말고 빨리 땅에 자운자운하게 뒤로 잦은 듯 업어다오.] 도련님을 업고 툭 추워놓으니 대중이 틀렸구나.
[애고 잡성스러워라.]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내가 네 등에 업혀 노니 마음이 어떠냐? 나는 너를 업고 좋은 말 하였으니 너도 나를 업고 좋은 말 해야지.] [좋은 말을 하오리다. 들으시오.
부열(傅說-중국 은나라 고종 때의 정승)이를 업은 듯 여상(呂尙-강태공의 다른 이름)이를 업은 듯 흉중대략(胸中大略)을 품었으니 명만일국(名滿一國)의 대신이 되어 주석지신(柱石之臣), 보국충신(輔國忠臣) 모두 헤아리니 사육신을 업은 듯, 생육신을 업은 듯 일선생, 월선생, 고운선생(孤雲先生) 업은 듯 제봉(霽峰)을 업은 듯, 요동백(遼東伯)을 업은 듯 정송강을 업은 듯, 충무공을 업은 듯 우암(尤庵) 퇴계(退溪) 사계(沙溪) 명제(明제)를 업은 듯 내 서방이시지 내 서방, 알뜰 간간 내 서방 진사, 급제 대(臺) 받쳐, 직부주서(注書)한림학사 이렇듯이 된 연후에 부승지, 좌승지, 도승지로 벼슬에 올라 팔도 방백 지낸 후에 내직으로 각신(閣臣), 대교(待敎), 복상(卜相) 데제학(大提學), 대사성, 판서 좌상, 우상, 영상, 규장각 하신 후에 내삼천(內三千), 외팔백(外八百), 주석지신(柱石之臣) 내 서방 알뜰 간간 내 서방이지.] 제손도 능질나게 문질렀구나.
[춘향아, 우리 말 노름이나 하여 보자.] [애고 참 우수워라. 말 놀음이 무엇이오?] 말 놀음 많이 하여 본 듯이, [천하에 쉽기야, 너와 나와 벗은 김에 너는 온 방바닥을 기어 다녀라. 나는 네 궁둥이에 딱 붙어서 허리를 잔득 끼고 볼기작을 내 손까락으로 탁 치면서 <아랴!>하거든, 호홍 그러면 퇴금질로 물러서며 뛰어라, 알심 있게 뒤어놀면 탈승짜(乘) 노래가 있느니라.
타고 노자 타고 노자 헌원씨(軒猿氏-중국 고대의 황제) 간과(干戈)를 써서 능히 큰 안개를 지어 치우(蚩尤) 탁녹야(琢鹿野)에 사로잡고 승전고를 울리면서 지남거(指南車)를 높이 타고 하우시(夏禹氏) 구년 치수 다스릴 제 육행승차(陸行乘車) 높이 타고 적송자(赤松子) 구름 타고 여동빈(呂東賓-당 시인) 백노 타고 이태백(李太白) 고래 타고 맹호연(孟浩然) 나귀 타고 태을선인(太乙仙人) 학을 타고 대국천자(大國天子) 꾀꼬리 타고 우리 전하(殿下)는 연(輦-왕의 수레)을 타고 삼정승(三政丞)은 평교자를 타고 육판서(六判書)는 초헌 타고 훙련대장은 수레 타고 각읍수령은 독교 타고 남원부사는 별연(別輦) 타고 일모장강 어옹(漁翁)들은 일엽편주 노도 타고 나는 탈 것 없었으니 금야 삼경 깊은 밤에 춘향 배를 넌짓 타고 홑이불로 돛을 달아 내 기계로 노를 저어 오목섬을 들어가니 순풍의 음양수를 시름없이 건너갈 제 말을 삼아 탈 양이면 걸음걸이 없을소냐 마부도 내가 되야 네 구정을 넌지시 잡아 구정 걸음 단부새로 뚜벅뚜벅 걸어라.
기총마(騎총馬) 뛰듯 뛰어라.] 온갖 장난을 다하고 보니 이런 장관이 또 있으랴. 이팔 이팔, 둘이 만나 비친 마음 세월가는 줄 모르던가 보더라. 춘향전(23)...興盡悲來 이때 뜻밖에 방자 나와, [도련님! 사또께옵서 부릅시오.] 도련님 들어가니 사도 말씀하시되, [여봐라! 서울서 동부승지(同副承旨)의 교지가 내려왔다. 나도 문부(文簿) 사정(査定)하고 갈 것이니, 너는 내행을 모시고 오늘로 떠나거라.] 도련님 부교(父敎)듣고 한편 반가우나 한편 춘향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여 사지의 맥이 풀리고 간장이 녹는듯, 두눈에서 더운 눈물이 퍽퍽 솟아 고운 얼굴을 적시거늘 사또 보시고, [너 왜 우느냐? 내가 남원에서 일생을 살 줄 알았더냐? 내직으로 승진되니 섭섭히 생각말고 오늘부터 치행(治行) 등절을 급히 차려 내일 오전으로 떠나거라.] 겨우 대답하고 물러나와 내아에 들어가 사람의 상중하(上中下)를 막론하고 모친께는 허물이 적은지라 춘향의 말을 울며 청하다가 꾸중만 실껏 듣고 춘향의 집으로 가는데, 설움은 기가 막히나 길거리에서 울 수 없어 참고 나오는데 속에서는 두간장이 끊어지듯 하였다. 춘향 문전에 당도하니 통째 건데기째 보째 왈깍 쏟아져 나오니, [어푸어푸 어허.] 춘향이 깜짝 놀래어 왈깍 뒤어 내달아, [애고 이게 웬일이오? 안으로 들어가시더니 꾸중을 들으셨소? 노상에 오시다가 무슨 분함 당하셨소? 서울서 무슨 기별이 왔다더니 상부를 입으셨소? 점잖으신 도련님이 이것이 웬일이오?] 춘향이 도련님 목을 담쑥 안고 치마자락을 걷어 잡고 고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이리 씻고 저리 씻으면서, [우지 마오, 우지 마오.] 도련님 기가 막혀 울음이란 게 말리는 사람이 있으면 더 울게 되는 것이었다. 춘향이 화를 내어, [여보 도련님, 아가리 보기 싫소. 그만 울고 내력이나 말하오.] [사또께옵서 동부승지(승정원의 正三品 벼슬)로 승차하셨소.] 춘향이 좋아하며, [댁의 경사요, 그래서 그러면 왜 운단 말이오?] [너를 버리고 갈 터이니 내 아니 답답하냐?] [언제는 남원 땅에서 평생 살으실 줄 알았소? 나와 같이 어찌 함께 가기를 바라리요. 도련님 먼저 올라가시면 나도 예서 팔것 팔고 추후에 올라갈 것이니 아무 걱정 마시오. 내 말대로 하였으면 군색치 않고 좋을 것이오. 내가 올라가더라도 도련님 큰댁으로 가서 살 수 없을 것이니 큰댁 가까이 조그마한 집 방이나 두엇이면 족하오니 염탐하여 두소서. 우리 식구 가더라도 공밥 먹지 아니할 터이니 그렁저렁 지내다가 도련님 말만 믿고 장가 아니 갈 수 있소? 부귀 영총(榮寵) 재상가의 요조숙녀 가리어서 혼정신성(昏定晨省-아침저녁으로 부모님 문안 드림) 할지라도 아주 잊진 마옵소서. 도련님 과거하여 벼슬이 높아져 외방(外房) 가면 신내(新來-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住所에 가는 사람) 마마(높은 벼슬아치의 첩을 높여부르 말) 치행(治行)할 때 제 마마로 내세우면 무슨 말이 되오리까? 그리 알아 조처하오.] [그게 될 법한 말이냐? 사정이 그렇기로 네 말을 사또께는 못 여쭙고 대부인께 여쭈오니, 꾸중이 대단하시며 양반의 자식이 부형을 따라 하행(下行) 왔다가 화방(花房) 작첩(作妾)하여 데려간단 말이 앞길에도 해롭고 조정에 들어가면 벼슬도 못한다, 라고 말씀하시는구나. 불가불 이별이 될 수밖에 별 수 없다.]춘향전(24)...悲歌自嘆 춘향이 이 말을 듣더니 금시 낯빛이 변하여 요두전목(搖頭轉目)에 붉으락 푸르락 눈을 가느스럼하게 뜨고 눈썹이 꼿꼿하여지면서 코가 발심발심하며 이를 뽀도둑 뽀도둑 갈며 온 몸을 쑤신 입틀 듯하며, 매가 꿩을 차는 듯하고 앉더니, [허허 이게 웬말이오?] 왈칵 뛰어 달려들며 치마자락도 와드득 좌루룩 찢어 버리고 머리도 와드득 쥐어 뜯어 싹싹비벼 도런님 앞에 던지면서, [무엇이 엊지고 엊재요? 이것도 쓸데 없다.] 면경, 체경, 산호죽절(珊瑚竹節)을 두루쳐 방문 밖에 탕탕 부딪치며 발을 동동 굴러 손뼉치고 돌아 앉어서 자탄가(自歎歌)로 울며 하는 말이,
[서방 없는 춘향이가 세간살이 무엇하며 단장하여 누구 눈에 곱게 보일꼬. 몹쓸년의 팔자로다. 이팔 청춘 젊은 것이 이리 될 줄 어찌 알랴. 부질 없는 이내 몸은 허망하신 말씀으로 앞날의 신세 버렸구나. 애고 애고 내 신세야.] 천연히 돌아 앉아, [여보 도련님! 지금 막 하신 말씀 참 말이오, 농담이오? 우리들이 처음 만나 백년 언약 맺을 적에 대부인(大夫人)싸또께옵서 시키던 일이오니까? 핑게가 원말이오. 광한루서 잠깐 보고 내 집에 찾아 와서 침침 무인 야삼경에 도련님은 저기 앉고 춘향이 저는 여기 앉아 저한테 하신 말씀<굳은 맹약 어길 수 없다>고 전년 오월 단오날 밤에 내 손목 부여 잡고 우둥퉁퉁 밖에 나와 당중(堂中)에 우뚝 서서 경경(耿耿)히 맑은 하늘 천 번이나 가리키며 만번이나 맹세키로, 내 정녕 믿었더니 말경에 가실 때는 버리시니 이팔청춘 젊은 것이 낭군 없이 어찌 살꼬.
침침한 빈 방에서 긴긴 가을 밤에 이 시름을 다 어이할꼬. 애고 애고 내 신세야. 모지도다, 모지도다. 독하도다.독하도다. 서울 양반 독하도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존비 귀천 원수로다. 천하에 다정한 게 부부 정이 유별하건만 이렇듯 독한 양반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애고 애고 내 일이야. 여보 도련님, 춘향 몸이 천하다고 함부로 버려서도 그만인 줄로 아지마오. 팔짜 사나운 춘향이가 입이 써서 밥 못 먹고 잠 안와 잠 못 자면 며칠이나 살 듯하오?]춘향전(25)...丈母發惡 [상사(相思)로 병이 들어 애통하다 죽게 되면 슬프고 원통한 이 혼신이 원귀가 될 것이니 존중하신 도련님께 그건들 재앙이 아니겠소. 사람의 대접을 그리 마오. 죽고 싶구나. 애고 애고 서러워라.] 한참 이리 자진(自盡)하여 슬피 울 때 춘향모는 영문도 모르고,
[애고 저것들 또 사랑 쌈 났구나. 어 참 아니꼽다. <눈구석에 쌍가래톳 설 일> 많이 보네.]하고, 아무리 들어도 울음이 장차 길기로, 하던 일을 밀쳐 놓고 춘향 방 영창 밖으로 가만가만 들어가며 아무리 들어도 이별이더라.
[허허 이것 별일 났다.] 두 손뼉 땅땅 마주 치며, [허허 동네 사람 들어 보오, 오늘날로 우리 집에 사람 둘 죽습네.] 두 깐 마루 덥석 올라 영창문을 두드리며 우루룩 달려들어 주먹을 겨누면서, [이년 이년 썩 죽어라. 살아서 쓸데 없다. 너 죽은 시체라도 저 양반이 가지고 가게. 저 양반 올라가면 뉘 간장을 녹이려느냐? 이년 이년 말 듣거라. 내 일상 이르기를 후회되기 쉽느니라. 도도한 마음 먹지 말고 여염사람 가리어서 형세와 지체가 너와 같고 재주와 인물이 모두 너와 같은 봉황의 짝을 얻어 내 앞에서 노는 양을 내 눈으로 보았으면 너도 좋고 나도 좋지. 마음이 도도하여 남과 별로이 다르더니 잘 되고 잘 되었다.] 두 손뼉 꽝꽝 마주 치면서 도련님 앞에 달려들어, [나와 말 좀 하여봅시다. 내 딸 춘향을 버리고 간다 하니 무슨 죄로 그러시오? 춘향이가 도련님을 모신 것이 거의 일년 되었으니 행실이 그르던가, 예절이 그르던가, 바느질이 그르던가, 언어가 불순하던가, 잡스런 행실을 가져 노유장화 음란턴가, 무엇에 그르던가, 이 봉변이 웬일인가. 군자가 숙녀를 버리는 법, 칠거지악(七去之惡) 아니며는 못 버리는 줄 모르는가? 내딸 춘향 어린 것을 밤낮으로 사랑할 때, 안고 서서 눕고 지며 백년 삼만 육천일을 떠나서 살지 말자 하고 밤낮으로 어루더니 말경에 가실 때는 뚝 떼어 버리시니 버드나무 가지가 많다 한들 가는 봄바람을 어이 막으며 꽃 지고 잎 진 다음에 그 어느 나비가 다시 올까. 백옥 같은 내 딸 춘향의 꽃 같은 몸도 세월이 장차 늙어 고운 얼굴이 백수(白首)되면 시호시호 부재래(時乎時乎不再來)란 다시 젊어지지는 못하는 것이니 무슨 죄가 많아서 백년을 헛되이 하오리까, 도련님 가신 후에 내 딸 춘향 임 그릴 때 달 밝은 깊은 밤에 쌓이고 쌓인 수심에 어린것이 주인 생각 저절로 나서 초당 앞 섬돌 위에, 담배 피워 물고 이리 저리 다니다가 불꽃 같은 시름과 임 생각이 가슴에서 솟아나 손들어 눈물 씻고 후유 한숨을 길게 쉬고, 북편을 가리키며 한양 계신 도련님도 날과 같이 기루신지, 무정하여 아주 잊고, 편지 한 장 아니 하시면 잦은 한숨과 뜯는 눈물로 곱고 어여뿐 얼굴 다 적시고 제 방으로 들어가서 의복도 아니벗고 외로운 베개 위에 벽을 안고 돌아누워 밤낮으로 길게 한숨지며 우는 것은 병 아니고 무엇이오? 시름 상사(相思) 깊이 든 병 내 고쳐 주지 못하여 원통히 죽는다면 칠십당년 늙은 것이 딸 잃고 사위 잃고 태백산 가마귀가 게발을 물어다 던지듯이 혈혈 단신 이내 몸이 뉘를 믿고 산단 말인가. 남 못 할 일 그리마오. 애고 애고 서럽구나. 못 하시오, 몇 사람 신세를 망치려고 아니 데려가오? 도련님 대가리가 둘 돋쳤소? 애고 무서워라 이 쇳띵띵(쇠로 뭉쳐진 것)아.]
