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단 비음기 密城壇碑陰記
예천에 근원이 있고 영지도 뿌리가 있으니 사람이 그 근본을 모를 수 있으리오. 주나라 때에도 소호씨의 후예로써 임금이 되었다 하여 조상을 숭상하였고 한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송나라에 이르러 계통의 설이 더욱 자상하였다. 우리 동방은 인륜이 크게 밝아 사대부집에서 더욱 씨족의 고증이 컸다. 대개 우리 박씨는 조상이 신라에 기초하여 그 근원이 멀고 그 자손이 번성하여 경명왕에 이르러 八공자가 있으니 밀성대군 언침이 그중 맞이다. 대군이 신라의 운이 장차 쇠퇴함을 알고 채읍인 밀양의 산수간에서 늙어 마침내 견훤의 침란을 면하고 드디어 고려의 각빈이 되었으니 풍류현 세루정이 지금도 오히려 전하고 자손이 눌러 살며 밀성을 관향으로 하였다. 대군의 묘소가 밀양 영남루의 북쪽에 있었으나 실전하였으니 우리 인조 갑술(인조十二년)에 밀양군수 이유달이 본손과 함께 사림에 의논하여 누상에서 제 지낸지 수삼년이 되었으니 이는 백대 훌륭한 거사였다. 그러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그 일이 드디어 그쳤었는데 영조 을사년에 각파 본관에서 통문을 발하여 사당지을 일을 말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고종 신사년과 병진년에 이어서 단제 모실일을 의논함이 한두번이 아니더니 전번 임술년 봄에 원덕사를 옥천에 짓고 대군을 배향했더니 그해 여름 폭우로 누의 북쪽에 한 큰 무덤 흔적이 나타났다. 보든 보첩과 분묘의 좌향을 고찰하니 일일히 부합되는 지라 본손과 그 고을 인사들이 분주히 와서 보고 다들 이게 대군의 묘임이 틀림없다 하여 바로 봉축함즉 하였으나 일이 신중한지라 써 단향키로 의논하고 원근제족이 탄성갈력하니 모든 단의 역사는 후손인 장억에게 일임하여 돌을 축단하고 큰비를 세웠으되「신라왕자 밀성대군 단」이라 하다. 천여년 못한 일을 이루고 길이 만세의 유전을 지으니 이는 천리와 인정의 아름다움이다. 후손 시독 참봉 한묵과 주사 상호와 부령 두영과 주사 태진과 유학 상진과 춘금이 용대더러 사설을 기록하는 글을 쓰라 위촉하니 내 늙고 혼미하여 능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으나 선조를 위한 일이라 의리에 감히 사양치 못하고 그 시종을 비뒷면에 쓰고 명하여 왈
경명왕의 八남에 밀성대군이 형이다 그 때 아님을 알고 봉읍에서 노닐다 전자는 세루정이요 고개는 풍류현이라 유적이 길이 남으니 千년의 명지로구나 영남 루의 언덕에 산 곱고 물 맑도다 가보나 전하는 말에 대군의 묘소라 하니 후손이 의논하고 부사도 좋다하여 누상에 제물을 올리니 혼령이 흠향했으리 이에 시축을 의논하여 의식이 시작되니 한 고을이 회의를 하고 태학관에서 허락하라 하늘이 우사를 보내어 묘소가 나타나니 자세히 보지 않아도 묘소임이 틀림없도다 그러나 신중히 할지니 감히 봉축치 못하고 단을 쌓고 비를 세워 해마다 향사하네 많은 후예들이 성의를 다하니 복이 양양히 나리어 창성하고 번식하리라
신라 기원 一九八一년 갑자 五월 일 후손학생 용 대근술
후손시독 해 철근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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