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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록대부 밀성부군 휘 원 제단비명

한들 약초방 2015. 3. 18. 16:43

영록대부 밀성부군 휘 원 제단비명

 

 

아아! 우리선조인 영록대부(榮祿大夫) 밀성군부군(密城君府君) 휘는 원()이니 승국(勝國)의 명신이다.조고(祖考)는 충헌공 휘 척이며,고의 휘는 성진이니 충숙왕조의 조현대부로 흥위위의 정용장군에 협찬공신으로 황증 문하평리의 사적(事蹟)을 고려사에서 볼수있다.비는 하남군부인 하동정씨(河南君夫人 河東鄭氏)이다

부군은 일찍 등과하여 충숙왕조에 벼슬이 판전교시사에 이르고 규의선력공신(揆儀宣力功臣)으로 밀성군에 봉하였고 황증 문하찬성사(皇贈門下贊成事)이다. ()는 밀성군부인 밀양손씨)이다.삼남을 출생하니 장남의 휘는 윤겸이니 벼슬은 중랑장이다. 차남은 윤문이니 벼슬은 삼중대광으로 보문각 대제학이며 밀성군에 봉함에 이르고, 삼남은 휘 윤무이니 전서사인(典書舍人)이다.차남 윤문에게 6남이 있는데 장남은 밀양이다.호는 낙촌이요 전법판서를 역임하고 봉숭대부로 판전교시사로 밀성군에 봉하였고 다음은 대양이라 이르고 익조공신에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으로 밀천군에 봉하였고 다음은 소양이라 이르고 진사로 뜻을 지키고 변하지 않는 굳센 절개였으나 중국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은 계양이라 이르고 정포은(鄭圃隱)과 동년에 진사로 급제하여 벼슬은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검교참찬에 의정부사(議政府事)이고 다음은 재양(載陽)이라 이르고 장사랑으로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이르렀다.세상에서 육남대가(六男大家)라 일컬었다.이후는 기록하지 않는다.! 지금으로 부터 부군(府君)의 세대가 6백년이나 지났다. 문학과 충절에 당시의 고관선비들이 아름답다 칭송하였던 바다. 또한 후손들이 이어서 번창하니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대대본조(代代本朝)에서 끊어지지 않음이 어찌 부군의 적덕(積德)한 여음(餘蔭)이 아니리오. 그러나 세대가 멀어서 부군 이상을 모신묘소(墓所)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서 후손들의 한이서렸다.고로 부군과 조부와 부와 3세의 단비를 밀주 귀명동 경모재 뒤에 설치하여 제사를 받들어 올리니 후손 용보가 그 규모의 협소함을 고민하다 거자(巨資)를 내어 단소를 확장하고 단비를 고쳐 처리하니 어찌 다행이 아니리오.족인(族人)이 만호(萬鎬)로 하여금 행장문을가지고와서 나에게 명문을 청하니 한 후손으로 문사(文士)도 아닌데 쉽게 감당못해 고사(固辭)하나 그 정이 더욱 간절하니 가히오래 사양 못하고 감히 당돌하게도 우와 같이 서술하고 잇따라 명에 이르되 빛나도다 부군(府君)이여 고려조의 명경(名卿)이여 빛난 문벌 맑게 높아 대를이어 문채(文彩)나네 일이 많아 힘을 쓰니 밀성군에 봉해지고 중국에도 공로 미쳐 황증(皇贈)으로 찬성사(贊成事)라 효자아들 3명이요 손자들은 뜰에 찾네 세대오래 멀어지니 봉영(奉塋)잃어 슬퍼하여 후손들이 한이되어 설단하여 제사올려 단을넓혀 비()세우니 자손들이 정성다해 정영(精靈)께서 부모모셔 같이 흠양같은 제사 수억되는 후손들이 더욱 음영(蔭榮)입으리라

新羅紀元 2035年 戊午 10月 

後孫 奭遠 謹撰 

後孫 容甫 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