춘향전(26)...千愁蠻恨 왈칵 뛰어 달려드니, 이 말 만일 사또 귀에 들어가면 큰 야단이 나겠거든, [여보소 장모, 춘향만 데려가면 그만 아니요.] [그래 아니 데려가고 견뎌낼까?] [너무 덤벼들지 말고 여기 앉아 말 좀 듣소. 춘향을 데려간대도 가마쌍교(駕馬雙轎) 말을 태워 가자 하니 필경에는 이 말이 날 것인즉 달리는 변통할 수 없고 내 이 기막힌 중에서도 꾀 하나를 생각하고 있네마는 이 말이 입 밖에 나면 양반 망신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선조 양반이 모두 망신을 할 일이로세.] [무슨 말이 그리 좋은 말이 있단 말인가?] [내일 내행(內行)이 나오실 때 내행 뒤에 시주 모신 짐이 나올 터이니 배행은 내가 하겠네.] [그래서 어쩐다는 것이오?] [그만하면 알겠지.] [나는 그 말 모르겠소.] [신주는 모셔내어 내 창옷 소매에다 모시고 춘향은 요여(腰輿-혼백이나 신주를 모시는 작은 가마)에다 태워 갈 밖에 수가 없네. 걱정 말고 염려 마소.] 춘향이 그 말 듣고 도련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마소 어머니, 도련님 너무 조르지 마소. 우리 모녀는 평생 신세가 도련님의 장중에 매었으니 알아 하시라 당부나 하오. 이번에 아무래도 이별할 밖에 수가 없아오니 , 기왕에 이별이 될 바에는 가시는 도련님을 어이 조르리까마는 우선 갑갑하여 그러는 것 아니오? 어머니 그만 건너방으로 가옵소서.] [내일은 이별이 되는가 보오. 애고 애고 내 신세야 이별을 어찌할꼬. 여보 도련님.] [왜?] [여보 참으로 이별을 할 터이오?] 촛불을 돋워 키고 둘이 서로 마주 앉아 갈 일을 생각하고, 보낼 일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하고, 한숨질과 솟는 눈물에 흐느껴 울며 얼굴도 대어보고 손발도 만져보며, [날 볼 날이 몇 밤이오? 애닮다 나쁜 수작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니 나의 서러운 원정 들어보오. 육순에 가까운 저의 모친 일가친척 하나 없고 다만 외딸 저 하나라. 도련님께 의탁하여 영귀할까 바랬더니 조물(造物)이 시기하고 귀신이 방해하여 이 지경이 되었구나. 애고 애고 내 일이야. 도련님 올라가면 나는 누구를 믿고 사오리까? 천추에 사모치는 나의 회포 주야 생각 어이하리. 배꽃, 복사꽃 활짝 필 때, 수변(水邊) 행락 어이하며, 황국 단풍 늙어갈 때, 외로운 시절을 어이할꼬. 독수공방 긴긴 밤에 전전반측 어이하리, 쉬나니 한숨이요, 뿌리나니 눈물이요, 적막강산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우는 소리를 누가 막을 것이오며, 춘하추동 사시절에 첩첩이 쌓인 경물(景物) 보는 것도 수심이요 듣는 것도 수심이라.]춘향전(27)...靑娥惜別 애고 애고 슬피 울 때 이도령이 하는 말이, [춘향아, 우지 마라. 부슬소관첩재오(夫戌蕭關妾在吳-남편은 수관에 수자리살이 가 있고 아내는 오나라에 남아 있다는 뜻)라 소란의 부소(夫蕭)들과 오나라 정부(征婦-출정한 군인의 아내)들도 동서쪽에 간 임이 그리워 규중심처 늙어 있고 정객관산노기중(征客關山路畿重-출정군인은 아내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 까)에 관산의 정객(征客)이며 녹수부용(綠水芙蓉) 연뿌리를 캐는 여자 부부신정(夫婦新情)이 두텁다가 달빛어린 가을 산이 고요한데 연은 키어 임 생각하니 나 올라 간 뒤에라도 창 앞에 달 밝거든 천리상사(千里相思) 부디 말라.
너를 두고 가도 내가 일일 평분(平分) 십이시를 낸들 어이 무심하랴.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춘향이 또 우는 말이, [도련님 올라가면 살구꽃 피고 봄바람 부는 거리거리마다 보시나니 미색이요, 곳곳에 풍악소리 간 곳마다 화월(花月)이라. 호색(好色)하신 도련님 주야로 호강하실 때에 나 같은 먼 시골 천첩이야 손톱만치나 생각하오리까? 애고 애고 내 일이야.] [춘향이 우지마라. 한양성 남북촌에 옥 같은 여자와 아름다운 여자가 많건마는 규중심처 깊은 정 너밖에 없었다. 내 아무리 대장부인들 잠시인들 잊을소냐?] 서로 피차 기가 막혀 연연 이별 못 떠나는 것이었다.
도련님을 모시고 갈 후배 사령이 나올 때에 헐떡헐떡 들어 오며, [도련님 어서 행차하옵소서. 안에서 야단 났소. 사또께옵서 도련님 어디 갔느냐? 하옵기에 소인이 여쭙기를 <놀던 친구 작별하려고 문 밖에 잠간 나갔습니다>라고 하였사온즉 어서 행차하옵소서.]
[말 대령하였느냐?] [말 마침 대령하였소.] 백마는 가자고 하여 길게 울고 청아(靑娥)는 석별을 이기지 못하여 옷을 잡는다. 말은 가자고 네 굽을 치는데 춘향은 마루 아래 뚝 떨어져 도련님 다리를 부여잡고, [날 죽이고 가면 갔지 살리고는 모 가고 못 가느니.] 말 못하고 기절하니 춘향모 달려들어, [향단아, 찬물 어서 떠 오너라. 차를 달여 약 갈아라. 네 이 몹쓸년아 늙은 어미 어쩔려고 몸을 이리 상하느냐?] 춘향이 정신 차려, [애고 갑갑하여라.] 춘향모 기가 막혀, [여보 도련님, 남의 생떼 같은 자식을 이 지경이 원일이오? 절곡(節曲)한 우리 춘향 애통하여 죽게 되면 혈혈 단신 이내 신세 누굴 믿고 살란 말이오?] 도련님 어이 없어, [이봐 춘향아, 네가 이게 원일이냐? 나를 영영 안 보려느냐? 하양낙일(河梁落日)에 수운(愁雲)이 일어남은 소통국(蘇通國)의 모자 이별, 정객관산(征客關山) 노기중(路幾重)의 오희월녀(吳姬越女) 부부 이별, 편삽수유(編揷수萸) 소일인(少一人)은 용산(龍山)의 형제 이별, 서풀양관(西出陽關) 무고인(無故人)은 위성(渭城)의 붕우 이별, 그런 이별 많다해도 소식 들을 때가 있고 서로 만날 날이 있었으니 내가 이제 올라가서 장원급제하고 출신하여 너를 데려갈 것이니 울지 말고 잘 있거라. 돌이라도 망두석(望頭石-무덤 앞에 세운 돌기둥)은 천만년 지나도 광석(壙石)될 줄은 모르니 나무라도 상상목(相思木)은 창 밖에 우뚝 서서 일년 춘절 다 지나되 잎이 필 줄 모르며 병이라도 울화병은 자나 깨나 잊지 못하고 죽느니라. 네가 나를 보려거든 서러워 말고 잘 있거라.]춘향전(28)...狂風片雲
춘향이 할 수 없이, [여보, 도련님, 내 손의 술이나 마지막으로 잡수시오. 행찬(行饌) 없이 가시려면 제가 드리는 찬합 간직하셨다가 숙소 참에서 주무실 때에 저 본 듯이 잡수시오. 향단아, 찬합 술병 내 오너라.] 춘향이 한잔 술 가득 부어 눈물 섞어 드리면서 하는 말이, [한양성 가시는 길에 강가에 늘어선 푸른 나무들은 제 작별의 서러움을 머금었으니 제 정을 생각하시고 아름다운 시절이 되어 가는 비가 뿌리거든 길 위에 오가는 사람의 가슴에는 수심이 가득 차겠지요. 말에 오른 채 지치시어 병이 날까 염려되니, 방초무초(芳草茂草) 저문 날에는 일찍 들어 주무시고 아침날 풍우상(風雨狀)에 늦게야 떠나시며, 한 채쭉 천리마로 모실 사람 없사오니 부디부디 천금같이 귀하신 몸 조심하여 천천히 걸으시옵소서. 푸른 가로수가 우거져 늘어선 진나라 서울길 같은 길에 평안히 행차하옵시고 일자음신(一字音信)듣사이다. 종종 편지나 하옵소서.] 도련님 하는 말이, [소식 듣기는 걱정 마라. 요지(瑤池)의 서왕모(西王母-고대의 선녀인 서왕모가 주목왕을 만나 요지에서 잔치를 하였음)도 주목왕(周穆王)을 만나려고 한 쌍의 파랑새를 보내어 수천리 멀고먼 길에 소식을 전하였으며, 한무제 중랑장(中郞狀)은 상림원(上林苑) 군부(君夫) 앞에 일척의 금서(錦書)를 보냈으니 흰 비둘기와 파랑새가 없을 망정 남원인편(南原人便) 조차 없을소냐. 서러워 말고 잘 있거라.]
말을 타고 하직하니, 춘향이 기가 막혀 하는 말이, [우리 도련님이 가네가네 하여도 거짓말로 알았더니 말타고 돌아서니 참말로 가는구나.] 춘향이가 마부 불러, [마부야, 내가 문 밖에 나설 수가 없는 터이니 말을 붙들어 잠간 지체하여라. 도련님께 한 말씀 여쭐란다.] 춘향이 내달아, [여보 도련님, 이제 가시면 언제나 오시려오. 사철 소식 ㄱ어질 절(絶) 보내느니 아주 영절(永絶), 녹죽, 장송, 백의숙제, 만고 충절(忠節), 천산(千山)에 조비절(鳥飛絶), 와경에 인사절(人事絶), 죽절(竹節), 송절(松節), 춘하추동 사시절, 끊어저 단절(斷絶), 훼절(毁絶), 도련님은 날 버리고 박절히 가시니 속절 없는 이내 정절(貞節) 독수공방 수절할 때 어느 때나 파절(破節)할꼬. 첩의 원정(寃情) 슬픈 곡절, 주야 생각 미절(未絶)할 제 부대 소식 돈절(頓絶) 마오.] 대문 밖에 꺼구러져 섬섬한 두 손길로 땅을 꽝 꽝 치며, [애고 애고 내 신세야.] <애고>일성(一)聲 하는 소리 누른 먼지 휘날리는데 黃塵散漫 바람은 쏠쏠하고 風蕭索 정기(旌旗)는 빛이 없는데 旌旗無光 햇빛은 저물어가네 日色薄 엎어지며 자빠질 때 서원찮게 갈 양이면 몇날 며칠이 되는 지 모를래라. 도련님이 타신 말은 준마가편(駿馬加鞭)이 아니냐. 도련님 눈물 떨어뜨리고 훗기약을 당부하고 말을 채쳐 가는 양은 광풍의 조각구름과 같았더라.
29. 독숙공방(獨宿空房) 이때 춘향이 할 일 없이 자던 침방으로 들어가서, [향단아, 주렴 걷고 안석(案席) 밑에 베개 놓고 문닫아라. 도련님을 생시에는 만나보기 망연하니 잠이나 들면 꿈에나 만나보자. 예로부터 이르기를 꿈에 와 보이는 님은 신(信)이 없다고 일렸건만 답답히 기릴진대 꿈 아니면 어이 보리. 꿈아 꿈아 너 오너라. 수심 첩첩 한이 되어 몽불성(夢不成)을 어이 하랴, 애고 애고 내 일이야. 인간 이별 만사 중에 독숙공방 어이하리. 임 그리며 잠 못 이루는 내 심정, 그 누구가 알아 주리. 미친 마음 이렁저렁 흩어진 근심걱정 후리쳐 다버리고 자나 누우나, 먹고 깨나 임 못 보아 가슴 답답, 어린 모습 고운 소리가 귀애 쟁쟁하여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 보고지고, 듣고지고 듣고지고 임의 소리 듣고지고.] [전생 무슨 원수로 우리 둘 생겨나서 그리운 상사(相思)한테 만나 잊지마자 처음 맹세, 죽지 말고 한데 있어, 백년기약 맺은 맹세, 천금 주옥은 꿈 밖이요. 세상의 모든 일을 관계하랴. 근원 흘러 물이되고 깊고 깊고 다시 깊고 사랑 모여 뫼가 되어 높고 높고 디시 높아 끊어질 줄 모르거늘 무너질줄 어이 알리. 귀신이 방해하고 조물이 시기한다.] [하루 아침에 낭군을 이별하니 어느 날에 만나보리. 온갖 근심과 한이 가득하여 끝끝내 느끼워라. 옥안운빈(玉顔雲빈-여자의 귀밑 탐스런 머리)헛되어 늙는 한이 해와 달이 무정하다. 오동추야 달 밝은 밤에 어이 그리 더디 새며 녹음방초 비낀 곳에 해는 어이 더디 가는고, 이 그리운 마음 알으시면 임도 나를 그리워하련만 독숙공방 홀로 누어 다만 한숨 벗이 되고 구곡간장 굽이쳐서 솟아나니 눈물이라. 눈물 모여 바다 되고 한숨 지어 청풍되면 일엽편주 잡아 타고 한양 낭군 찾으련만 어이 그리 못 보는고. 우수(優愁) 명월 달 밝은 때 설심도군(심향을 태우면서 삐는 것) 느끼오니 분명한 꿈이로다.]
[달 걸린 밤 두견성은 임 게신 곳 비치련만 시중에 품은 수심 나 혼자뿐이로다. 밤빛이 창만한데 까물까물 비치는 게 창 밖에 개동불빛, 밤은 깊어 심경인데 앉았은들 임이 올까, 누웠은들 잠이 올까. 임도 잠도 아니 온다. 이 일을 어이하리. 아마도 원수로다.] [흥진비래(興盡悲來) 고진간래(苦盡甘來) 예로부터 있건마는 기다림도 적지 않고 그린 지도 오래건만, 일촌(一寸)간장에 굽이굽이 맺힌 한을 임 아니면 뉘게다 풀고. 명천(明天)이어 보살피어 수이보게 하옵소서.] [다하지 못한 인정 다시 만나 백발이 다하도록 이별 없이 살고지고, 묻노라 녹수청산, 우리 임 초췌한 행색, 갑자기 이별한 후에 소식조차 끈어졌구나. 인비목석(人非木石) 아닐진대 임도 응당 느끼리라. 애고애고 내 신세야.]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세월을 보내는데 이때 도련님은 올라갈 때 숙소마다 잠 못 이뤄, [보고지고 나의 사랑 보고지고, 낮이나 밤이나 잊지 못하는 우리 사랑, 날 보내고 그린 마음 속히 속히 풀으리라.]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 일구월심(日久月深) 마음을 굳게 먹고 등과(登科), 외방(巍榜-과거 갑과 첫째로 급제한 것)만 기다리더라. 30. 신관위의(新官威議) 이때 수삭만에 신관 사또 났으되 자핫골 변학도(卞學徒)라 하는 양반이 오는데 문필도 유려하고 인물과 풍채도 활발하고 풍류 속에 달통하여 외입(外入)속이 넉넉하되 흠이 있은니, 성정이 괴팍하고 사증(邪症-때때로 엉뚱한 행동을 한 것)을 겸하여 혹시 실덕도 하고 오결(誤決)하는 일이 간간이 있는 고로 아는 이들은 다 고집불통이라 하였다. 신연(新延-史屬들이 신임 원을 맞이하는 것)맞이 하인이 현신(現身-하인이 상전에 처음 뵈이는 것)할 때에
[사령들 현신이오.] [이방이오.] [감상(요리 감독)이오.] [수배(首陪-베슬아치 행차에 따르는 사령의 우두머리)요.] [이방 부르라.] [이방이오.] [그새 너의 골에 일이나 없느냐?] [네 아직 무고하옵니다.] [네 골은 관노(官奴)가 삼남(三南)에서 제일이라지?] [예 부림직 하옵니다.] [또 네 골은 춘향이란 계집이 매우 잘 생겼다지?] [예..] [잘 있느냐.] [무고하옵니다.] [남원이 예서 몇 리인고?] [육백 삼십리로소이다.] [마음이 바쁜지라 급히 치행(治行)하라.] 신연하인이 물러 나와, [우리 골에 일이 났다.] 이때 신관사도 출행(出行)날은 급히 하여 도임차로 내려올 때 위의(威儀)도 장할시고.
