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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州朴氏(충주박씨)

한들 약초방 2015. 3. 8. 14:44

 

忠州朴氏(충주박씨)

 

충주박씨() 시조 박영()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인 사벌왕() 박언창()의 11세손으로서 《충주박씨세보()》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박신()은 검교신호위대장군()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박원숭()은 삼사우사(使)를 역임했으며, 증손 박득승()은 첨의평리()를 지냈다. 관향을 충주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충주는 고구려 영토로 국원성() 이었는데, 신라가 유리왕 때 그 곳을 점령해서 진흥왕 때 소경()으로 삼고 귀족인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동경( : 경주의 옛 이름)에서 옮겨와 대를 이어 살면서 상주박씨에서 분관하여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그 외 자료가 없이 신라사()의 기록에 의한 추론일 뿐이다.

의정공파(), 강릉공파(), 참판공파(), 제주공파(), 집의공파(), 판서공파(), 함경도파(), 평안도파(), 찬성공파(), 영동공파(), 첨정공파(), 문간공파(), 의정공파()

 

충주()는 충청북도 중앙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BC 3∼4세기에는 마한에 속하였다. 그 뒤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었으나, 다시 고구려에 속해 475년(고구려 장수왕 63) 국원성()이라 하였다. 557년(신라 진흥왕 18) 국원소경()이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중원소경()이라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충주라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 충주목()이라고 하였다. 995년(성종 14) 창화군()으로 바꾸고 절도사(使)를 파견하여 중원도()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가 1018년에 전국의 8개 목 중 하나가 설치되어 양광도()에 소속되었다. 1254년(고종 41)에 국원경()으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환원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는 충주로 강등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충주목이 되었다.

1395년(태조 4) 충청도관찰사를 두었으며, 명종 · 광해군 · 인조 · 숙종 · 영조 등 여러 시기에 모반 등으로 인해 유신현() 또는 충원현()으로 개칭되면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 충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 실시로 충주부가 폐지되었고 충청북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8년(순종 2) 도청을 청주로 이전시키고 군수를 두었다. 1917년 충주군 읍내면이 충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56년 7월 충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중원군으로 분리되었다. 1989년 중원군 살미면 목벌리()와 이류면 만정리() 일부를 충주시에 편입하였고, 1995년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하여 충주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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