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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城朴氏(고성박씨)

한들 약초방 2015. 3. 8. 10:12

 
固城朴氏(고성박씨)
 
고성박씨() 시조 박서()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넷째 아들인 죽성대군() 박언립()의 11세손으로서 1231년(고려 고종 18) 8월 서북면병마사(西使)로 있을 때 몽골 장수 살리타이()가 쳐들어와 철주()를 함락하고 이어 귀주()를 공격하자 김중온() · 김경손() 등과 함께 귀주성을 사수하여 1개월간의 격전 끝에 마침내 이를 물리쳤다. 귀주에서 물러난 몽골군이 개성()을 먼저 함락하고 고종()의 항복을 받은 후 군세를 가다듬어 귀로에 다시 귀주를 공격하자 이를 대파하였다.

이때 왕명으로 지병마사(使) 최임수()와 감찰어사() 민희() 등이 와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끝내 거부하다가 왕명을 어기지 못해 항복하지 않고 성문만 열어주자 일찍 항복하지 않고 어명을 거역하였다고 하여 곧바로 죽주( : 죽산의 옛지명)로 귀양 갔다. 이후 다시 관직에 나가 문하찬성사()에 이르렀다.

박서의 현손 박혁충()이 이조전서(), 한림원시강(), 태자첨사()를 지냈고 박서의 행장()과 사적()을 갖추어 조정에 제출하여 그 공적이 높이 평가되자 평장사()에 추증되고 철성백( : 철성은 고성의 옛 지명)에 추봉되었으며 박혁충을 철성부원군()에 봉하였다. 후손들이 죽산박씨()에서 분적하여 박서를 시조로 하고 고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죽산박씨족보()》에 의하면 박서의 아들로서 한림학사()와 지태자첨사()를 지낸 박실()로부터 고성박씨()가 분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839년(헌종 5) 조정()에 정문()하여 윤허되어 다시 죽산박씨로 복귀하였다고 하며 원본()이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 박태민()씨 종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하여 박서의 후손중 남해계는 구관인 죽산을 따르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고성박씨 및 음성박씨는 본래 죽산박씨에서 분적하였는데, 다시 죽산으로 합보 되었다.
남해파(), 고성파()

 

고성()은 경상남도 중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변한시대에 고자미동국() 또는 고사포국()이었다. 737년(신라 효성왕 1)에 신라에 흡수되어 고자군()으로 불리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고성군()으로 바뀌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는 고주()로 확장되었고 후에 철성부()로 승격되었다가, 1018년(현종 9) 고성현으로 강등되었다. 1266년(세조 3) 지주사()로 승격되었으며, 공민왕 때 현령을 파견한 후 지속되었다.

1604년(선조 37) 거제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거제현 두룡포(지금 )로 이전하였다가 두룡포가 1617년(광해군 9) 고성현으로 이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고성군이 되었다.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용남군의 동해면이 편입되었다. 1938년 고성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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