구름 같은 별연(別輦-왕의 수레와는 다르게 만든 수레)에 한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청장(靑杖)을 떡 벌리고, 좌우편을 부축하며 하인이 물색 진한 모시 천익(天翼), 백저(白苧) 전대(戰帶) 고를 늘여 엇비슷이 둘러매고 대모관자 통영 갓을 이마에 눌러 숙여 쓰고 청장줄 겹쳐 잡고, [에라! 물러섰다! 나가거라!] 출입할 때 감시가 지엄하고 좌우에 하인은 경마 뒤채 잡기에 힘을 쓴다. 통인이 말 고삐의 쌍 채찍 들고 갓쓰고 행차를 배행하여 뒤를 따르고 수배 감상 공방(工房)이며 신연 이방 의젓하다. 노자(奴子) 한 쌍, 사령 한 쌍, 양산으로 앞뒤를 가리고 따르며, 큰 길가에 갈라서고 백방(白房) 수주(水紬)일산 복판, 남수주(藍水紬)선을 둘러 주석 고리 얼른 얼른, 호기 있게 내려올 때, 전후에 벽제소리 청산에 울러퍼지고, 말을 재촉하는 높은 소리에 흰 구름이 무색하더라.
전주에 도착하여 경기전(慶基殿)객사에 연명하고 영문에 잠간 다녀 좁은 목을 썩 내달아 만마관(萬馬關) 노구바위를 넘어 임실을 얼른 지나 오수(獒樹)들려 점심먹고 그날로 도임할 때 오리정(五里亭)으로 들어 가더라.
천총(千摠)이 영솔하고 육방항인 청로도(淸路道)로 들어올 때 청도(淸道)기(旗) 한 쌍, 홍문기 한 쌍, 주작(朱雀), 남동각(南東角), 서남각(西南角), 홍초(紅초), 남문(藍紋) 한 쌍, 청룡(靑龍) 동남각(東南角), 서남각(西南角), 남초 한 쌍, 현무(玄武) 북동각(北東角) 북서각, 흑초(黑초) 홍문 한 쌍, 동사 순시(巡視) 한 쌍, 집사 한 쌍, 기패관 (旗牌官) 한 쌍, 군노 열 두 쌍, 좌우가 요란하다.
행군 취타(吹打) 풍악소리, 성동에 진동하고 삼현육각 권마성은 원근에 낭자하더라.
광한루에 보진하여 옷을 갈아입고 객사에 연명차로 남여(藍輿) 타고 들어갈 새 백성의 눈에 엄숙하게 보이려고 눈을 별로 궁글궁글하며 객사에 들어가 동현에 좌기하고 도임상을 잡순 후에,
[행수(行首) 문안이오.] 행수 군관의 집례(執禮)를 받고 육방관속의 현신을 받은 뒤 사또 분부하되, [수노(首奴) 불러서 기생 점고하라.]31. 기생점고(妓生點考) 호장(戶長)이 분부 듣고, 기생 안책 들여 놓고, 호명을 차례로 부르는데 낱낱이 글귀(句)를 붙여 부르는 것이더라.
[우후(雨後)동산 명월이.] 명월이가 들어오는데 비단치마자락을 거듬거듬 걷어다가 가는 허리에 딱 붙이고 아장아장 들어오더니 점고 맞고, 격식가춘 걸음으로, [나요-.] [어주축수 애산춘(漁舟逐水愛山春)에 양편 춘색이 아니냐, 도홍(桃紅)이.] 도홍이가 들어오는데 붉은 치마자락을 걷어 안고 아장아장 조촐걸음으로 들어오더니 점고 맞고, [나요.] [단산(丹山)의 저 붕이 짝을 잃고 벽오동에 깃들이니 산수의 신령이요 나르는 벌레의 정기라. 주려 죽을 막정 좁쌀이야 먹을 것이냐 굳은 절개 만수문전(萬壽門前), 채봉(彩鳳)이-.] 채봉이가 들어오는데 비단치마 두른 허리 맵시 있게 걷어 안고 미인의 고운 걸음으로 정(正)이 옳게 아장거려 들어와 점고 맞고 멋있는 진퇴로, [나요-.] [맑고 고운 연꽃은 절개가 곧으며 꽃 중의 군자와 같으니라. 묻노라 저 연화(蓮花) 어여쁘고 고운 태도, 화중군자 연심이-.] 연심이가 들어오는데 비단 옷을 걷어안고 비단버선 수놓은 신을 끌면서 아장거려 가만가만 들어오더니 맵시 있는 진퇴로, [나요-.] [화씨(和氏-거짓말 아니하는 표본)같이 밝은 달 푸른 바다에 들었는데 형산백옥 명옥이-.] 명옥이가 들어오는데 온 몸의 고운 태도, 오는 걸음 진중한데 아장아장 가만가만 들어오더니 점고맞고 맵시 있는 진퇴로, [나요-.] [구름은 엷고 바람은 가벼워 이제 한낮이 가까와 오는데, 꽃을 찾아 버드나무 서 있는 곳을 따라, 앞내를 지나가도다. 양류편금(揚柳片金)의 앵앵(鶯鶯)이-.] 앵앵이가 들어오는대 붉은 치마자락을 에후리쳐 가는 버들가지 같은 허리에 딱 붙이고 아장아장 걸어 가만가만 들어오더니 점고 맞고, 격식에 맞는 진퇴로, [나요-.] 사도 분부하되, [자주 불러라!] [예-.] 호장 분부 듣고 넉자 화도로 불으는데,[광한전(廣寒殿-달 나라에 있다고 상상하는 궁전) 높은 집에 봉숭아를 바치오던 고운 선비(仙妃)반겨보니 계향이-.] [예- 등대하였소.] [송하(松下)의 저 동자야 묻노라 선생 소식, 수첩 청산의 운심(雲深)이.] [예- 등대하였소.] [궁월에 높이 올라 계수나무 꽃을 꺾어 ㅇ절(愛折)이-.] [예-등대하였소-.] [차문주가 하처재(借問酒家何處在)요, 목동요지 행화(杏花).] [예- 등대하였소.] [이미산의 달은 반쪽만 산마루에 보이는데, 달 그림자는 달 평강수(平羌水)에 비추어 강물따라 흐르는구나 강선(江仙)이.] [예- 등대하였소.] [오동복판 거문고 타고 나니 탄금(彈琴)이-.] [예-등대하였소.] [팔월 부용, 군자의 모습은 만당추수(滿塘秋水) 홍련(紅蓮)이-.] [예 등대하였소.] [주홍빛 명주실 갖은 매듭, 차고나니 금낭(錦囊)이-.] [예 등대하였소.] 사또 분부하되, [한꺼번에 두서넛씩 부르라!] 호장이 분부 듣고 자주 부르는데, [양대선(陽臺仙), 월중선(月中仙), 화중선(花中仙)이.] [예 등대하였소.] [바람맞은 낙춘(落春)이.] [예 등대 들어가소.] 낙춘이가 들어오는데 제가 잔뜩 맵시 있게 들어오는 체하고 들어오는데 면도한다는 말은 듣고 이마에서 시작하여 귀 뒤까지 파헤치고, 분당장 한단 말은 들었던가 개분 석 냥 일곱 돈어치를 무데기로 사다가 성(城)같이 회칠하듯 반죽하여 온 낯에다 막 칠하고 들어오는데, 키는 사근내(沙斤乃-과천 근처의 지명)장승만한 년이 치맛자락을 훨씬 추어다 턱 밑에 딱 붙이고 무논(물논)의 곤이 결음으로 쩔룩 껑충껑충 엉금섭적 들어오더니 점고 맞고, [나요-.]32. 육방소동(六房騷動) 연연히 고운 기생도 그중에는 많건만 사또께옵서는 근본 춘향의 말을 높이 들었던지라 아무리 들으시되 춘향의 이름 없는지라 사또 수노(首奴) 불러 묻는 말이, [기생 점고 다 되어도 춘향은 안 부르니 그 년은 퇴기란 말이냐?] 수노 여쭈오되, [춘향모는 기생이로되 춘향은 기생이 아니옵니다.] 사또가 물었다.
[춘향이가 기생이 아니면 어찌 규중에 있는 아이의 이름이 높이 났느냐?] 수노 여쭈오되, [근본이 기생의 딸이옵고 덕생(德色)이 장한 고로 권문세족 양반네와 일등재사 한량들과 내려오신 사또마다 구경코자 간청하되 춘향모녀 듣지 않기로, 양반상하를 막론하고 액내(額內-같은 부튜에 속한 사람)의 소인들도 십년, 일득 대면하되 언어와 수작이 없었더니, 하늘이 정하신 연분인지 구관사또 자제인 이도령과 백년기약 맺사옵고 도련님 가실 때에 과거에 급제하면 데려간다 당부하고 춘향이도 그리 알고 수절하여 있습니다.] 사또 골을 내어, [이놈, 무식한 상놈인들 그게 어떠한 양반이라고 엄부시하요, 미장가전 도련님이 화방(花房)에 작첩하여 살자 할까. 이놈 다시는 그런 말 입 밖에 냈다가는 죄를 면치 못하리라. 이미 내가 저 하나를 보려고 하다가 못보고 그저 가랴. 잔말 말고 불러오라.] 춘향을 부르라는 명령이 내리자 이방, 호방이 여짜오되, [춘향이가 기생이 아닐뿐 아니오라, 전 사또 자제 도련님과 맹약이 중하옵고, 나이는 같지 아니하오나 동반(同班)의 분의(分義)로 부르라 하시니, 사또님 체모가 손상할까 걱정되나이다.]
사또 크게 노하여, [만일 춘향을 시각 지체하다가는 이방 형방들 이하 각청 두목을 하나같이 파면시켜 버릴 것이니 어서 빨리 대령시키지 못할까?] 육방이 소동을 치고 각청 두목이 ㅇ을 잃어, [김번수(金番手-번수는 번갈라 가며 호위하는 사람)야, 이번수야, 이런 별일이 또 있느냐? 불쌍하도다. 춘향 정절이 가련하게 되기 쉽다. 사또 분부 지엄하니 어서 가자, 바삐 가자.] 사령관노(使令官奴) 뒤섞여서 춘향집 문전에 당도하니, 이때 춘향이는 사령이 오는지 군노가 오는지 모르고, 주야로 도련님만 생각하여 우는데, 망측한 환(患)을 당하려 하니 소리가 화평할 수 있으며, 한 때라도 공방(空房)살이 할 게집아이라, 목청은 청승이 끼어 자연 슬픈 애원성이 되는 것이어서, 보고 듣는 사람의 심장(心腸)인들 아니 상할소냐. 임 그리워 설운 마음 식불감 밥 못 먹고 침불안석 잠 못 자고, 도런님 생각 적상(積傷)되어 피골이 모두 다 상접이라. 양기가 쇠진하여 진양조(盡陽調-국악의 장단)란 울음이 되어, [갈까부다 갈까부다. 임을 따라 갈까부다. 비바람도 쉬어 넘고, 길들인 매거나 길 안 들인 매거나 해동청 보라매도 쉬어 넘는 고봉정상(高峰頂上) 동선령(洞仙嶺)고개라도 임이 와 날 찾으면 나는 신발 벗어 손에 들고 나는 아니 쉬어 갈래. 한양 계신 우리 낭군, 나와 함께 그리는가. 무정하여 아주 잊고 나의 사랑을 옮겨다가 다른 임을 사랑하는가.] 한참 이리 섧게 울 때 사령들이 춘향의 슬픈 소리를 듣고 사람이 나무나 돌이 아닌 바에야 감심되지 않을 수 없다. 육천 마디의 사대육신(四大六身)이 낙수춘빙(落水春氷) 얼음 녹듯 탁 풀리어,
[대처 이 아니 참 불상하냐? 이에 외입한 자식들이 저런 계집을 추앙하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로다.]33. 일편단심(一片丹心) 이때 재촉사령이 나오면서, [이리 오너라!] 외치는 소리에 춘향이 깜짝 놀라 문틈으로 내다보니 사령군노들이 나왔구나.
[아차차 잊었네. 오늘이 그의 삼일 점고라 하더니 무슨 야단이 났나 보다.] 밀창이 여당기며, [허허 번수(番手)님네 이리 오소, 이리 오소, 오시기 뜻 밖이네. 이번 신연(新延) 길에 노독이나 아니 났으며 사또 정체(政體-정치의 형편과 체제) 아떠하며, 구관댁에 가 보셨으며, 도련님편지 한장도 아니 하시던가. 내가 지난 날에는 양반을 모시기로 이목이 번거롭고 도련님 정체가 유달라서 모르는 체하였건만, 마음조차 없을손가. 들어사세, 들어가세.] 김번수며 이번수며 여러 번수 손을 잡고 제 방에 앉힌 후에 향단을 불러, [주반상 들여라.] 취하도록 먹인 후에 궤 문을 열고 돈 닷냥을 내어 놓으며, [여러 번수님네. 가시다가 술이나 잡숫고 가옵소서. 뒷일이 없게 하여 주오.] 사령관들이 약주에 취하여 하는 말이, [돈이라니 당치도 않다. 우리가 돈 바라고 네게 왔겠느냐?]하며,
[들여 놓아라.] [김번수야 네게 차라.] [할 수 없다만은, 입수(엽전의 잎수)나 다 옳으냐?] 돈 받아 차고 흐늘흐늘 들어갈 때 행수 기생이 나온다. 행수 기생이 나오며 두 손벽 딱딱 마주 치면서, [여봐라 춘향아, 말 듣거라. 너만한 정열은 나도 있고 너만한 수절은 나도 있다. 너많한 정절이 왜 없으며 너만한 수절이 왜 없느냐? 정절부인 애기씨, 수절부인 애기씨, 조그마한 너 하나로 말미아마 육방이 소동하고, 각청 두목이 다 죽어난다. 어서 가자 바삐 가자.] 춘향이 할 수 없이 수절하던 그 태도로 대문 밖에 썩 나서며, [형님 형님 행수 형님, 사람의 괄세를 그리마오. 그대라고 대대 행수이며, 나라고 대대로 춘향인가. 인생일사 도무사(都無事)지,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동현에 들어가, [춘향이 대령하였소.] 사또 보시고 크게 기뻐하며, [춘향이가 틀림 없구나. 대상(臺上)으로 오르거라.] 춘향이 상방(上房-상위의 방)에 올라가 무릎을 여미고 단정히 앉을 뿐이다. 사또가 크게 혹하여, [책방에 가서 회계(會計) 나릿님을 오시래라.] 회계 생원이 들어오는 것이더라.
