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대군단 사실
密城大君壇事實
(원문 공사중)
壇在慶尙南道 密陽郡 舞鳳山下南川江上嶺南樓北畔 則大君受封宮城遺址也 (事載與地勝覽及權近本朝遺事) 按舊譜 崇禎七年(檀紀三九六七年)甲戌 縣令四吾堂(恭間公樓后)菊潭壽春(杏山公世均后)等三十七人 與本府使李惟達 謀欲立祠千此 享祀大君而遂値末果 自此以降三百年間後屬 慨然有志 遂欲先輩末就之事而事甚重大 落落難合矣 在新羅紀元九百八十年 甲子以密陽宗人之主催 通告八域 大會宗族千嶺南樓 建議說檀享之事 是年五月三日也 遠近赴會者 以千數而合辭同情 於是 攻石勒碑 四閱月而功畢於乎盛域 曠世末遑之擧 遠則遠易則易矣 謀按 是年(檀紀四二五七年新羅紀元一九八一年甲子)前壬戌開五月十三日 大雨 暴注
단이 경상남도 밀양군 무봉산 아래 남천강 위의 영남루 북쪽 언던에 잇으니 곧 대군의 수봉한궁성의 유지다.[사실 여지승람고 권근의 보조유사에 실려잇음] 구보를 고찰하니 숭정7년 갑술에[단기3967년] 현령 희와 수춘등 37인이 본부사 이유달과 이곳에 사당을 세워 대군을 얄사하려 하엿으나 이루지 못하고 이로부터 3백년간 뒷사람들이 개연히 듯을 두고 선배의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고져 하엿으나 일이 심히 중대하여 가마득히 합의치 못하엿더니 신라 기원 1981년 갑자에[서기1924]밀양의 종인이 주최하고 팔도에 통고하여 크게 종회를 영남루에서 개최하고 설단하여 향사할 것을 건의하니 이해 5월 3일이다. 원근에서 회의에 온 사람이 천이나 되는지라 말과 듯이 통하여 비를 다듬엇으니 4개월이 지나 공사를 마친지라 대견하다. 오래하지 못한일이 속하다면 속하고 쉽다면 쉽도다.
삼가 고찰하니 이해 [단기 4257년 서기 1924년]전 임술 윤5월13일에 큰비가 솓아져 겉흙이 패인 뒤에 영남루 북족들에 하나의 큰 묘자리 흔적이 잇는지라. 영남루 아래잇던 사람이 보고서 달려가 부근에 사는 박시에게 말하여 여러 사람이 와서 보니 과연 오래된 묘자리라. 이에 전 군수 박상일 교리 바해철 주사 박태진 박상억 등이 들은 즉시 살펴보고서 밀양의부로들이 자고로 전해오는 말이 밀성대군의 묘소가 영남루 부근에 잇다는 것이 과연 헛되고 허망한 소리가 아님을 이로서 믿음직하다. 그러나 이미 증명할만한 고증이 없은 즉 그 신중하여야 할 도리에 의심의 없을 수 없고 도한 등한이 보아 넘길 일도 아니어서 이에 설단을 하고 비를 세워 별도로 제각을 세우고 향사를 하면 마음에 미안할 바 없고 의리에도 당연히 행하여야 할 일이므로 밀양과 청도의 두 고을의 조인과 협의를 하여 단지 대부할 것을 관에 신청하니 익년 게해년 겨울 허가를 얻으니라. 이로 인하여 8도에 종회를 소집하여 결의를 거쳐 드디어 그자리에 돌을 갈고 단을 모으로 단상에 비를 세우니 단지가 무릇 12평이라. 면에 다듬은 돌을 갈고 상하양방에 대를 샇고 대 위에 돌아가며 석란 석주 20개를 세우니 고가 모두 길이 넘엇다. 도 쇠줄로 옆에 석란과 석주를 궤여쳐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한가운데의 축단한 비면에 밀성대군의 단이라 스고 전면에 향로를 두고 향로 양족에 아래로 무장관 대석을 세우고 문 주위에 두개의 둥근 유리 장명등을 곶아놓고 쇠로 자물쇠 놓아 사람이 들어 오는 것을 금하고 문박 두곁에 석대위에 각각 사자석이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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