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박씨(固城 朴氏)
고성(固城)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부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6가야(六伽倻)중 소가야(小伽倻)의 도읍인데 신라시대(新羅時代)에 고자군(古自郡)으로 불리다가 고려(高麗) 때철성부(鐵城府)로 개칭하였으며, 조선(朝鮮) 때고성현(固城縣)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고성군(固城郡)이 되었다. 고성 박씨(固城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아들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의 11세손인 박서(朴犀)의 중始祖(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서(犀)는 1231년(고려 고종 18) 8월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을 때몽고(蒙古) 장수 살리타이(撒禮塔)가 쳐들어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이어 귀주(龜州)를 공격하자 김중온(金仲溫: 삭주분도장군)·김경손(金慶孫: 정주분도장군) 등과 함께 귀주의 성(城)을 사수(死守)하여 1개월간의 격전 끝에 마침내 이를 물리쳤다. 귀주에서 물러난 몽고군이 개성(開城)을 먼저 함락하고 고종(高宗)의 항복을 받은 후 군세를 가다듬어 귀로에 다시 귀주를 공격하자 이를 대파하여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때왕명(王命)으로 지병마사(知兵馬使) 최임수(崔林壽)와 감찰어사(監察御史) 민희(閔曦) 등이 와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끝내 거부하다가 왕명을 어기지 못해 항복하지 않고 성문(成文)만 열어주자 일찍 항복하지 않고 어명(御命)을 거역했다고 하여 조정(朝廷)에 입조(入朝)하지 못하고 죽주(竹州)로 귀향하였다. 그 후 서의 현손 혁충(奕忠)이 고려조에서 이조전서(吏曹典書)와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고, 서의 행장(行狀)과 사적(事蹟)을 갖추어 조정에 제출하여 그 공적이 높이 평가되자 서가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고 철성백(鐵城伯)에 추봉되었으며, 혁충에게도 철성(鐵城)을 세습(世襲)하게 하여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게 되자 후손들이 서(犀)를 중始祖(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 죽산박씨족보(竹山朴氏族譜)에 의하면 서의 아들로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지태자첨사(知太子諂事)를 지낸 실(實)로부터 고성 박씨(固城朴氏)가 분적(分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839년(헌종 5) 조정(朝廷)에 정문(呈文)하여 윤허(允許)가 되어 다시 죽산 박씨로 복구관(復舊貫) 되었다고 하며, 원본(原本)이 경남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慶南南海郡二東面茂林里) 박태민(朴太玟)씨 종가(宗家)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혁충(奕忠)의 맏아들 보로(寶老: 초명은 흡)가 고려 우왕(禑王) 때밀직부사(密直副使)로 서해도부원수(西海道副元帥)겸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수차에 걸쳐 왜구(倭寇)를 토벌했으며, 1378년(우왕 4)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안주상원수(安州上元帥) 겸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에 이르러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다. 한편 보로의 아들 형제 중 장남 희고(希古)는 춘추관(春秋館)이 수찬관(修撰官)을 거쳐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및 지제교(知製敎)를 지냈으며, 그의 아우 전고(專古)는 조선조에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내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어 아들 취신(就新)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세조(世祖) 때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던 취신(就新)은 안성(安城)과 합천군사(陜川郡事)를 역임했고, 그의 맏아들 희성(喜成)이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둘째 희명(喜明)은 사직(司直)을, 막내 희굉(喜宏)은 영동현감(永同縣監)과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으며, 세조(世祖) 때무과(武科)에 급제한 미(彌)는 홍원현감(洪原縣監)과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지냈다. 희성(喜成)의 아들로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지낸 준(儁)과 참봉(參奉) 임(任), 금오랑(金吾郞) 효(涍)의 3형제가 크게 현달했으며, 희명의 아들 영형(永亨)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대도호부사(大道護府使)를 거쳐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세조(世祖) 때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낸 식(埴)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의 금생(今生)의 아들 애상(愛祥)이 어득강(魚得江)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고성 현령 조응도(趙凝道)와 함께 여러 차례 왜적을 격파하여 용양위부호군에 올랐으며, 통영(統營)의 귤도(橘島)전투에서 용전하다가 조응도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여 현종(顯宗) 때현감을 역임한 내경(內徑)과 더불어 고성 박씨의 전통(傳統)을 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