사또 크게 기뻐, [자네 보게. 저게 춘향일세.] [하 그년 매우 이쁜데, 잘 생겼소. 사또께서 서울 계실 때부터 춘향, 춘향 하시더니 한 번 구경할 만하오.] 사또 웃으며, [자네 중신 하겠나?] 이윽히 앉았더니, [사또께서 애당초에 춘향이 부르시지 말고 매파(媒婆)를 보내어 보시는 게 옳을 것을 일이 좀 경(輕)히 되었소마는 이미 불렀으니 아마도 혼사할 밖에 수가 없소.] 사또 크게 기뻐하며 춘향더러 분부하되, [오늘부터 몸 단장 정히 하고 수청을 거행하라.] [사또님 분부 황송하나 일부종사 바라오니 분부 시행 못하겠소.]34. 처신수천(妾身雖賤) 사또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아름답고 아름다운 계집이로다. 네가 진정 열녀로다. 네 정절 굳은 마음 어찌 그리 어여쁘냐. 당연한 말이로다. 그러나 이수재(이도령)는 경성 사대부의 자제로서 명문귀족의 사위가 되었으니, 한 때 사랑으로 잠깐 희롱하던 너를 조고만치나 생각하겠느냐? 너는 본시 절행(節行)이 있어 평생을 수절하다가 고운 얼굴이 늙어지고 백발이 드리우면 무정세월이 흐르는 물 같음을 탄식할 때 불쌍하고 가련한 게 너 아니냐. 네 아무리 수절한들 너를 열녀로 표창하여 줄 사람이 어데 있느냐? 그는 다 버려 두고 네 고을 관장에게 매이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동자놈에게 매이는 것 옳으냐? 네가 말을 좀 하여라.] 춘향이 여쭈오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절개를 지킨다 함을 본받고자 하옵는데, 수차로 분부가 이러하오니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옵고, 정절이 있는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못하오니 처분대로 하옵소서.] 이때 회계나리가 썩 나서며 하는 말이, [네 여봐라! 그년 요망한 년이로고. 부의(하루사리) 같은 인생일생 소천하여 일색이라. 네 여러번 사양할 게 무엇이냐? 사또께옵서 너를 추앙하여 하시는 말씀인데 너 같은 창기배(娼妓輩)에게 수절이 무엇이며 정절이 무엇인가. 구관은 전송하고 신관을 영접함이 법전(法典)에 당연하고 사례에도 당당하거든 고이한 말 내지 말라! 너 같은 천한 기생 무리에 충절 두 자가 어디 있느냐?] 이때 춘향이는 하도 기가 막혀 천연히 앉아 여쭈오되, [충효(忠孝) 열녀에 상하(上下)있소? 자상히 들으시오. 기생으로 말합시다. 충효열녀 없다하니 낱낱이 아뢰리다. 해서(海西-황해도) 기생 농선(弄仙)이는 동선령(洞仙嶺)에 죽어 있고, 선천 기생은 아이로되 칠거학문 들어 있고, 진주 기생 논개(論介)는 우리 나라 충렬로서 충렬문(忠烈門)에 모셔 놓고 두고 두고 제사를 지내오며, 청주 기생 화월(花月)이는 삼층각(三層閣)에 올라 있고, 평양기생 월선(月仙)이는 충열문에 들어 있고, 안동 기생 일지홍은 생열녀문(生烈女門) 지은 후에 정경가자(貞敬加資) 있사오니 기생 너무 업수이 보지 마옵소서.] 춘향이 다시 사또 앞에 여쭈오되, [당초 이수재(李秀才) 만날 때에 태산(泰山)과 서해(西海)의 굳은 마음 소첩의 일심정절(一心貞節)을 맹부 같은 용맹으로 빼어 내지 못할 터요,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의 말 재주인들 첩의 마음 옮겨가지 못할 터이요, 공명(제갈공명)선생의 높은 재주는 동남풍을 빌었으되 일편단심 소녀의 마음은 굴복시키지 못하리라. 기산(箕山)의 허유(許由)는 요임금의 대리됨을 받지아니하였고 서산의 백숙양인(伯叔兩人) 주나라의 쌀을 먹지 아니 하였으니, 만일 허유가 없었으면 고도지사(高蹈之士) 누가 하며 만일 백이숙제가 없었으면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많으리다. 첩인이 비록 천하다 하여도 허유와 백이숙제를 모르리까. 사람의 첩이 되어 지아비를 배반하고 집안을 버리옴이, 벼슬하는 관장님네의 임금을 배반함과 같사오니 처분대로 하옵소서.] 사또 크게 노하여, [이년 들어라. 모반대역하는 죄는 능지처참하게 되고 관장을 조롱하는 죄는 기시율(棄市律-죄인을 저자에 버리는 중국의 형벌)에 처한다고 씌어 있으며, 관장을 거역한 죄 엄형에 처하고 정배(定配-귀양 보내는 것) 보내느니라. 죽는다고 설워 말라.]
35. 유부겁탈(有夫劫奪) 춘향이 악 쓰며, [유부녀를 겁탈하는 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오?] 사또는 기가 막혀 어찌나 분하던지 연상(硯床-작은 책상)을 두드릴 때 탕건이 벗어지고 상투고가 탁 풀리고 첫마디에 목이 쉬어, [이년을 잡아 내려라!] 호령하니, 골방의 수청 통인이 [예-]하고 달려들어, 춘향의 머리채를 주르르 끌어내며, [급창!] [예-] [이년 잡아 내려라!] 춘향이가 뿌리치며, [놓아라.] 중계로 내려가니 급창이 달려들어, [요년 요년, 어떠하신 존전(尊前)이라고 대답이 그러하고 살기를 바랄소냐?] 대뜰 아래 내려 치니 맹호 같은 군노 사령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감태(甘笞-김의 일종)같은 춘향의 머리채를 어린 시절 연실 감듯, 뱃사공의 닻줄 감듯, 사월 팔일 등대(燈臺)감듯 휘휘 친친 감아쥐고 동댕이쳐 엎지르니, 불쌍하다 춘향 신세 백옥 같던 고운 몸이 육자배기로 엎어졌구나.
좌우에 나졸들이 서서 능장, 곤장, 형장이며 주장을 집고, [아뢰라! 형리(刑吏)를 대령하라!] [예-.머리 숙여라! 형리요.] 사또는 어찌나 분이 났던지 벌벌 떨며 기가 막혀 '허푸허푸'하며,
[여봐라! 그년에게 무슨 디짐이 필요하리. 묻지도 말고 형틀에 올려 매고 골통을 부수고 물곳장(物故狀-죄인 죽이는 것을 보고하는 글) 을 올려라.] 춘향을 형틀에 올려매고 옥사장의 거동을 보라. 형장이며 태장이며 곤장이며 한 아름 담쑥 안아다가 형틀 아래 좌르륵 부ㄷ치는 소리에 춘향의 정신이 혼미하다. 집장사령의 거동을 봐라. 이놈도 잡고 능청능천 저놈도 잡고서 능청능청 등심 좋고 빳빳하고 잘 부리는 놈 골라 잡고 오른 어깨 벗어메고 형장(刑杖)을 집고 청령(廳令)이 내리기를 기다릴 때, [분부 받아라. 그년을 사정두고 헛 때려서는 당장에 목을 자를 것이니 각별히 매우 처라.] 집장사령이 여쭙기를, [사또님의 분부가 지엄한데 저런 년을 무슨 사정 두오릿까? 이년 다리를 까딱 마라! 만일 요동하였다가는 뼈 부러지리라.]
호통하고 들어서서 검장(檢杖-형구의 하나)소리 발 맞추어 서면서 가만히 하는 말이, [한두개만 견디소. 어쩔 수가 없네. 요 다리는 요리 틀고 저 다리는 저리 트소.] [매우 처라!] [예잇 때리오.] 딱 붙어서 부러진 형장개비는 푸루륵 날아 공중에 잉잉 솟아 상방(上房) 대뜰 아래 떨어지고 춘향이는 아무쪼록 아픈데를 참으려고 이를 북북 갈며 고개만 빙빙 두르면서, [애고 이게 웬 일이어!]36. 십장애가(十杖哀歌) 곤장 태장을 치는 데는 사령이 서서 하나 둘 세건마는 형장부터는 법장(法杖)이라 형리와 통인이 닭싸움하는 모양으로 마주 엎디어서 하나 치면 하나 긋고, 둘 치면 둘 긋고, 무식하고 돈 없는 놈이 술집 바람벽에 술 값 긋듯 그어 놓으니 한일자(一字)가 되었구나. 춘향이는 저절로 설움에 겨워 맞으면서 우는데, [일편단심 굳은 마음은 일부종사의 뜻이오니, 한날 매를 친다고 일년이 다 못 가서 조그만치라도 내 마음 변하오리까?]
이때 남원부의 한량이며 남녀노소 없이 모두 모여 구경할 때 좌우의 한량들이, [모질구나 모질구나. 우리 골 원님이 모질구나. 저런 형별이 또 있으며 저런 매질이 또 있을까? 집장사령을 눈 익혀 두어라. 삼문 밖에 나오면 급살(急殺)을 주리라.] 보고 듣던 사람들은 모두 눈물 흘리더라.
둘째번의 매를 치니, [이부절(二夫節)을 아옵는데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내 마움 이 매 맞고 아주 죽어도 이도령은 못 잊겠소.] 세째번의 매를 치니, [삼종지례(三從之禮) 중한 법 삼강오륜 알았으니 세 차례의 형문(刑問)을 받고 정배를 갈지라도 삼청동에 계시는 우리 낭군 이도령을 못 잊겠소.] 네째번 매를 치니, [사대부 사도님은 사민공사(四民公事-백성에 대한 네가지 공사'士.農.工.商') 살피지 않고 위력공사(威力公事)에만 힘을 쓰니 사십팔방(坊) 남원백성 원망함을 모르시오 사지를 가른대도 사생동거(死生同居) 우리 낭군 사생간(死生間)에 못 잊겠소.] 다섯째번 매를 치니, [오륜륜기(五倫倫紀) 그치지 않고 부부유별 오행(五行)으로 맺은 연분 올올이 찢어낸들 오매불망 우리 낭군 온전히 생각 나네. 오동추야 밝은 달은 임 게신데 보련마는 오늘이나 편지 얼가. 내일이나 기별 올까. 무죄한 이 내 몸이 악사(惡死) 할 리 없사오니 오결(誤決) 죄수 마옵소서. 애고 애고 내 신세야.] 여섯째번 매를 치니, [육육은 삼십육으로 낱낱이 고찰하여 육만번 죽인데도 육천 마디 얽힌 마음 변할 수 젼혀 없소.] 일곱째번 매를 치니, [칠거지악(七去之惡)범하였소? 칠거지악이 아니어든 칠개형문이 원일이오? 칠척 검 드는 칼로 동강동강 잘라서 이제 바삐 죽여 주오. 치라하는 저 형방아 칠 때마다 살피지 마오. 칠보홍안(七寶紅顔-아름다운 얼굴) 나 죽겠네.] 여덟째번 매를 치니, [팔자 좋은 춘향몸이 팔도 방백 수령 중에 제일 명관 만났구나. 팔도방백 수령님네 치민(治民)하려 내려왔지 악형하려 내려왔소?] 아홉째번 매를 치니, [구곡간장 굽이 썩어 이내 눈물 구년지수(九年之水) 되겠구나. 구고(九고-깊숙한 곳) 청산 장송 베어 정강선 무엇 타고 한양성중 급히 가서 구중궁궐 나랏님께 구구히 억울한 사정을 여쭈옵고 구정(九庭) 뜰에 물러 나와 삼청동을 찾아가서 굽이굽이 반겨 만나 우리 사랑 맺힌 마음을 마음껏 풀련마는.] 열번째 매를 치니, [십생구사(十生九死)할지라도 팔십년 정한 뜻을 십만번 죽인대도 가망 없고 무개내지. 십육세 어린 춘향 곤장맞아 원통한 귀신 되니 가련하고 가련하오.] 열 치고 구만 둘 줄 알았더니 열 다섯째번 매를 치니, [십오야 밝은 달은 떼구름에 묻혀 있고 서울 계신 우리 낭군 삼청동에 묻혔으니 달아 달아 임 보느냐? 임 계신 곳 나는 어이 못 보는고.] 스물치고 끝날까 하였더니 스물 다섯 매를 치니, [이십 오현 야탄월에 불승청원(不勝淸怨) 저 기러기, 너 가는데 어디메냐. 가는 길에 한양성 찾아들어 삼청동 우리 님께 내 말 부디 전해다오. 나의 모습을 자세히 보고 부디부디 잊지 말라.]
37. 무남독녀(無男獨女) 삼십삼천(三十三天-六慾天의 둘째 하늘)어린 마음을 옥황전에 아뢰려고 옥 같은 춘향 몸에 솟느니 유혈이오, 흐르느니 눈물이라. 피눈물 한데 흘러 무릉도원(武陵桃源)의 홍류수(紅流水)라.
춘향이 점점 악쓰며 하는 말이 , [소녀를 이리 말고, 능지 처참하여 박살하여 죽여 주면 뒤에 원조(怨鳥)라는 새가 되어 초혼조(招魂鳥) 함께 울어 적막공산 달 밝은 밤에 우리 이도령님 잠든 후 파몽(破夢)이나 하여 지이다.
말 못하고 기절하니 엎뎌 있던 형방 통인 고개 들어 눈물 씻고, 매질하던 저 사령도 눈물 씻고 돌아서며, [사람의 자식은 이 짓 못하겠네.] 좌우의 구경하는 사람과 거행하는 관속들이 눈물 씻고 돌아서며,
[춘향이 매맞는 거동 사람 자식 못 보겠다. 모지도다, 모지도다. 춘향 정절이 모지도다. 하늘이 낸 열녀로다.] 남녀노소 없이 서로 눈물 흘리며 돌아설 때 사또인들 좋을 리가 있으랴.
[네 이년! 관청 뜰에서 발악하여 맞으니 좋은 게 무엇이냐? 일후에도 또 그런 거역을 할까?] 반은 죽고 반은 사는 저 춘향이 점점 악쓰며 하는 말이 , [여보 사또 들으시오. 죽기로 결심하고 먹은 마음을 어이 그리 모르시오. 계집의 품은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리칩니다. 원통한 혼이 하늘로 다니다가 우리 나랏님 앉은 곳에 이 원정을 아뢰오면 사또인들 무사하랴. 덕분에 죽여주오.] 사또 기가 막혀, [허허 그년 말못할 년이로고, 큰 칼 씌워 옥에 가두어라.]
하니 큰칼 씌워 인봉(印封)항여 옥사정이 등에 업고 삼문 밖을 나올 때에 기생들이 나오며, [애고 서울 집아, 정신차리게. 애고 불쌍하여라.] 사지를 만지며 약을 갈아 들이며 서로 보고 눈물질 때 키크고 속 없는 낙춘(落春)이가 들어오며, [얼시구 절시구 좋을시구, 우리 남원도 현판(懸板)감이 생겼구나.] 왈칵 달려들어, [애고 서울집아 불쌍하여라.] 이리 야단할 때 춘향의 모가 이 말 듣고 정신없이 들어오더니 춘향이 목을 안고, [애고 이게 웬일이냐? 죄는무슨 죄며 매는 무슨 매냐. 장청(杖廳)의 이방님, 내 딸이 무슨 죄요. 장군방(杖君房-혀을 행하는 공청)의 두목들아 집장하던 쇄장(鎖匠)이도 무슨 원수 맺혔더냐? 애고 내 일이야.
칠십 당년 늙은것이 의지할데 없이 되었구나. 무남독녀 내 딸 춘향 규중에 은근히 길러 내어 밤낮으로 서책만 놓고 내측편(內側篇) 공부 일삼으며 날 보고 하는 말이 마오 마오 서러워 마오 아들 없다 서러워 마오. 외손봉사(外孫奉仕) 못하리까. 어미에게 지극한 정성 곽거(郭巨-漢나라의 효자)나 맹종(孟宗)인들 내 딸보다 더할손가. 자식 사랑하는 법이 상중하가 다를손가. 이내 마음 둘데 없네. 가슴에 불이 붙어 한숨이 연기로다. 김번수야 이변수야, 웃령이 지엄하다고 이다지도 몹시 친단 말이냐. 애고 내 딸 장처(杖處) 보소. 빙설 같던 두 다리에 연지 같은 피 비쳤네. 명문가의 규중부(閨中婦)야 눈먼 딸도 원하더라. 그런떼 왜 못 생긴 기생 월매 딸이 이 모양이 웬일이냐? 춘향이 정신 차려라. 애고 애고 내 신세야.] 하며,
[향단아, 삼문 밖에 가서 삯군 둘만 사오너라. 서울 쌍급주(雙急走-급한 심부름꾼) 보낼란다.] 춘향이 쌍급주 보낸단 말을 듣고, [어머니 마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만일 급주가 서울 올라가서 도련님이 보시면은 층층 시하에 어찌할 줄 몰라 심사가 울적하여 병이 되면 그것인들 아니 훼절(毁節)이오? 그런 말씀 마시고 옥으로 가사이다.]38. 옥중명화(獄中名花)옥사장의 등에 업혀 옥으로 들어갈 때 향단이는 칼 머리 들고 춘향 모도 뒤를 따라 문앞여 당도하여, [옥형방(獄刑房) 문을 여소. 옥형방도 잠들었나?] 옥 중에 들어가서 옥방의 모양을 살펴보니 부서진 죽창 틀에 살 쏘나니 바람이요, 무너진 헌 벽이며 헌 자리에 벼룩 빈대가 온 몸으로 기어든다.
