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犀)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아들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의 11세손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고려 고종(高宗)때 몽고(蒙古)의 장수(將帥) 살리타이가 쳐들어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이어 귀주(龜州)를 공격하자 그는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이를 물리쳐서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후에 문하시랑평장사 (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음성백(陰城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죽성박씨(竹城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서(犀)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음성(陰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음성박씨 家는 시조 서의 아들 재가 고려조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역임했고,
손자 현계(玄桂)는 충숙왕(忠肅王)때 전리총랑(典理摠郞)과 평해부사(平海府使)를 거쳐 정승 윤석(尹碩) 등과 함께
조적(曹 )의 난(亂)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이등공신(二等攻臣)에 책록되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슬하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문서(文瑞)는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차남 문길(文吉)은 지군사(知郡事)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다.
조선창업(朝鮮創業)때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던 순(淳)은 문길(文吉)의 아들이다.
왕위계승을 다투어 골육상쟁의 피바람을 일으켜 여러 왕자(王子)를 죽이고 등극한 태종(太宗)의 패륜을 개탄하여 태조가 고향인 함흥(咸興)으로 내려가자 태종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고 여러번 사자(使者)를 보냈으나 그때마다 태조가 사자를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때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로 있던 순(淳)이 자청하여 하인도 딸리지 않고 평복으로 혼자서 새끼 딸린 어미말을 타고
함흥에 들어가서 행궁 앞 소나무에 새끼말을 매어놓고 어미말을 타고 들어가니, 어미말과 새끼말이 서로 쳐다보며 울어댔다. 태조는 평복으로 찾아온 옛 친구를 맞이하여 시끄럽게 울어대는 말의 사연을 묻자 그가 말하기를 "새끼말이 길가는 데 방해가 되어 매어 놓았더니 어미말과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하며 "비록 미물이라도 지친(至親)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
하고 태조와 태종의 멀어진 사이를 풍자하여 비유하니 태조가 척연히 슬퍼하고 잠저의 옛 친구인 순(淳)을 머물러 있게 하였다. 하루는 태조와 순이 장기를 두고 있을 때 마침 쥐가 그 새끼를 껴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순이 장기판을 제쳐놓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한양(漢陽)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였다. 순이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허락을 받고 행궁을 떠나올 때 태조를 모시고 잇던 신하들이 이전처럼 이 차사도 죽일 차비를 하고 있었다.
태조는 옛친구와의 우의를 생각하여 차마 죽일 수 없어 시간을 끌다가 순(淳)이 용흥강(龍興江)을 건너가 추격이 어려울 것을 짐작하여 칼을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이미 강을 건넜거든 쫓지 말라"하였다.그러나 순은 도중에 병이 나서 시간을 지체하다가 나루터에서 추격자들에게 붙잡혀 허리를 베이었다.
그후 태종은 순에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리고, 또 화공에게 명하여 그 반신을 그려서 그의 공(功)을 치하했으며 관직(官職)과 토지(土地)를 내리는 한편 자손을 벼슬에 등용하였고,부음을 듣고 자결한 부인 임씨(任氏: 대사헌 임헌의 딸)에게 열녀(烈女)의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