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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의중 사실

한들 약초방 2017. 3. 19. 10:56

의중 사실


자 자허(子虛). 호 정재(貞齋). 초명 실(實). 공민왕 문과(文科)장원, 전의직장(典儀直長)을 거쳐 헌납(獻納) ·사예(司藝)가 되고, 우왕문하사인(門下舍人)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대사성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냈다. 1388년(우왕 14)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철령위(鐵嶺衛) 철폐를 교섭하여 성취하고 귀국, 창왕 때 공신(功臣)에 책록되고, 공양왕 때 한양(漢陽) 천도설이 대두되자
음양설(陰陽說)의 허황함을 지적하여 그에 반대, 뒤에 예문관제학대사성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하고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가 되었는데,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장이 우아하였다.
문집 《정재집(貞齋集)》이 있다.

 

철령위문제 [ 鐵嶺衛問題 ] ;

고려를 지배하던 원(元)나라의 세력이 기울고 1368년 명나라가 일어난 이후, 명나라 태조(太祖)가 철령 이북의 땅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라 하여 자기 나라에 귀속시켜 철령위를 설치하고 병참군영으로 만들 계획이라는 사실이, 명나라에 다녀온 설장수(乾長壽)를 통해 알려졌다.
이에 고려에서는 이 곳에 성(城)을 신축하여 대비케 하는 한편, 박의중(朴宜中)을 다시 명나라에 보내어 철령 이북의 문천(文川) ·고원(高原) ·영흥(永興) ·함흥(咸興) 등과 공험진(公險鎭)까지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 철령위 설치를 중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조정에서는 최영(崔瑩)이 중신회의를 열어 타개책을 논의한 결과 명나라와 화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그러나 1388년(우왕 14) 3월 명나라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왕득명(王得明)을 고려에 보내 랴오둥[遼東]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70여 개의 병참(兵站)을 두는 철령위 설치를 정식으로 통고해 오자, 급기야 우왕(禑王)은 요동 정벌을 명하게 되었다. 이에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이성계(李成桂)를 우군(右軍)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좌군(左軍)도통사로 삼고 3만 8천여 군사로 평양을 출발하였다. 결국 이성계의 회군(回軍)으로 요동 정벌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철령 이북도 명나라에 귀속되지는 않았다.

 

정재집 ;

본집 9권, 별집 5권, 후집 6권, 합 20권 7책. 목판본. 규장각 ·장서각도서. 본래 초간본이 있었는데, 6세손 박제억(朴齊億)이 1892년(고종 29) 재편집, 간행하였다.
저자는 박세당(朴世堂)의 아들로, 의기가 투철하여 당시의 세력가였던 이단하(李端夏) ·김석주(金錫胄) 등의 비리를 탄핵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의 폐비에 반대하는 <대유생성규헌(代儒生成揆憲)>을 올렸다가 심한 고문 끝에 죽었는데, 전자는 별집 권4 ·5의 <감류편(坎流編)>에,
후자는 <기사민절록(己巳愍節錄)>에 자세한 경위가 실려 있다.
윤선거(尹宣擧) ·성혼(成渾) ·이이(李珥)에 대한 날무릉답(捏巫凌踏)을 해제할 것을 주청한 상소도 있으며, <추우록(追尤錄)>에는 1677년 문과회시(文科會試)에서 부제(賦題)로 인해 송시열(宋時烈)의 난통지설(亂統之說)에 은밀히 동조하였다고 몰리게 된 경위가 실려 있다.
<호남염찰계본별단(湖南廉察啓本別單)>은 호남지방에 대한 11개 항에 걸친 안찰 기록으로서 고지식하고 타협을 모르는 소장 관리의 기개가 잘 드러나 있는데, 특히 흑산도 등 여러 섬에 관한 조사와 건의가 주목된다. 그 외 《이생전(李生傳)》 《반남선생가전(潘南先生家傳)》 《서김장군일사(書金將軍逸事)》 등 전기도 주목된다.

 

공험진 [ 公咽鎭 ] ;

오늘날의 함경도는 갈라전(曷懶甸)이라 하여 국초부터 동여진이 살면서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완안부(完顔部)가 북만주에서 부족을 통일하고 이곳을 위협하자, 고려는 윤관을 보내 갈라전을 점령하고 9성을 축성하면서 1108년(예종 3) 공험진에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고 비(碑)를 세워 경계를 표시하였으며, 병민(兵民) 523정호(丁戶)를 남쪽에서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그런데 9성의 위치에 대한 학설이 분분한 가운데 공험진의 정확한 위치도 이에 따라 서로 다르다.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전기 관찬사료를 따라 두만강 이북에 비정하는 입장은 공험진이 소하강(蘇下江) 강변에 있었다고 본다.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를 해석한 정약용(丁若鏞)의 견해에 따른 길주(吉州) 이남설은 마운령과 마천령 사이를, 고적답사를 통하여 주장한 함흥평야설은 함흥군 대덕리산성에 비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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