이때 춘향이 옥방(獄房)에서 장탄가(長嘆歌)로 울던 것이었다. 이내 죄가 무슨 죄냐 국곡투식(國穀偸食-국고의 쌀 도둑질) 아니거든 엄형중장 무슨 일고 살인죄인 아니어든 항쇄 족쇄(목과 발에 채운 형구) 웬일이며 역율(逆律) 강상(綱常) 아니어든 사지 결박 웬일이며 음양도적(陰陽盜賊-간통죄) 아니어든 이 형벌이 웬일인고 삼강수(三江水)는 연수(硯水)되어 푸른 하늘은 한 장 종이 삼아 나의 설음을 하소연하여 옥항상제 앞에 올리고저 낭군을 그리워하여 답답하여 불이 붙네 한숨이 바람 되어 붙은 불을 더 부치니 속절 없이 나 죽겠네 홀로 섰는 저 국화는 높은 절개 거룩하다 눈 속의 푸른 솔은 천고절(千古節)을 지켰구나 푸른 솔은 나와같고 누런 국화 낭군같이 슬픈 생각 뿌리느니 눈물이요 적시느니 한숨이라 한숨은 청풍(淸風) 삼고 눈물은 세우(細雨) 삼아 청풍이 세우를 몰아다가 불거나 뿌리거니 임의 잠을 깨우고저 견우와 직녀성은 칠석 상봉(七夕相逢) 만날 때에 은하수 막으되 실기(失期)한 일 없었건만 우리 낭군 계신 곳에 무슨 물이 막혔는지 소식조차 못 든는고 살아 이리 그리워하느니 아주 죽어 잊고 싶구니 차라리 이 몸 죽어 공산의 두견 되어 이화월백(梨花月白) 삼경야에 슬피 울어 낭군 귀에 들리고저 청강의 원앙이 되어 짝을 불러 다니면서 다정하고 유정함을 임의 눈에 보이고더 삼춘(三春)의 호접 되어 향기 묻은 두 나래로 봄빛을 자랑하여 낭군 옷에 붙고 싶구나 맑은 하늘에 밝은 달이 되어 밤이 되면 돌아 오리라 밝고 밝고 또 밝은 빛으로 임의 얼굴 비추고저 이내 간장 썩는 피로 임의 모습을 그려내어 방문 앞에 족자(簇子) 삼아 걸어 두고 들며 나며 보고 싶구나 수절정절 절대가인(絶對佳人) 참혹하게 되었구나 문채 좋은 형산의 백옥이 먼지 무더기에 묻혔는 듯 향기로운 상산초(商山草-진시화의 난을 피해 상산에 숨어서 연명하던 紫芝草)가 잡풀 속에 섞였는 듯 오동 속에 놀던 본황이 가시밭 속에 깃들인 듯 자고로 성현네도 무죄하고 국계시니 요순우탕(堯舜禹湯) 임금님도 걸주(傑紂-중국의 폭군들)의 폭악으로 함진옥에 갇혔더니 도루 놓여 나와 성군이 되시고 명덕치민(命德治民) 주문왕(周文王)도 상주(商紂)의 해를 입어 우리옥(주문왕이 갇혔던 곳)에 갇혔더니 도로 놓여 성군이 되고 만고의 현인 공부자(孔夫子)도 양호(陽號-魯나라 李씨의 家臣)의 얼을 입어 관야(관野)에 갇혔더니 도로 놓여나 대성(大聖) 되시니 이런 일로 볼 것이면 죄 없는 이내 몸도 살아나서 세상 구경 다시 할까 답답하고 원통하다 날 살릴 이 누구 있을까 서울 계신 우리 낭군 벼슬길로 내려와서 이렇듯이 죽어갈 때 내 목숨을 못 살릴까 하운(夏雲)은 다기봉(多奇峰)하니 산이 높아 못 오시는가 금강산 상상봉이 평지 되거든 오시려나 병풍에 그린 누른 닭이 두 나래를 툭툭 치며 사경(四更) 일점(一點)에 날 새라고 울거든 오시려는가 애고 애고 내 일이야 죽창문을 열어 젖히니 밝고 깨끗한 달빛은 방 안으로 든다만은 어린 것이 홀로 앉아 달한테 묻는 말이, [저 달아 보느냐. 임 계신 데 밝은 기운 비춰라.
나도 좀 보자꾸나. 우리 임이 누었더냐 앉았더냐. 보는 대로만 네가 일러 나의 수심 풀어 다오.]39. 황릉지묘(黃陵之廟) 애고 애고 섧이 울다가 홀연히 잠이 드니, 비몽사몽간에 호랑나비가 장주(莊周)되고 장주가 호랑나비로 되어 가랑비같이 남은 혼백 바람인 듯 구름인 듯한 곳에 다다르니 하늘은 푸르고 땅은 넓은데 산은 영검스러웁고 물은 아름다운데 은은한 대숲 속에 그림 같은 누각 하나가 반공에 잠겼거늘, 대체 귀신이 다니는 법은 큰 바람이 일고 승천입지(昇天入地)하니 <베개 위의 짧은 시간 봄꿈 속에서 강남 수천리를 갔었다>.
앞쪽을 살펴보니 황금 대자(大字)로, <만고 정열황릉지묘(萬古貞烈黃陵之廟)>라 뚜렷이 붙었거늘, 심신이 황홀하여 배회했더니 천연히 낭자 셋이 나오는데 석숭(石崇-晉나라부자, 그에게 綠珠라는 첩이 있었는데 아름답고 피리를 잘 불렀다. 그런데 이 첩을 孫秀가 뺏으려고 석숭을 강금했다. 그러나 녹주는 절개를 지키고 석숭을 구하려고 자살을 했다)의 애첩 녹주가 등롱을 들고 진주기생 논개(論介), 평양 기생 월선(月仙)이었다. 춘향을 인도하여 내당에 들어가니 당상에 백의 입은 두 부인이 옥수(玉手)를 들어 청하거늘 춘향이 사앵하되, [속세의 천한 게집이 어찌 황릉묘(黃陵廟)에 오르리이까?]
부인이 기특히 여겨 재삼 청하거늘 사양치 못하여 올라가니 자리를 주어 앉힌 후에, [네가 춘향이냐? 기특하도다. 일전에 조회(朝會)차로 요지연(瑤池宴)에 올라가니 네 말이 자자하기로 간절히 보고 싶어 너를 청하였으니 심하 불안하도다.] 춘향이 다시 절하며 아뢰기를, [첩이 비록 무식하오나 고서를 보옵고 죽은 후에나 존안을 뵈올까 하였더니 이렇듯 항릉묘에 모시게 되어 황공 비감하여이다.] 상군부인(湘君夫人-중국 순임금의 두 아내)이 말씀하되, [우리 순군(舜君) 대순씨(大舜氏)가 남쪽 지방을 두루 살피며 순행하시다가 창오산(蒼梧山)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속절 없는 이 두 몸이 소상죽림(瀟湘竹林)에 피눈물을 뿌렸노니 가지마다 아롱아롱 잎잎이 원한이었다.
<창오산이 무너지고 소상강물이 끊어진 후에라야 대밭 우의 눈물을 거둘 날이 있으리라>천추의 깊은 한을 하소할 곳 없었더니 네 절행이 기특하기로 너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송죽 같은 절게 몇 천년에 청백은 어느 때며 오현금(五絃琴) 남풍시(南風詩)를 이제까지 전하더냐?] 이렇듯이 말씀할때 어떠한 부인이, [춘향아, 나는 기주 명월 음도성(陰都城)에서 화선(花仙)하던 농옥이다. 소사(蕭史)의 아내로서 태화산(太華山)의 이별 후에 용을 타고 날아간 것이 한이 되어 옥통소로 원을 풀 때 곡조는 날아가 간 곳을 모르니 산 아래의 벽도(碧桃)가 봄 되니 꽃 피누나.] 이러할 때 또 한 부인이 말씀하되, [나는 한나라의 궁녀 소군(昭君)이라. 오랑캐의 땅으로 잘 못 시집가서 한 줌의 푸른 무덤뿐이로다. 말 위에 올라타는 비파 곡조에<얼굴을 보니 부드럽고 아름다운 얼굴임을 잘 알겠으며 환패(環佩)는 옛 살던 한나라 궁궐에 혼백만이 돌아가겠도다.>이 아니 원통하랴.] 한참 이러할 때 음풍(陰風)이 일어나며 촛불이 펄렁펄렁하며 무엇이 촛불 앞에 달려들거늘 춘향이 놀라 살펴보니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닌데 비슷한 가운데 곡성이 낭자하며, [여봐라 춘향아, 너는 나를 모르리라. 나는 한고조(漢高祖)의 아내 척부인(戚夫人)이로다. 우리 황제님 돌아가신 후에 여후(呂後-한고조의 왕후)의 독한 솜씨 나의 수족 끊어내어 두귀에다 불지르고 두 눈 빼어 암약 먹여 칙간 측에 넣었으니 천추에 깊은 한을 어느 때나 들어보랴.] 이렇게 울 때 상군부인(湘君夫人)말씀하되, [이곳이라 하는 데가 유녕(幽明)의 길 다르고 행오(行俉)가 다르니 오래 머무르지 못하리라.]40. 봉사해몽(奉事解夢) 여동(女童)을 불러 하직할 때 동방의 귀뚜라미 소리 씨르렁, 한 쌍 호랑나비는 펄펄, 춘향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로다.
옥창(玉窓) 밖에는 앵두꽃이 떨어져 보이고 거울 복판이 깨어져 보이고 문 위에 허수아비가 달려 있듯이 보이거늘, [나 죽을 꿈이로다.] 수심과 걱정으로 밤을 샐 때 기러기가 울고 가니 한 조각 서강(西江)위에 뜬 달 아래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가 바로 너 아니냐, 밤은 깊어 삼경이요 궂은 비는 퍼붓는데 도깨비는 빽빽, 밤새소리 북북, 문풍지는 펄렁펄렁, 귀신이 우는데 난장(亂杖-마구 치는 매)맞아 죽은 귀신, 형장(刑杖)맞아 죽은 귀신, 결령치사(結領致死) 대롱대롱 목 달아 죽은 귀신 사방에서 우는데, 귀신의 울음소리가 어지럽다. 방안이며 추녀 끝이며 마루 아래서도 애고 애고 귀신 소리에 잠들 길이 전혀 없다. 춘향이가 처음에는 귀신 소리에 정신이 없이 지내더니, 여러 번을 듣고 보니 겁없이 되어서 청승맞은 굿거리의 삼잡이(장구,북,피리 부는 세 사람) 세악(細樂-음악형식의 하나)소리로 알고 들으며, [이 몹쓸 귀신들아 나를 잡아 가려거든 조르지나 말려무나.]
엄급급 여울령 사파쐬(주문의 하나) 직언(直言-法身의 말)치고 앉았을 때 옥 밖으로 장님 하나가 지나가되, 서울 봉사 같으면, [문수(問數)하오.] 라고 외치련마는, 시골 봉사라, [문복(問卜)하오.]하며 외치고 가니, 춘향이 듣고, [여보 어머니 저 봉사 좀 불러 주오.] 춘향이 모가 봉사를 부르는데, [여보 저기 가는 봉사님.] 봉사 대답하되, [그 누구요?] [춘향의 모요.] [어째 찾나?] [우리 춘향이 옥중에서 봉사님을 잠깐 오시라 하오.] 봉사 한번 웃으며, [날 찾기 의외로군. 가 보지.] 봉사가 옥으로 갈 때 춘향의 모 봉사의 지팡이를 잡고 길을 인도하며.
[봉사님 이리 오시오. 이것이 돌다리요, 이것는 개천이요. 조심하며 건너시오.] 앞에 개천이 있어 뛰어 볼라 무한히 벼르다가 뛰는데 봉사의 뜀이란 게 멀리 뛰지 못하고 올라가기만 한 길이나 올라가는 것이었다. 멀리 뛰는 것이 한 가운데 가서 풍덩 빠져 놓았으니 기어 나오려고 짚는다는 것이 개똥을 짚었겠다.
[압불사 이게 정녕 똥이지?] 손을 들어 맡아 보니 묵은 쌀밥 먹고 썩은 놈이로구나. 손을 내 뿌린 것이 모진 돌에다가 부딪히니 어찌 아프던지 입에다 홀 쓸어 넣고 우는데, 먼 눈에사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애고 애고 내 팔자야. 조그만 개천을 못 건너고 이 봉변을 당하였으니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리. 내 신세를 생각하니 천지 만물을 보지 못하는지라. 주야를 알랴, 사시(四時)를 짐작하며 봄철이 다가온들 복사꽃 피고 배꽃이 핌을 내가 알며, 가을철이 되어 온들 누런 국화와 붉은 단풍을 내 어찌 알며 부모를 내 아느냐. 처자를 아느냐. 친구 벗님을 내 아느냐. 세상 천지의 일월성신과 후함과 박함과 길고 짧음을 모르고 밤중같이 지내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참으로 말하자면 <소경이 그르냐 개천아 그르냐> 소경이 그르지 애초부터 있는 개천아 그르랴.] 애고 애고 섧게 우니, 춘향의 모 위로하되, [그만 우시오.] 봉사를 목욕시켜 옥으로 들어가니 춘향이 반기면서, [애고 봉사님 어서 오오.] 봉사는 그 중에 춘향이가 일색이란 말은 듣고 반가와 하며, [음성을 들으니 춘향 각시인가 보다.] [예 기옵니다.] [내가 벌써 와서 자네를 한 번이라도 볼 터이로되, 가난한 사함 일 많다고 못 오고 청하여 왔으니 내 인사가 아니로세.] [그럴 리가 있소? 눈 멀으시고 늙으셨으니 기력이 어떠하시오.]
[내 염려 말게. 대체 나를 어찌 청하였나?] [예 다름 아니라 간밤에 흉몽을 꾸었삽기로 해몽도 하고 우리 서방님이 어느 때나 나를 찾을까 길흉 여부를 점치려고 청하였소.] [그리하세.]41. 천하언재(天下言哉) 봉사가 점을 치는데, [저 대서(大筮)의 믿음직한 말을 빌어 존경을 다하여 축원하옵나니 하늘이 언제 말씀 하시었고 땅이 언제 말씀 하셨으리오마는 두드리오면 곧 응하시는 것이 신령하심이니 응감하시와 신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할 제 아지 못하옵고 그 의심을 풀지 못하올 때 다만 마음과 혼령이 원한는 바를 밝히 아르켜 주시옵기를 바라와 옳고 그른 것을 밝히고자 하오니 곧 응하게 하여 주시오.
