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사 중건기(聖母祠重建記)
옛적부터 신명(神明)한 군주의 탄생이 보통사람과 다르니 화서(華胥: 伏羲氏 母 華胥에 살았다.)가 거인(巨人)의 발자국에 감응(感應)하고 창복(昌僕 : 高陽氏의 어머니)은 달에 감응 하였으니 신라의 성모 파소씨(婆蘇氏가 잉태한 것도 이와 같은 부류(部類)이다. 아- ! 하늘이 중국과 외지(外地)를 한결같이 보살필 것이니 이 복희씨와 신농씨(神農氏)와 황제(皇帝)와 소호(少昊)와 전욱(전頊)을 탄생하여 중국을 다스리는 성군(聖君)이 되게 하셨으니 어찌 동방의 백성들이 의지할데 없는 것을 어여쁘게 생각지 않겠는가 ? 이에 파소에게 명령하여 신서술(神仙術)을 배우게하여 바다를 건너 선도산에 살게하여 나정(羅井)에 알을 낳게하니 광채(光彩)가 찬란하여 새와 짐승이 기뻐하여 춤을추니 육부의 촌장(村長)이 비로소 임금님을 모시게되고 삼한(參韓)을 통일하여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가르침을 밝혀서 고려와 조선의 문명한 정치(政治)를 열게하고 二千年에 뻗쳐 제향(祭享)을 받자옵고 수많은 자손에게 혜택을 입히시니 성모의 덕택이 왕제의 어머니와 아름다움을 함께 했다 할 것이다. 신라의 옛도읍에 숭덕젼(崇德殿)이 있는데 여기서 바라보면 서쪽에 우뚝솟은 산이 곧 선도산이다.경주의 아낙네와 아이들이 흔이들 얘기하는 양산 오색구름속에 말이 울고 신선이 꿇어 앉았던 일과 동천(東川)에서목욕시키던 모습을어제의 보는 듯 얘기하니 성모의 자취가 오래 갈수록 더욱 새로움을 알 수 있다. 선도산 위에 옛부터 사당(祠堂)이 있었는데 순묘임진(純廟壬辰)에 후손 참봉 지혁(之赫)과 동규(動圭)가 중수 하였는데 지금은 오랜세월 동안에 퇴패(頹牌)함으로 전침랑(전寢郞) 기문(基汶)이 그의 九代祖 언수(彦秀)가 임진왜란에 전패(殿牌)를 모시고 선도산에 피난 했는데 성모와 성자의 신령께서 이같은 위급한 때에 보우(保佑)하시와 검은 구름으로 엄호(掩護)해 주시어 오히려 광채를 남기셨으니 성모묘(聖母廟)를 수리하는 일은 나의 당연한 일이라하고 자력으로 사당을 중수하니 박사문 찬배(朴斯文 瓚培)가 이때 재랑(齋郞)으로 재직하여 그의 종친 종진(宗親 宗鎭)에게 편지하기를 문헌록도 거의 되었고사당도 준공하게 되었으니 기문(記文)을 받아 수록하지 않겠는가 ? 대개 태진군(泰鎭君)이 마침 상직(相稷)과 함께 유(留)하고 있었으므로 상직에게 공사(工事)의 전말을 기록케 하고저 함이라 상직이 사양해도 되지 않았다.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옛적에도 성모이 사당이 있었던가 ? 내가 대답하기를 여러 황제의 모친 사당은 상고할 곳이 없으나 지금 직예성 보정부 망도현성(直隸省 保定府 望道縣城)동쪽에 요모묘(堯母廟)가 있고 북곽(北郭)에 제요묘(帝堯廟)가 있으니 열넉달(十四月)만에 낳았다는요 임금이나 한 개 표주박 같은 태포(胎胞)에서 탄생한 시조왕이 사적(事蹟)은 다르나 두 사당이 극히 가까운곳에 있는 것만은 같을 뿐 아니라 은(殷)나라와 주(周)나라의 사람에 설 (契 : 殷의 시조) 기 (기 : 周의 시조 后稷이다) 가 종묘에 봉향(奉享)하였는데 현조(玄祖)의 알을 먹고 설(설)을 낳았다는 간적(簡狄 : 설의 母) 과 거인의 발자취를 디디고 후직(后稷)을 낳았다는 강원(姜嫄)인들 어찌 제사 올리지 않겠는가 ? 또 성인으로 일컫는 것을 의심하기로 내가 말하기를 삼국사(三國史)에 기록되어 있으니 김부식이 중국에 가서 이부(吏部)를 뵈었는데 한 그 임족자를 보이면서 말하기를 신라 시조왕의 모친인 성모(聖母)의 초상(肖像)이라 하고 또 찬(讚)하기를 선도성모가 어진 임금을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 하였으니 성모의 칭호는 고칠 수 없을 것이다.이어서 옷깃을 여미고 감탄(感歎)하기를 마땅히 그럴 것이다.신라가 일어날 때에 탄생한 사적(事蹟)이특이한 것과 정치의 융성(隆盛)함이 상고의 제왕과 서로 부합(符合)하여 동방의 백성들이 능히 상고의 제왕들의 가르침을 지켜오게 된 것이 신라시조왕의 끼치신 덕택(德澤)이다.이런 뜻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 사당이 다만 박씨만이 받들어 모실뿐 아니라 이나라 사람들이 마땅히 다 함께 존경(尊敬)해야 할 것이다.
신라기원 1972년 기미(己未) 광주 노상직 삼가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