固城朴氏(고성박씨)
고성박씨(固城朴氏) 시조 박서(朴犀)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넷째 아들인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11세손으로서 1231년(고려 고종 18) 8월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을 때 몽골 장수 살리타이(撤禮塔)가 쳐들어와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이어 귀주(龜州)를 공격하자 김중온(金仲溫) · 김경손(金慶孫) 등과 함께 귀주성을 사수하여 1개월간의 격전 끝에 마침내 이를 물리쳤다. 귀주에서 물러난 몽골군이 개성(開城)을 먼저 함락하고 고종(高宗)의 항복을 받은 후 군세를 가다듬어 귀로에 다시 귀주를 공격하자 이를 대파하였다.
이때 왕명으로 지병마사(知兵馬使) 최임수(崔林壽)와 감찰어사(監察御史) 민희(閔曦) 등이 와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끝내 거부하다가 왕명을 어기지 못해 항복하지 않고 성문만 열어주자 일찍 항복하지 않고 어명을 거역하였다고 하여 곧바로 죽주(竹州 : 죽산의 옛지명)로 귀양 갔다. 이후 다시 관직에 나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박서의 현손 박혁충(朴奕忠)이 이조전서(吏曹典書),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고 박서의 행장(行狀)과 사적(事蹟)을 갖추어 조정에 제출하여 그 공적이 높이 평가되자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고 철성백(鐵城伯 : 철성은 고성의 옛 지명)에 추봉되었으며 박혁충을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하였다. 후손들이 죽산박씨(竹山朴氏)에서 분적하여 박서를 시조로 하고 고성(固城)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죽산박씨족보(竹山朴氏族譜)》에 의하면 박서의 아들로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지태자첨사(知太子諂事)를 지낸 박실(朴實)로부터 고성박씨(固城朴氏)가 분적(分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839년(헌종 5) 조정(朝廷)에 정문(呈文)하여 윤허되어 다시 죽산박씨로 복귀하였다고 하며 원본(原本)이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 박태민(朴太玟)씨 종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하여 박서의 후손중 남해계는 구관인 죽산을 따르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고성박씨 및 음성박씨는 본래 죽산박씨에서 분적하였는데, 다시 죽산으로 합보 되었다. 남해파(南海派), 고성파(固城派)
고성(固城)은 경상남도 중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변한시대에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또는 고사포국(古史浦國)이었다. 737년(신라 효성왕 1)에 신라에 흡수되어 고자군(古自郡)으로 불리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고성군(固城郡)으로 바뀌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는 고주(固州)로 확장되었고 후에 철성부(鐵城府)로 승격되었다가, 1018년(현종 9) 고성현으로 강등되었다. 1266년(세조 3) 지주사(知州事)로 승격되었으며, 공민왕 때 현령을 파견한 후 지속되었다.
1604년(선조 37) 거제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거제현 두룡포(지금 統營)로 이전하였다가 두룡포가 1617년(광해군 9) 고성현으로 이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고성군이 되었다.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용남군의 동해면이 편입되었다. 1938년 고성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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