복의(伏義), 문왕(文王), 무왕(武王), 무공(武公), 주공(周公), 공자, 오대성현(五大聖賢), 칠십이현(七十二賢), 안,증,사,맹(顔曾思孟) 성문십철(聖門十哲), 제갈공명 선생, 이순풍(李淳風), 소강절(邵康節),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주렴계(周濂溪), 주회암(朱晦庵), 엄군평(嚴君平), 사마군(司馬君), 귀곡(鬼谷), 손번(孫번), 진의(秦儀), 왕보사(王輔嗣), 유운장(劉雲長), 제대선생(諸大先生)은 밝히 살피시고 밝히 기억하소서. 마의도자(麻衣道者), 구천현여(九千玄女), 육정(六丁), 육갑(六甲), 신장(神將)이시여, 년월일 시 사치공조(四値功曹), 배괘동자(排掛童子), 척괘동랑(擲掛童郞), 허공유감(虛空有感) 여왕 봉기 복사 단로행화 욱신 무차 보양, 원컨댄 강림케 하여 주옵소서, 전라좌도 남원부 천변(川邊)에 사는 임자생신(壬子生辰) 곤명(坤命) 열녀 성춘향이 하월 하일(何月何日)에 방사옥중(放赦獄中) 하오며 서울 삼청동에 사는 이몽룡은 하월하일에 남원부에 도착하오리까. 엎드려 빌건대 첨신(僉神)은 신명 소시(神明昭示)하옵소서.] 산통(算筒)을 철겅철겅 흔들더니, [어디 보자. 일이삼사 오륙 칠 허허 좋다. 좋으 괘로구나. 칠간산(七艮山-占封을 말함)이로구나. 고기가 그물을 피하니 적게 쌓여 크게 성취할 괘라. 옛날에 주나라 무왕이 벼슬을 할 때 괘를 얻어 성공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어찌 아니 좋을손가. 천리를 알 수 있으니 친인(親人)이 낯를 안다. 자네 서방님이 멀지 않아 내려와서 평생의 한을 풀겠네. 걱정마오, 참 좋거든.]
춘향이 대답하되, [말대로 그러하면 오죽이나 좋으리까. 간밤 꿈의 해몽이나 좀 하여 주옵소서.] [단장하던 체경이 깨져 보이고, 창 앞에 앵두꽃이 떨어져 보이고, 문 위에 허수아비가 보이니 나 죽을 꿈 아니오!] 봉사 가만히 생각하다가 얼마 후에 말하기를, [그 꿈 장히 좋다. 꽃이 떨어지니 능히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울이 깨어지니 어찌 큰 소리 한번 없겠는가. 문 위에 허수아비 달렸음은 만인이 다 우러러 봄이라. 바다가 말랐으니 용의 얼굴을 볼 것이며, 산이 무너지면 평지가 될 것이다. 좋다, 쌍가마 탈 꿈이로세. 걱정마소, 머지 않네.] 한참 이리 수작할 때 까마귀가 뜻 밖에 담에 와 앉아서, [까욱까욱.] 울거늘 춘향이 손을 들어 후여 하고 날리며, [방정맞은 까마귀야. 나를 잡아 가려거든 조르지나 말려무나.]
봉사가 이 말을 듣더니, [가만 있소. 그 까마귀가 까옥까옥 그렇게 울었지?] [예 그래요.] [좋다 좋다. 가짜는 아름다울 가짜(嘉字)요, 옥짜는 집옥짜(屋)라. 아름답고 즐겁고 좋은 일이 불원간에 돌아와서 평생에 맺힌 한을 풀 것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소. 지금은 복채(卜債) 천 냥을 준대도 아니 받아갈 것이니, 두고 보고 영귀하게 되는 때는 괄세나 부디 마소. 나는 돌아 가네.] 춘향은 장탄 수심으로 세월을 보내더라.
42. 수의등정(繡衣登程) 이때 한양성 도령님은 주야를 가리지 않고 시서백가어(詩書 百家語)를 숙독하였으니 글로는 이백(李白)이요, 글씨는 왕의 지(王義之)라. 나라에 경사가 있어 태평과(太平科)를 보일 때 에 서책을 품에 품고 과거장으로 들어가서 좌우를 둘러보니 수많은 백성과 허다한 선비들이 일시에 임금님께 절을 한다. 맑고 고운 궁중의 풍악 소리에 앵무새가 춤을 춘다. 대제학을 택출(擇出)하여 임금께서 정한 글 제목을 내리시니 도승지(都 承旨)가 모셔내어 홍장(紅帳) 위에 걸어 놓으니 , 제(題)에 하 였으되, <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이라> 뚜렷이 걸었거늘 이도령이 글제를 살펴보니 익히 보아온 바 이라. 시제(詩題)를 펼쳐 놓고 해제(解題)를 생각하여 용지연 (龍池硯)에 먹을 갈아 당황모(唐黃毛) 무심필(無心筆)을 반중 동 덤벙 풀어 왕희지의 필법으로 조맹부(趙孟부-원나라의 서 예가)의 채를 받아 단 붓으로 일필휘지 선장(先場-답안지를 가장 먼저 남)하니, 상시관(上試官)이 글을 보고, 글자마다 비점(批點-시문이 잘되 곳에 점 을 찍은 것)이요, 귀절마다 관주(寬珠-잘되 곳에 그린 표)였다. 글씨 가 마치 용이 하늘로 치솟는 듯하고 비둘기가 모래밭에 내려앉은 듯 하니 금세(今世)의 대재(大才)로구나.
금방(金榜-과거 합격자 발표)에 이름을 걸고 임금님이 석 잔 술을 권하신 후, 장원 급제로 답안지를 시험장에 내걸었다. 신래(新來-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에 진퇴 나올 적에 머리 에는 임금님이 내려 주신 종이꽃이요, 몸에는 앵삼(鶯杉-관복 의 일종)이며 허리에는 학대(鶴帶)로다. 사흘 동란 서울 장안 을 돌며 논 후에 산소에 소분(掃墳)하고 임금님께 절하니, 전 하께옵서 친히 불러 보신 후에,
[경의 재주 조정에 으뜸이로다.] 하시고 도승지 입시(入侍)하사, 전라도 암행어사로 명을 내 리시니 평생의 소원이다. 수의(繡衣-수 놓은 옷), 마패(馬牌) 유척(鍮尺-놋쇠 자)을 내 주시니 전하께 하직하고 본댁으로 나갈 적에 철관(鐵冠-어사가 쓴 갓)풍채는 산 속의 맹호와 같 은지라.
부모 앞에 하직하고 전라도로 향할 때 남대문 밖에 나서서 서리(胥吏) 중방(中房) 역졸 등을 거느리고, 청파역에 말 잡아 타고, 칠패와 팔패며 배다리 등을 얼른 넘어 밥전거리 지나 동작(銅雀)이를 얼른 건너 남태령(南太嶺)을 넘어 과천읍애서 점심 먹고, 사구내(沙丘乃) 미룩당이 수원(水原)에서 대항교 (大皇橋) 떡전거리, 진개울, 중미, 진위읍(振威邑)에서 점심먹 고, 갈원(葛院) 소사(素沙)에 고다리, 성환역(成歡驛)에 숙소하 고 상류천(上柳川) 하류천(下柳川) 새술막 천안읍(天安邑)서 점심먹고, 삼거리 도리치(道里峙) 김제역(金堤驛)서 말 갈아 타고, 신구(新舊) 덕평(德坪)을 얼른 지나 원터에 숙소하고, 팔 풍정(八風亭) 활원(弓院), 광정(廣程), 모란(毛老院), 공주(公州) 금강(錦江)을 건너 금영(錦營)에서 점심먹고, 높은 행길 소개 문, 어미널터, 경천(敬川)에 숙소하고, 노성(魯城) 풀개(草浦)사 다리, 은진, 까치다리, 황화정(皇華亭), 장어미고개, 여산읍(礪 山邑)에 숙소하고, 이튿날에 서리 중방을 불러 분부하되, [전라도 초읍 여산(礪山)이라. 무거운 나라 일을 거행하 여 분명히 하지 못하면 죽기를 면하지 못하리라.]43. 함포고복(含哺鼓腹)추상같이 호령하여 서리를 불러 분부하되, [너는 좌도(左道)로 들어 진산(珍山), 금산(錦山), 무주(茂朱), 용담(龍潭), 진안(鎭安), 장수, 운봉(雲峰), 구례로 여덟 읍을 순행하여 아무날 남원읍으로 대령하고, 중방과 역졸 너희들은 우도(右道)로 용안(龍安), 험열(咸悅), 임파(臨坡). 옥구, 김제, 만경(萬頃), 고부(古阜), 부안, 흥덕(興德), 고창, 장성, 영광, 무장, 무안, 함평으로 순향하여 아무날 남원읍에 대령하고, 종사(從事)불러 익산, 금구(金溝), 태인, 정읍, 순창, 옥과,(玉果), 광주, 나주, 창평(昌平), 담양, 동복(同福), 화순, 강진, 영암, 장흥, 보성, 흥양(興陽), 낙안(樂安), 순천, 곡성으로 순행하여 아무날 남원읍으로 대령하라.] 분부하여 각기 분발(分撥-요긴한 사항을 먼저 베껴 펴는 일)하신 후에 어사또 행장을 차리는데 그 거동을 좀 보소.
숫제 사람을 속이려고 모자 없는 헌 파립에 레를 총총이 매어 초사(草紗-질이 나뿐 미단)로 만든 갓끈 당줄 달아쓰고, 당줄만 남은 헌 망건의 갑풀관자(아교풀로 만든 관자) 노끈 장줄 달아 쓰고, 의뭉하게 헌 도복의 무명실 띠를 가슴에 둘러 매고 살만 남은 헌 부채의 솔방울 선초(扇貂-부채에 느려트리는 장식품) 달아 햇볕을 가리고 내려올 때, 통새암, 삼례(參禮)에서 숙소하고 한내, 주엽젱이, 가리내, 싱금정을 구경하고 숩정이 공북루(拱北樓) 서문을 얼른 지나 남문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서호(西湖), 강남(江南)이 여기로다. 기린봉 위에 솟은 달이며 한벽당(寒碧堂)의 맑는 잔치, 남고산(南古山)의 저녁 종소리, 건지산(乾止山) 위에 솟은 보름달이며, 다가(多佳)의 활 쏘아 맞추는 과녁, 덕진(德津)의 연뿌리 캐기 비부정(飛阜亭)에 날아 내리는 기러기, 위봉폭포(威鳳瀑布)등 완산팔결(完山八景)을 다 구경하고 차차로 암행하여 내려올 때, 각읍 수령들이 어사 났단 말을 듣고 민정을 가다듬고 지난 날의 공사(公事)를 근심 할 때 하인인들 편하리오. 이방 호장은 혼을 잃고, 공사(公事)를 회계하는 형방, 서기들은 여차하면 도망치려고 신발은 신고 있으며, 허구 많은 각청상(各聽上)이 넋을 잃고 분주할 때 어사또는 임실(任實) 구화뜰 근처에 당도하니 이때가 마침 농사철이라 농부들이 농부가를 부르는 것이 들렸다.
어여로 상사뒤요 천리건곤 태평시에 도덕 높은 우리 성군 강구연월 동요 듣던 요임금의 성덕이라 어여로 상사뒤요 순임금 높은 성덕으로 내신 성기(成器-농기구) 역산(歷山)의 밭을 갈고 어여로 상사뒤요 신농씨(神農氏) 내신 농구 천추만대 유전(流傳)하니, 어이 아니 높으던가, 어여로 상사뒤요,
하우씨(夏禹氏-중국의 연호) 어진 임금 구년 홍수 다스리니, 어여로 상사뒤요, 은왕성탕(殷王成湯-成과湯임금)어진 임금 대한(大旱) 칠년 당하였네 어여로 상사뒤요
이 농사를 지어 내어 우리 성군께 공세(貢稅)한 후에 남은 공식 장만하여 앙사부모(仰事父母-부모섬김) 아니할까 어여로 상사뒤요 백초(百草)를 심어 사시(四時)를 짐작하니 유산(有信)한 게 백초로다 어여로 상사뒤요 청운공명(靑雲功名) 좋은 호강 이 업을 당할소냐 어여로 상사뒤요 남전북답(南田北畓-여기 저기의 전답) 기경(起耕)하여 함포고복(含哺鼓腹-배불리 먹고 배 두드림)하여 보세 어럴럴 상사뒤요.
한참 이러 할 때 어사또 죽장을 짚고 이만치 떨어져서 농부가 를 구경하다가, [올해도 대풍이로고,]
44. 전원문답(田園問答) 또 한편을 바라보니 몸이 튼튼한 중실한 노인들이 끼리끼리 모여서서 등길 밭을 이루는데, 갈멍덕 숙여 쓰고 쇠스랑을 손에 들고 백발가(白髮歌)를 부르는데, 등장(等狀-연판장) 가자 등장가자 하느님 전으로 등장갈 양이면 무슨 말을 하실는지 늙은이는 죽지 말고 젊은 사람 늙지 말게 하느님 전에 등장가세 원수로다 원수로다 오는 백발 막느려고 오른손에 도끼 들고 왼손에 가시 들고 오는 백발 두드리며 가는 홍안 걸어 당겨 청사(靑絲)로 결박하여 단단히 졸라 매되 가는 홍안은 저절로 가고 백발은 시시로 돌아와 귀밑에 살 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되니 조여청사 모성설(朝如靑絲暮成雪-젊었을 때의 파란 실 같은 머리 늙으니 흰눈처럼 된다)이라 무정한 게 세월이라 소년행락(少年行樂) 깊다한들 왕왕(往往)이 달라가니 이 아니 세월인가 천금준마(千金駿馬)를 잡아 타고 장안 대로 달리고저 만고강산 좋은 경치 다시 한번 보고지고 절대가인을 곁에 두고 온갖 교태 놀고지고 화조월석(花朝月夕) 사시가경 눈 어둡고 귀가 먹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어 할 수 없는 일이로세 슬프다 우리 벗님 어디로 가겠는고 구추단풍(九秋丹楓) 잎 지듯이 선뜻 선뜻 떨어지고 새벽 하늘 별 지듯이 듬성듬성 쓰러지니 가는 길이 어디메뇨 어여로 가래질이여 아마도 우리인생 일장춘몽인가 하노라
한참 이러할 때 한 농부 썩 나서며, [담배 먹세, 담배 먹세.] 갈멍덕을 숙여 쓰고 둔덕에 나오더니, 곱돌로 만든 담뱃대를 넌짓 들어 꽁무니 더듬어서 가죽 쌈지 빼어 들고, 담배에 새우침과 같은 침을 뱉아 엄지손가락이 자빠라지게 바빗비빗 단단히털어 넣어 짚불을 뒤져 놓고 화로에 푹 질러 담배를 먹는데, 농사군이라 하는 것이 대가 빽빽하면 쥐새끼 소리가 나겠다. 양볼때기가 오목오목 콧구멍이 발심발심하며 연기가 홀홀 나게 피어 물고 나서니 어사또 반말하기가 이력이 났겠다.
