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재 密城齋
밀성대군(密城大君) 박공 휘 언침(朴公 諱 彦沈)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1978년 대군의 재단이 상망(相望)하는 이곳 삼한벽공도대장군 욱(郁)의 익성사 치재소(致祭所)인 추화재 옛터에 창건하여 정당(正堂)을 밀성재, 서사(西舍)를 세루정(洗陋亭), 동사(東舍)를 추화재(推火齋)라 편액(扁額)한 집이다. 동사(東舍)인 추화재는 밀성박씨대종회 사무실로, 서사(西舍)의 세루정은 청년회 사무실로 사용하며 활발한 종사 활동을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원래는 밀양부(密陽府)의 성황사(城隍祠:한 고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제사하는 곳)로서 추화산정(推火山頂)에 있었는데 그 성황사 주신(城隍祠主神)으로 삼한벽공도대장군 휘 욱(三韓壁控都大將軍 諱 郁)과 그 두 부인 그리고 삼중대광사도 광리군 손긍훈(三重大匡司徒 廣理君 孫兢訓: 밀양 손씨의 上祖) 등 사위(四位)의 소상(塑像)을 봉안하고 관부(官府)에서 제향(祭享)을 올렸다.
1580년(선조13 庚辰)에 밀양부사 하진보(密陽府使 河晋寶)가 연로(年老)하였는데 산정(山頂)에 오르내리기가 불편하다 하여 성내(城內 : 內一洞 신당마을)로 이건(移建)하였고
1674년(현종15 甲寅)에 부사 이희연(李喜年)이 다시 남림(南林: 三門洞)속으로 이설(移設)한 일이 있었다.
1875년(고종12 乙亥)에 고을 유생 안인원(安仁遠) 등이 도백(道伯:관찰사)에게 진정하여 성황사(城隍祠)의 원위치를 찾아 추화산정(推火山頂)으로 복원재건하고 추화사(推火祠)라 하였다.
1910년(순조4 庚戌)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하자 관에서 제사하던 것이 폐지되어 후손들에 의하여 제향하여 오다가 1912년에 사우(祠宇)가 심히 퇴락(頹落)하여 이를 후손들이 성력(誠力)을 모아 중수(重修)하였다
1937년(乙丑)에 교동 추화산정(推火山頂)의 추화사를 내일동 대지 동쪽에 신축(新築)하여 삼한벽공도대장군과 두 부인의 소상(塑像)을 옮길 당시 사우를 익성사(翊聖祠)로 고쳤으며 서쪽 아래에 재사(齋舍)를 신축하여 추화재(推火齋)라 편액(扁額:현판)하고 단소와 사우의 재숙(齋宿)을 겸하니 밀성박씨 재소의 시창(始創)이며 추화재는 곧 밀성재의 옛집이다.
추화재 건립 후 20여년이 지난 1965년(乙巳) 춘계제향후 재청에서 확장하여 고쳐 지을 것을 공론으로 결의 1965년~1971년까지 오천여만원의 기금을 조성 1971년(辛亥) 춘향후 정당의 위치를 봉무산(鳳舞山) 아래 구릉(丘陵)을 대응하여 영남루 북정(北庭)의 밀성대군단을 서로 마주 보도록 방위를 정하여 건축설계와 배치를 하고 공사의 규모를 확정 1972년(癸丑)에 정당의 정초(定礎)를 기공하여 1978년(戊午)에 준공하고 정당에 밀성재(密城齋)라 편액하였다.
1979년(乙未) 건립기적비를 세우고 이어서 위토답 조성사업과 익성사 중건사업을 진행했으며 1991년(辛未)에 대종회 이사회의에서 공궤청(供饋廳-식당)을 신축하기로 결정 1992년(壬申)에 공궤청을 완공하고 1995년(乙亥)에 전사청(典祀廳)을 완공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