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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제기密城齊記

한들 약초방 2015. 4. 28. 16:48

 

 

 

                         밀성제기密城齊記

 

 

齊在密陽治北 推火山下 新羅王子 密城大君而作也 是爲追慕 南距嶺南樓僅 數弓而興大君壇爲相望也 維我朴爲東國大族世所公稱 維我朴爲東國大族世所公稱 而其源則出平新羅始祖王也 新羅末景明王子八大君 曰密城, 曰高陽, 曰達成, 曰竹城, 曰沙伐, 曰完山, 曰江南, 曰月城 也各爲一派 而密城之裔尤稱其繁衍 其後自密城又分爲 異貴者有數十之多 而子孫之盛 彌嶺南蔞全城可謂不億其麗矣 源深遠之理固有如是者 而後孫之所以追慕報本之道 又當如何哉 大君當日退老千菜邑其後衣履之藏傳云 在密州南樓之北而末得其詳豈非一大恨事也哉 新羅紀元千九百七十八年壬戌 夏因暴雨土壤得見臣壙於樓傍 州人及子孫皆謂大君之藏是也  遂封之以完而自後屢回 設壇奉享之議起終有以成之 今嶺南樓北有 曰新羅王子密城大君之壇是也 以每年三月三日 九月九日 虔行祀事 盖天數百年之間 人事盛衰顯晦之疏有如是也 裔孫所感懷者且後如何哉 所謂風流之峴洗陋之亭末和其會在何地 而能不有施顧瞻敎也 今斯齊之起其非晩且遲也哉 窈雄大君之蹟將畿乎 永晦辛旣壇而祀之又且雄字於壇北相望之地 遠挹遺芬徐馨於千百載之下於是乎 不遺基本之義有司言 而子孫之事有司述也 豈非幸者歟 今夫南川江上之雲炳舞鳳山下之草樹果皆昔日之狀 而朝暮四時之觀今古無有異者아(주석;아)登齊眺 望者宜其多曠懷也 始倡其議而董後者秀庸而僅畢正堂不幸作故 來贊踵其事 延及七年 而善竣之其勞皆可紀也 齊之制度其鋸麗爲間凡二十一 棟楹櫰間皆大梴直也 東隅別有一祠 是乃大君子孫 三韓壁控都大將軍諱郁 春享所也 西舍四間扁曰洗陋享 盒用大君當日遨遊堂號也 東舍五間扁曰推火齊 盒用舊太 將軍祠前號也 門又三間 役始癸丑正月工訖 於戊午三月歲月之經爲七年 工費亦屢百萬 而損力優者不可無紀 故別列刻於石而竪之千傍 熙秉 英培二君以藷宗意來貴齊記 於泰坤非所當者 而盡力應俊固裔孫事故敗書之如此云齒  新羅紀元  二千三十六年 戊子 三月 朔日 後孫 泰坤 謹記

주석;아 ; 어조사아(컴지원관계상 입력이 안되는 자가 있음)

 

번역문

재실이 밀양 북쪽 추화산 아래에 있으니 신라왕자 밀성대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남으로 영남루와겨우 두어능선거리에 있는 대군단을 서로 바라보는 위치더라, 우리 박씨는 동국의 대족으로 세상 사람들이 같이 일컫는 바인데 그 근원은 신라 시조왕으로부터 전해 왔더라, 왕자 형제 팔대군은 밀성, 고향, 속함, 죽성, 사벌, 완산, 강남, 월성등지의 대군으로 각각 일파씩 되었으나 밀성대군의 자손이 더욱 번성하여 그후에 밀성으로부터 또 다른 관향으로 나누어진 문중이 수십으로 번창하니 전국에 뻗쳐서 그 숫자를 헤아리지 못할정도라, 근원이 깊으면 흐름이 멀리 뻗치는 이치는 진실로 이같으니 후손이 근본을 갚는 추모의 도리도 또한 어떠하리요, 대군이 당일에 채읍에 퇴로한 그 후로 의구의 장이 밀양 영남루 북쪽에 있다고 전하였으나 그 자새히 알지못하니 어찌 크게 한스러운 일이 아니리요, 신라기원 일천구백칠십팔년 인술 여름 폭우에 흙이 무너져 영남루곁에 큰 천광을 발견하여 고을 사람들과 자손이 다 말하기를 대군의 무덤이 이것이라 하고 드디어 완전히 봉하고 여러번에 걸쳐 설단 봉향하기로 의결을 이루어 마침내 성취하니 지금 영남루 북쪽에 있어 가로되 신라 왕자 밀성대군의 단이 이것이라, 매년 삼월 삼일과 구월 구일에 삼가히 제사를 봉행하니 천수백년 사이에 인사의 성하고 쇠함이 나타나고 묻힘의 자취가 이와같음이 있더라, 자손의 감회가 또한 어떠하리, 이르는바의 풍류현 세루정은 일찍이 있었던 곳을 알지 못함이 아니리요, 가만히 생각하니 대군의 사적이 장차 길이 묻혀짐이 가까울즈음에 이미 모아 제사 하니 능히 돌이켜 첨모하여 흐느낌이 있지 아니 하리요, 이제야 이재실을 일으키니  늦고도 또한 웅장한 집을 단 북쪽에 서로 마주보는 땅에 지어서 끼친 향기로움과 남겨두신 영향으로 천백년 뒤에까지 멀리 당기도록 되었으니 이제서야 그 근본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할수 있으니 자손의 일을 지음이 있는지라, 어찌 다행 스러움이 아니리요, 지금 남천강위의 구름 연기와 무봉산 아래의 풀과 나무는 과연 다 옛날의 형상이니 아침 저녁과 사시로 보아도 지금과 옛날이 다름이 없더라, 재실에 올라가서 바라보면 마땅히 광회가 많으리라,처음 재실 짓기를 창의하고 공사를 감독하던 수용씨는 정당을 지은후에 불행히 별세하고 내찬이 그일을 맡아 칠년이나 노력한것은 기록 할만하더라, 재실의 제도가 심히 거대하고 화려하여 칸수는 스물한칸이요, 기둥과 서까래는 다크고 곧더라, 동쪽 모퉁이에 별도로 있는 사당은 대군 자손 삼한벽도공 대장군 휘는 욱의 제사받드는장소이더라, 서재 사칸은 세루정이니 대군 당시 오유의 동재 오칸은 추화재니 대장군 사당의 옛날 이름 이더라, 대문 삼칸은 계축년 정월에 시작하여 무오년 삼월에 준공하니 칠년간 지난 세월 공사비도 또한 수천만원인데 성역을 많이 베푼자를 기록할수 없어 별도로 비석을 세워 새겨주고 희병, 영배, 두분이 제족의 뜻으로 와서 태곤에게 기문을 담책하니 감당할 바 아니나 힘을 다하여 공사에 응하는 것이 자손의 할일이라 감히 써서 이같이 이르노라,  신라기원 이천 삼십육년 무오 삼월 삭일

후손 태곤은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