[저 농부 말좀 물어 보면 좋겠구먼.] [무슨 말?] [이 골 춘향이가 본관에 수청 들어 뇌물을 많이 받아 먹고 민정에 작폐한다는 말이 옳은지?] 저 농부 열을 내어, [그대는 어디 사는가?] [아무데 살든지.] [아무데 사는 데라니 그대는 눈콩알 귀콩알 없나? 지금 춘향이가 수청 아니 든다고 형장 맞고 갇혔으니 창가(娼家)에 그런 열녀 세상에 드문지라. 구슬같은 춘향 몸에 자네 같은 동냥아치가 함부로 씨부려 대다가는 빌어먹도 못하고 굶어 뒤어지리. 올라간 이도령인지 그놈의 자식은 한번 간 후 소식이 없으니, 사람의 일이 그렇고는 벼슬은 커녕 내 좆도 못하리.] [어 그게 무슨 말인고.] [왜? 어찌되는 사이인가?] [되기야 어찌 되랴마는 남의 말을 너무 고약하게 하는 구나.] [자네가 철 모르고 말을 하니까 그렇지.]45. 도봉혈서(道逢血書) 수작을 끝내고 돌아서며, [허허 망신이로구나. 자 농부네들 일하오.] [예] 작별하고 한 모통이를 돌아드니 아이 하나가 오는데 대막대 를 끄을면서 시조(時調) 절반 섞어하되, 오늘이 며칠인고 천리 길 한양 서울 며칠 걸어 올라가랴 조자룡이 강 건너던 청총마(푸른빛을 띤 말)가 있었더라면 금일로 가련만는 불쌍하다 춘향이는 이서방을 생각하여 옥중에 갇히어서 목숨이 오락가락하니 불쌍하다 몹쓸 양반 이서방은 한 번 가고 소식 끊어지니 양반의 도리는 그러한가 어사또가 그 말 듣고 [이 애 어디 있찌?] [남원에 사오.] [어디를 가니?] [서울 가오.] [무슨 일로 가니?] [춘향이 편지 갖고 구관댁에 가오.] [이 애 그 편지 좀 보자.] [그 양반 철 모르는 양반이네] [웬 소린고?] [글세 들어 보오. 남의 편지 보기도 어렵거든 하물며 남의 내간(內簡)을 보잔단 말이오?] [이 애 듣거라. <향인이 떠남에 앞서 또 한 번 개봉한다>는 말이 있느니라. 좀 보면 상관 있느냐?] [그 양반 몰골은 흉악하구만 문자 속은 기특하오. 얼핏 보고 주시오.] [후레자식이로구나.] 편지를 받아 떼어 보니 그 사연에 써 있기를, <한번 이별한 후에 소식이 적조하니 도련님 시봉체후(侍奉體候) 만안하옵신지 원절복모(願切伏慕)하옵니다. 천첩 춘향은 장대 노상(杖臺노上)에 관봉치패(官逢致敗)하고 명재경각(命在頃刻)이라, 사경에 이르매 혼은 황륜의 묘에 남아 귀관(鬼關)에 출몰하니, 첩신이 비록 만번 죽으나, 단지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첩의 사생과 노모의 형상이 그 참혹한 경우가 어찌될지 모르겠사오니 서방님 깊이 양해 하셔서 처사하여 주시옵소서> 편지 끝에 하였으되, <거세 하시군별첩(去歲何時君別妾)고 작기동절 우동추(昨己冬節又動秋)라 광풍 반야 우여설(狂風半夜雨如雪)하니 하위남원 옥중수(何爲南原獄中囚)와, 지난 해 어느 때에 님은 이별하였던고 엊그제가 겨울이더니 또 한 가을 지나가네 미친 바람은 밤중에 미친 듯한 소나기를 부르거니 남원 시골의 옥중수(獄中囚)가 되려고 내려왔구나> 혈서로 써 놓았느데 모래밭 위에 내려 앉은 기러기격으로 그저 툭툭 찍은 것이 모두 <애고>였다. 어사 보더니 두 눈에 눈물이 듯거니 맺거니 방울 방울 떨어지니 아이 하는 말이, [남의 편지 보고 왜 우시오?] [엣다 이 애, 남의 편지라도 서러운 사연을 보니 자연히 눈물이 나는구나.] [여보 인정 있는 체하고 남의 편지에 눈물 묻으면 어쩌오! 그편지 한 장 값이 열닷 냥이오. 편지 값 물어내오.] [여봐라 이도령이 나와 죽마고우 친구로서 하향(下鄕)에 볼 일이 있 나와 함께 내려오다가 전주에 들렀으니 내일 남원에서 만나자고 언약하였다. 나를 따라가 있다가 그 양반을 뵙거라.]
그 아이 낯빛을 변하며 [서울을 저 건너로 아시오?]하며 달려들어, [편지 내오.]하고 재 고집을 새우는데 제기(祭器) 접시 같은 것이 들었거늘 물러나며,
[이것 어디서 났소? 찬바람이 나오.] [이놈, 만일 기밀을 누설하였다간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라.]46. 황혼행각(黃昏行脚) 당부하고 남원으로 들어올 때 박석치(博石峙-고개 이름)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산도 옛날 보던 산이요, 물도 옛날 보던 물이었다. 남문 밖에 썩 내달아, [광한루야 잘 있더냐? 오작교야 무사하냐? 객사(客舍) 앞의 푸르른 수양버들은 나귀 매고 놀던 터요, 청운낙수(靑雲落水) 맑은 물은 내 발을 씻던 청계수라. 녹수진경(綠水秦景) 넓은 길은 오고 가던 옛 길이오] 오작교 다리 밑에 빨래하는 여인들 중에 계집아이들이 섞여 앉아,
[야야.] [왜 그래?] [애고 애고 불쌍하더라. 춘향이가 불쌍더라. 절개 높은 춘향이를 위력으로 겁탈하려 한들 철석 같은 춘향 마음 죽는 것을 겁낼것안가. 무정하더라, 무정하더라, 이도령이 무정하더라.] 저희끼리 공론하며 추적추적 빨래하는 모양은 영양공주(英陽公主), 난양공주(蘭陽公主) 진채봉(秦彩鳳), 계섬월(桂贍月), 백능파(白凌波), 적경홍(狄驚鴻), 심희연(沈希烟), 가춘운(賈春雲)과도 비슷하다마는 양소유(楊小游)가 없었으니 누구를 찾아 앉았는고. 어사또 누(樓)에 올라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에 있고 자러 가는 새는 숲으로 가느데 저 건너 양류목(楊柳木)은 우리 춘향이가 그네를 매고 오락가락 놀던 양을 어제 본 듯 반갑구나. 동편을 바라보니 잔림(長林) 깊은 곳 녹림 사이 춘향의 집이 저기로구나. 저 안의 내동원(內東苑)은 예전에 보던 그 얼굴이요, 석벽의 험한 옥(獄)은 우리 춘향이가 우는 것 같아 불쌍하고 불쌍하다. 해는 서산에 지고 황혼이 깃들 때에 춘향집 문 앞에 당도하니 행랑은 무너지고 집의 몸채는 너스레를 벗었는데 예 보던 벽오동은 숲속에 우뚝 서서 바람을 못 이기어 허술하게 서 있거늘, 나지막한 담 밑의 흰 두루미는 함부로 다니다가 개한테 물렸는지 깃도 빠지고 다리를 징금 찔록 뚜루룩 울음을 울고, 빗장 앞의 누렁개는 기운없이 조을다가 구면 객을 몰라보고 컹컹 짖으며 내달리니, [요 개야, 짖지 마라. 주인 같은 손님이다. 너의 주인 어디 가고 네가 나를 반기느냐?]중문을 바라보니 내 손으로 쓴 글자가 충성 충자(忠字) 완연하더니 가운데 중자(中字)는 어디 가고 마음 심(心)자만 남아 있고, 와룡장자(莊字) 입춘서(立春書)는 동남풍에 펄렁펄렁 이내 수심 돋워낸다.
그렁저렁 들어가니 내정은 적막한데 춘향모 거동 보소. 미음 솥에 불 넣으며, [애고 애고 내 일이야. 모지도다. 모지도다. 이서방이 모지도다. 위경(危境)의 내 딸 아주 잊어 소식조차 끊어졌네. 애고 애고 서럽구나. 향단아, 이리 와 불 넣어라.]하고 나오더니 울 안의 개울 물에 흰 머리 감아 빗고 정화수 한 동이를 단 아래에 바쳐 놓고 땅에 엎디어 축원하기를, [하늘과 땅의 귀신이여, 햇님, 달님, 별님은, 변하여 한 가지 마음이 되옵소서, 다만 내 딸 춘향이를 금쪽같아 길러 내어 외손봉사(外孫奉祀)를 바랐더니, 무죄한 매를 맞고 옥중에 갇혔으니 살릴 길이 없사옵니다. 하늘과 땅의 신령님은 감동하사 한양성 이몽룡을 청운(靑雲)에 높이 올려 내 딸 춘향을 살려 주사이다.]
47. 걸인지상(乞人之上) 빌기를 다한 후에, [향단아, 담배 한대 붙여다구.] 춘향의 모 받아 물고 '후유' 한숨 눈물 질 때, 이때 어사는 춘향모의 정성을 보고, [나의 벼슬 한 것이 선영(先塋)의 은덕으로 알았더니 우리 장모의 덕이로다.]하고,
[그 안에 누구 있느냐?] [뉘시오?] [나로세.] [내라니 뉘신가?]어사 들어가며, [이서방일세.] [이서방이라니. 옳지, 이풍헌(李風憲-풍헌은 마을 일 맡아 보는 직책)의 아들 이서방인가?] [허허 장모 망령이로세. 나를 몰라? 나를 몰라?] [자네가 누구여?] [사위는 백년지객이라 하였으니 어찌 나를 모르는가?]춘향의 모 반겨하며, [애고 애고 이게 웬일인고? 어디 갔다 이제 오나, 바람이 크게 일더니 바람곁에 풍겨 왔나. 산 마루에 구름이 일더니 구름 속에 싸여 왔나. 춘형의 소식 듣고 살리려고 와 계신가. 어서 어서 들어가세.] 손을 잡고 들어가서 촛불 앞에 앉혀 놓고 자세히 살펴보니 걸인 중레 상걸인이 되었구나.
춘향의 모 기가 막혀, [이게 웬일이오?] [양반이 그릇 되니 형언할 수 없네. 그때 올라가서 벼슬길은 끊어지고 가산을 탕진하여 부친께서는 서당 훈장으로 가시고, 모친은 친정으로 가시고 다 각기 갈리어서 나도 춘향에게 내려와서 돈냥이나 얻어갈까 하였더니, 와서 보니 양가(兩家) 이력이 말이 아닐세.] 춘향의 모 이 말을 듣고 기가 막혀, [무정한 이 사람아 한 번 이별한 후로 소식이 없었으니, 그런 인사가 어디 있으며, 뒷기약인가 뭔가나 바랐더니, 일이 잘 되었소. 쏘아논 화살이요 엎지른 물이 되어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하겠나마는, 내 딸 춘향을 대체 어찌 할라는가?] 홧김에 달려들어 코를 물어 떼려 하니, [내 탓이지 코 탓인가? 장모가 나를 몰라 보며 하늘이 무심해도 풍운조하(風雲造化)와 뇌성 벽력은 있는 법이니.] 춘향모가 기가 막혀서, [양반이 그릇되매 못된 조롱마저 들었구나.] 어사가 짐짓 추향모가 하는 거동을 보려고, [시장하여 나 죽겠네. 나 밥 한 술만 주소.] 춘형모는 밥 달라는 말을 듣고, [밥 없네.] 어찌 밥이 없을까마는 홧김에 하는 말이었다. 이때 향단이 옥에 갔다 나오더니, 저의 아씨 야단 소라에 가슴이 후둘후둘하고 정신이 울렁울렁하여 정처없이 들어가서 가만히 살펴보니 전의 서방님이 와 계시구나. 어찌나 반갑던지 우루루 달려들어, [향단이 문안이오. 대감님 문안이 어떠하시며 대부인께서 그 후 안녕하옵시며 서방님께서도 먼 길에 평안히 행차하셨습니까?]
[오냐, 고생이 어떠하냐?] [소녀의 몸은 무탈하옵니다. 아씨 아씨, 큰 아씨, 마오마오 그리 하자 마오. 멀고 먼 천리길에 누구를 보려고 오셨는데 이 괄세가 웬일이오. 아가씨가 아신다면 지레 야단을 맞을 것이니 너무 괄세를 마옵소서.] 부엌으로 들아가더니 먹던 밥에 풋고추, 절인 김치, 양념을 넣고 단 간장에 냉수를 가득떠서 소반에 받쳐 드리면서, [더운 진지 할 동안에 시장하실 터인데 우선 요기나 하옵소서.]
어사또 반겨하며, [밥아, 너 본 지 오래구나.] 여러 가지를 한데다 붓더니 숫가락 댈 것 없이 손으로 휘휘 저어 한편으로 몰아치며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하는구나.
춘향모가 하는 말이.
[얼씨구 밥 빌어 먹기에 이력이 났구나.] 48. 분기탱천(忿期撑天) 이때 향단이는 저의 아가씨 신세를 생각하여 크게 울지는 못하고 흐느끼며 하는 말이, [어찌 할까나, 어찌 할까나. 도덕 높으신 우리 아가씨 어찌하여 살리시려오. 어찌해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소리도 못 내고 우는 모양을 어사또가 보시더니 기가 막혀, [여봐라 향단아, 우지 마라, 우지 마라, 너의 아가씨 설마 살지 죽을소냐. 행실히 지극하면 사는 날이 있느니라.] 춘향모 듣더니, [애고 양반이라고 오기는 있어서, 대체 자네가 왜 저 모양인가?] 향단이 하는 말이, [우리 큰 아씨 하는 말을 조금도 관념 마옵소서. 나이 많아 노망하는 중에 이 일을 당해 놓으니 홧김에 하는 말을 조금만치라도 노하리까. 더운 진지 잡수시오.] 어사또 밥상 받고 생각하니 분한 마음 하늘에 뻗치어 마음 이 울적하고 오장이 울렁울렁 하고 저녁밥이 맛이 없어, [향단아, 상 물려라.] 담뱃대 툭툭 털며, [여보소 장모, 춘향이나 좀 보아야겠소.] [그렇게 하구료. 서방님이 춘향을 아니 보아서야 인정이라 하오리까?] 향단이 여쭈오되, [지금은 문을 닫았으니 바래(罷漏-통금 해제의 종)치거든 가사이다.] 이때 마침 바래를 뎅뎅 치는 것이었다. 향단이는 미음상을 이고 등롱을 들고 어사또는 뒤를 따라 옥문 앞에 당도하니 인적이 고요하고 옥사장도 간 곳이 없다. 이때 춘향이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데, 서방님이 오셨는데 머리에는 금관이요, 몸에는 홍삼(紅衫)을 입었다. 임 그리는 마음에 목을 안고 만단정회(萬端情懷)하는 차였다.
[춘향아.] 부른들 대답이 있을소냐. 어사또 하는 말이, [크게 한 번 불러보소.] [모르는 말이오. 예서 동헌이 마주치는데 소리가 크게 나면 사또 염문(廉問)할 것이니 잠깐 지체 하옵소서.] [무어 어때? 염문이 무엇인고. 내가 부를께 가만 있소. 춘향아!] 부르는 소리에 깜작 놀래어 일어나며, [허허 이 목소리 잠결인가, 꿈결인가. 그목소리 괴이하다.]
어사또 기가 막혀, [내가 왔다고 말을 하소.] [왔다고 말을 할 것 같으면 기절 낙잠할 것이니 가만히 계시옵소서.] 춘향이 저의 모친 음성을 듣고 깜짝 놀래어, [어머니, 어찌 오셨소? 몹쓸 딸자식을 생각하와 천방지축(天方地軸) 다니다가 떨어져 상하기 쉽소. 이 다음에는 오실 생각 마옵소서.] [나는 염려 말고 정신을 차려라. 왔다.] [오다니 누가 와요?] [그저 왔다.] [갑갑하여 나 죽겠소. 일러주오. 꿈 가운데 임을 만나 만단 정회하였더니 혹시 서방님께서 기별이 왔소? 벼슬 따고 내려온다는 노문(路文-벼슬아치 당도할 날자를 미리 알리는 글)놓고 왔소? 애고 답답하여라.] [너의 서방인지 남방인지 걸인이 하나 내려왔다.] [허허 이게 웬말이가? 서방님이 오시다니. 꿈속에서 보던 임을 생시에 보단 말가.] 49. 악수기절(握手氣絶) 문틈으로 손을 잡고 말 못하고 기색(氣塞)하며, [애고 이게 누구시오. 아마도 꿈이로다. 그리워하며 보지 못하던 임을 이리 쉽게 만날 수 있을까. 이제 죽어 한이 없네. 어찌 그리 무정할까. 복도 없다. 우리 모녀 서방님을 이별한 후에 자나 누우나 님 그리워하며 날이 가고 달이 가더니 내 신세가 이리 되어 매에 감겨 죽게 되니, 나를 살리려고 오시었소.] 한참 이리 반기다가 임의 형상을 자세히 보니 어찌 아니 한심하랴.
[여보 서방님. 내 몸 하나 죽는 것은 서러운 마음이 없소만은 서방님은 이 지경이 웬일이오?] [오냐 춘향아 서러워 말라. 사람 목숨은 하늘에 매인 것이니 설마한들 줄을소냐?] 춘향이 저의 모친을 불러, [한양성 서방님을, 칠년 대한 가문 날에 목 마른 백성들이 비를 기다린들 나와 같이 기다렸을까. 심은 나무가 꺾어지고 공든 탑이 무너졌네. 가련하다 이 내 신세. 할 수 없이 되었구나. 어머님은 나 죽은 후에라도 원이나 없게 하여 주옵소서. 나 입던 비단 장옷 봉장(鳳欌) 안에 들었으니 그 옷 내어 팔아다가 한산의 고운 모시와 바꾸어 물색 곱게 도포를 짓고, 백방사주(白方絲紬-희빛 비단)로 지은 긴 치마를 되는 대로 팔아다가 관망(冠網) 신발을 사 드리고, 절병 천은(天銀) 비녀와, 밀화장도, 옥지환이 함 속에 들었으니, 그것도 팔아다가 한삼 고의 흉치 않게 하여 주오. 오래잖아 죽을 년이 세간은 두어 무엇할까. 용장 봉장 빼다지를 있는대로 팔아다가 좋은 찬으로 진지 대접하오. 나 죽은 후에라도 나 없다 말으시고 나 본듯이 섬기소서.
서방님 내 말 들으시오. 내일이 본관사또 생신이라, 취중에 주망(酒妄)나면 나를 올려 칠 것이니 형문 맞은지라 장독이 났으니 수족인들 놀릴손가. 만수 운화 흐트러져서 긴 머리 이렁저렁 걷어 얹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들어가 매맞은 병으로 죽거들랑 삯군인 체 달려들어 둘러업고 우리 둘이 처음 만나서 놀던 부용당(芙蓉堂)의 쓸쓸하고 고요한 곳에 뉘어 놓고 서방님께서 손수 염습하되 나의 혼백을 위로하여 입은 옷 벗기지 말고 양지 끝에 묻었다가, 서방님께서 귀하게 되어 성공하시거든, 잠시도 그대로 두지말고 육진장포(六鎭長布-육진에서 나는 긴 배)다시 염하여, 조촐한 상여 위에 덩그렇게 실은 후에 북망산천 찾아 갈 때, 앞의 남산과 뒤의 남산을 다 버리고 한양으로 올려다가 선산 발치에 묻어 주오. 비문에 새기기를 <수절원사춘향지묘(守節寃死春香之墓)>라고 여덟 자만 새겨 주오. 망부석이 아니 될까. 서산에 지는 해는 내일 다시 오르련만 춘향이는 한 번 가면 어느 때 다시 올까. 가슴에 맺힌 원한이나 풀어 주오.
애고 애고 내 신세야. 불쌍한 나의 모친 나를 잃고 가산을 탕진하면 별 수 없이 걸인이 되어 이집 저집 걸식하다가 언덕 밑에 조숙조숙 조을면서 기력이 다하여 죽게 되면 지리산 갈가마귀 두 날개를 쩍 벌리고 두둥실 날아들어 까욱까욱 두 눈을 다 파먹은들 어느 자식 있어 후여 하고 날려 주리, 애고 애고.] 섧게 울 때 어사또, [우지 말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느니라. 네가 나를 어찌 알고 이렇듯이 서러워하느냐?]50. 파관말석(破冠末席) 작별하고 춘향이 집으로 돌아왔다. 춘향이는 어둠침침한 한 밤중에 서방님을 번개같이 얼른 보고 옥방에 홀로 앉아 탄식하는 말이,
[명천(明天)는 사람을 낼 때 별로 후박이 없건마는 나의 신세 묵슨 죄로 이팔의청춘에 임 보내고 모진 목숨을 살아 이 형문(刑問)이 형장(刑杖)이 무슨 일인고. 옥중 고생 서너 달에 밤낮이 없게 되었구나. 죽어서 황천에 돌아간들 제왕전에 무슨 말을 자랑하리. 애고 애고.] 슬피 울 때 기진맥진하여 반은 죽고 반만 살아있는 모습이었다. 어사또 춘향 집을 나와서 그날 밤을 샐 작정하고 문 밖을 염탐하며 들을 때 질청(秩廳)에 가 들으니 이방과, 승발(承發-아전 밑에서 일 보는 자) 불러 하는 말이, [여보소. 들으니 수 놓은 옷을 입은 사또가 새문 밖 이씨라더니 아까 삼경에 등롱불을 켜들고 춘향모를 앞세우고, 허술하게 차린 한 손님이 아마도 수상하니 내일 본관 잔치 끝에 한벌을 구별하여 생탈 없게 극히 조심하오.] 어사가 그 말을 듣고, <그 놈들 알기는 아는구나>하고, 또 장청(杖廳)에 가 들으니 행수군관의 거동을 보소.
[여러 군관님네. 아까 옥거리에 왔다 가던 걸인이 정말로 괴이하데. 아마도 분명한 어사인 듯하니 용모적은 것 내어 놓고 자상히 보소.] 어사또 듣고는, <그놈들 모두 귀신 같구나>하고, 현사(縣司-관에서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곳)에 들으니 호장역시 그러하다. 육방(六房)을 다 염문한 후에 춘향집에 돌아와서 그 밤을 샌 연후에 이튿날 조수(照數-수를 맞추어 보는 거) 끝에 가까운 읍의 슈령이 모여든다.
운봉영장(雲峰營將), 구례, 곡성, 순창, 옥과(玉果), 진안, 장수 원님들이 차례로 모여든다.
좌편의 행수군관, 우편의 청령사령(廳令使令), 한가운데 본관은 주인이 되어 하인을 불러 분부하되, [기생을 불러 다과상을 올려라. 육고자(六庫子-지방관가에 쇠고기를 바치는 관노)를 불러 큰 소를 잡고 예방(禮房)을 불러 고인(鼓人-북잡이)을 대령하고 승발 불러 차일을 치게 하라. 사령을 불러 잡인을 금하라.] 이렇듯 요란할 때 기치군물(旗幟軍物)이며 욱각풍류(六角風流-음악)가 반공에 떠 있고 푸르고 붉은 비단 옷을 입은 기생들은 비단 소매에 싸인 흰 손을 높이 들어 춤을 추고, [지화자 두덩실]하는 소리, 어사또 마음이 심란하구나.
[여봐라. 사령들아. 너의 원전(員專)에 여쭈어라. 먼데 있는 걸인이 좋은 잔치에 왔으니 주효나 좀 얻어 먹자고 여쭈어라.]
저 사령 거동 보소.
[어느 양반이길래 우리 안전(案前-하급 관리가 상전을 부르는 말)께서 걸인을 못 들어오게 하시니 그런 말은 내지도 마시오.]
등을 밀쳐 내니 어찌 아니 명관인가. 운봉이 그 거동을 보고 본관에 청하는 말이, [저 걸인의 의관은 남루하나 양반의 후예인듯 하니 말석에 앉히고 술잔이나 먹여 보냄이 어떠하오?] [운봉의 소견대로 하오마는.]하는데 <마는->소리가 뒷 입맛이 사납다. 어사또는 속으로, <오냐 도적질은 내가 하마 오랏줄은 네가 져라> 운봉이 분부하여, [그 양반 듭시래라.]51. 어사출도(御使出道)어사또 들어가 단정이 앉아 좌우를 살펴보니 당상의 모든 수령들이 다과상을 앞에 놓고 진양조(晉陽調)가 높아갈 때 어사또 상을 보니 어찌 아니 분통하랴. 못 떨어진 개다리 소반에 닥나무 젖가락, 콩나물, 깍두기, 막걸리 한사발이 놓였구나. 상을 발길로 탁 차 던지매 운봉이 갈비를 직신, [갈비 한 대 먹고지고.] [다리도 잡수시오.] 하고 운봉이 하는 말이, [이러한 잔치에 풍류로만 놀아서는 맛이 적사오니 차운(次韻-남의 운을 떼어 시를 짓는 놀이)이나 한 수씩 해보면 어떠하오?] [그 말이 올소.] 하니 운봉이 운을 내는데, 높을 고(高) 기름고(膏) 두자를 내어 놓고 차례로 운을 달 때에 어사또가 하는 말이, [걸인도 어려서 추구권(推句卷-시 가운데서 좋은 구절을 뽑아서 엮은 책)이나 읽었는데, 좋은 잔치를 당하여서 주효를 배불리 먹고 그저 가기 염치 없으니 차운 한 수 하겠사오이다.] 운봉이 반겨 듣고 붓과 벼루를 내어 주니, 좌중이 다 못하여 글 두 귀를 지었으되 민정을 생각하고 본관 정체(政體)를 생각하여 지었겄다.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金존美酒千人血) 일만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맛좋은 안주는 (玉盤佳肴萬姓膏) 일반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의 눈물이 떨어질 때 (燭淚落時民淚落)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歌聲高處怨聲高) 원망 소리 높았더라 이렇듯이 지었으되 본관은 몰라 보고 운봉이 글을 보며 속으로 생각하니 아뿔싸! 일이 났구나.
이때 어사또 하직하고 간 연후에 공형(公兄-고을의 戶長,吏房, 首刑吏 세 관속)을 불러 분부하되, [야 야, 일이 났다.] 공방(工房-工典을 맡아보는 관청)을 불러 포진(鋪陣)을 단속하고, 병방(兵房)을 불러 역마(驛馬)를 단속하고, 관청색을 불러 다담(茶啖)을 단속하고, 형방을 불러 문부(文簿)을 단속하고, 사령을 불러 합번(合番-합동 숙직)을 단속하며, 한참 일이 요란할 때 물색 없는 저 본관이, [여보 운봉이 어디 다니시오?] [소변을 보고 들어옵니다.] 본관이 분부하되, [춘향을 급히 올리라.]하고 주광(酒狂)이 난다.
이때 어사또가 군호할 때 서리에게 눈짓을 하니, 서리와 중방의 거동 좀 보소. 역졸을 불러 단속을 할때 이리 가며 수근, 저리 가며 수군수군. 서리와 역졸의 거동을 보소. 외올 낭건, 공단 싸개, 새 패랭이를 눌러 쓰고 석 자 감발을 두르고, 새 짚신에 한삼 고의를 신듯이 입고 육모 방망이와 녹피끈을 손목에 걸어 쥐고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남원읍이 술렁술렁 한다. 청파 역졸의 거동을 보소. 달 같은 마패(馬牌)를 햇빛같이 번쩍 들어, [암행 어사 출도야!]외치는 소리 강산이 무너지고 천지가 뒤집히는 듯, 초목 금수인들 아니 떨랴.
남문에서, [출도야!]북문에서, [출도야!]동서문에서 출도 소리가 청천에 진동하고, [공형들아!]외치는 소리에 육방이 넋을 잃어, [공형이오!]등채찍으로 후닥닥 갈기니, [애고 죽는다!]공방이 포진(鋪陣) 들고 들어오며, [안 하려던 공방을 하라더니 저 불 속에 어찌 들어가노?]
등채찍으로 후닥닥 갈기니, [애고 박 터지네.] 좌수(座首-鄕隱의 우두머리), 별감(別監-좌수의 다음 자리)은 넋을 잃고, 호장도 넋을 잃고, 파랑, 빨강, 노랑색의 옷을 입은 나졸들은 분주하네. 모든 수령들이 도망할 때, 거동 좀 보소. 인궤(印櫃)를 잃고 , 과줄(과자의 일종)을 들었으며, 병부(兵符) 대신 송편을 들고, 탕건 대신 용수를 쓰고, 갓 대신 소반을 쓰고, 칼집을 쥐고 오줌을 누려한다. 부서지니 거문고요, 깨지느니 북과 장고로다.
본관이 똥을 싸고, 멍석 구멍의 생쥐 눈 뜨듯 하고 내아로 들어가서,
[어 추어라. 문 들어오다 바람 닫아라. 물 나른다 목 들여라.]
관청색은 상을 잃고 문짝을 이고 내달으니 서리와 역졸이 달려들어 후닥닥, [애고 나 죽네.]52. 이화춘풍(李花春風) 이때 어사또가 분부하되, [이 고을은 대감이 좌정하시던 고을이라, 헌화를 금하고 객사 현용성관(現龍城館)으로 옮기어라.] 좌정한 후에, [본관은 봉고파직(封庫罷職-파면시켜 官庫를 쓰지 못하게함)하라.]분부하니,
[본관은 봉고파직이오!]사대문에 방을 붙이고 옥형리를 불러 분부하되, [네 고을 옥수(獄囚)를 다 올리라.]호령하니 죄인을 올리거늘, 다 각각 문죄한 후에 죄없는 자는 놓아 줄 때, [저 계집은 무엇이냐?]형리가 여쭈오되, [기생 월매의 딸이온대, 관청 뜰에서 포악히 군 죄로 옥중에 있사옵니다.
[무슨 죄냐?]형리가 아뢰되, [본관 사또의 수청으로 불렀더니 수절이라 수청을 아니 들려 하고 관정(官庭)애서 포악한 춘향이로소이다.]어사또가 분부하되,[네년이 수절한다고 관정포악하였으니 살기를 바랄소냐? 죽어 마땅하되 내 수청도 거역할까?]춘향이 기가 막려, [내려오는 관장마다 모두가 명관이로구나. 수의사또 들으소서. 충암절벽 ㄴ은 바위가 바람이 분들 무너지며 청송(靑松), 록죽(綠竹) 푸른 나무가 눈이 온들 변하리까. 그런 분부 마옵시고 어서 바삐 죽여 주오.]하며,
[향단아, 서방님 어데 계신가 보아라. 어젯밤에 옥문간에 오셨을 때 천만당부하였더니 어디로 가셨는지 나 죽는 줄 모르는가?] 어사또가 분부하되, [얼굴을 들어 나를 보라!]하시니, 춘향이 고개를 들어 대 위를 살펴보니 걸색으로 왔던 낭군이 어사또로 뚜렷이 앉았구나. 반 웃음, 반 울음 으로, [얼씨구나 좋을시고, 어사 낭군 좋을시고. 남원읍내 추절(秋節) 들어 떨어지게 되었더니, 객사에 봄이 들어 이화춘풍 날 살린다. 꿈이냐 생시냐, 꿈을 깰까 염려로다.] 한참 이리 즐길 때에 춘향모 들어와서 한없이 기뻐하는 말을 어찌 말하랴.
춘향의 높은 절개가 광채 있게 되었으니, 어찌 아니 좋을손가. 어사또는 남원 공사(公事) 닦은 후에 춘향 모녀와 향단이를 서울로 데려갈 때, 위세가 당당하니 세상사람들이 누가 아니 칭찬하랴.
이때 춘향이 남원을 하직할 때 영귀(榮貴)하게 되었건만 고향을 이별하니 한편 기쁘고 또 한편 슬프지 아니 하랴.
놀고 자던 부용당아 너 부디 잘 있거라 광한루 오작교며 영주각도 잘 있거라 <봄풀은 해마다 푸르러지되 왕손은 다시 못 돌아오느니라> 나를 두고 이른 말이로다 다 각기 이별할 때 만세무량 하옵소서 다시 보기 망연이라.
이때 어사또는 좌우도(左右道)를 돌며 민정을 살핀 후에 서울로 올라가 어전에 절하니, 삼당상(三堂上-육조의 判書, 參判, 參評)에 입시(入侍)하사 문부(文簿)를 사정(査正)한 후에 임금깨서 크게 칭찬하시고 즉시 이조참의(吏曹參議-正二品) 대사성(大司成-성균관장, 정삼품) 을 봉하시고 춘향으로 정절부인으로 봉하니, 은혜에 감사하며 물러 나와 부모 전에 뵈온대 성은(聖恩)을 축수하시더라.
이때 이판(吏判), 호판(戶判), 좌우영상(左右領相)을 다 지내고 퇴사(退社) 후에 정절부인과 더불어 백년을 동락할 때에 정절부인에게 삼남 이녀를 두었으니 모두가 총명하여, 그 부친을 압두(壓頭)하고 계계승승하여 지거(職居) 일품(一品)으로 만세 유전(遺傳)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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