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단 3대조비문 景德壇三大祖碑文
대군은 신라 왕의 큰아들이요 밀성은 그에게 봉한 읍이다. 휘는 언침이니 세대가 오래되어 능묘를 실전하여 그의 채읍이였던 무안리에 단을 모셨다. 삼가 고찰하니 세보에 시조의 휘 혁거세왕은 하늘로 부터 내리신 분으로 박으로 성을 하고 국호를 신라라 하니 그 성덕대업이 마땅히 동국의 황제훤헌씨나 태호복희씨와 버금한지라 왕의 사자는 남해왕이요 남해왕의 사자는 유리왕이요 유리의 뒤에 파사 지마 일성 아달라의 四왕이 있으니 시조로 부터 이에 이르도록 무릇 五세 七왕이요 아달라의 뒤에 二十二세에 신덕왕에 이르러 또 김씨에 이어 천명으로 왕이 되니 대개 하늘이 성조의 옛것을 도로 성조의 후손에게 주심이니라. 신덕왕의 사자가 경명왕이요 왕에 八공자가 있었으니 맏이가 곧 대군이요 차례로 고양대군 휘 언성이요 속함대군 휘 언신이요 죽성대군 휘 언립이요 사벌대군 휘 언창이요 완산대군 휘 언화요 강남대군 휘 언지요 월성대군 휘 언의니 경명왕이 세상에 궁예와 견훤의 무리 비록 서북경에 난리를 일으켰으나 나라의 나라로써의 위세는 짐작하였는지라 대군이 부왕의 적자로서 그 왕통을 이어받지 않고 봉읍을 받아서 한가로이 자적하여 일생을 마치니 포석정의 화나 고려에 항복하는 일이 없이 우리 자손에게 한정없는 복을 내리시니 얼마나 훌륭한가. 대군의 지덕과 고절은 주나라의 태백과 오나라의 계찰을 본딴 것일가 신라나 고려때에 사기가 궐문이 많아 대군의 어질므로도 그 전기를 질정하여 쓰지 못하였으니 그 얼마나 아까운가. 대군의 후에 三한 벽공도대장군 휘욱과 요동독포사 휘난이 있으니 두대에도 또한 공덕이 현저하여 단의 동과 서에 배식토록 하였으며 태사 언부와 도평의사 언상과 복야 언인과 밀직사 언양과 판도판각 천익과 삼사좌윤 을재와 四문진사 원과 밀성군 척과 규정 현과 밀직부원군 중미와 영동과 창원부사 영과 구산군 천과 태안군 원의와 은풍군수 치온이 있으니 다 밀성으로부터 분관하였고 또 반남 진주 문의 강진의 관향이 있으니 같이 대군이 조상이 되니 본지의 일가 그 수억뿐 아니니 대개 대군의 큰 어짐과 후한 덕이 암암리에 계시하여 이렇게 번연함이니라 시전에 말하기를 「인자는 반드시 뒤가 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큰 덕은 반드시 세대로 향사한다」하니 그 대군을 두고 말함인저 그전 인묘(仁廟) 갑술에 본부의 이공 유달이 대군의 외손으로 본손들과 고을 사람과 같이 영남루에 설제하였었는데 이로부터 사당을 세워서 공경히 모시자는 의논이 대대로 이어오나 이루지 못하였으니 저번에 홍문관 시독해철이 종중의 선두에 나서서 공덕 있는 조상을 불가불 제지내야 하고 아버지와 한 아버지의 일도 불가불 수행하여야 한다 하야 공사를 을축중동에 시작하여 정묘 계동에 준공하고 삼가 단호를 경덕이라 올리다 명에 왈
경명왕 八남에 대군이 거장이다 왕통의 적파요 운월같이 높은 상태네 조의자장과 오의례찰을 이에 모방하였네 밀성산 푸르고 밀성물 넘쳐 흐르네 아름답고 장원함이여 굽어 보고 우러보네 종국을 돌아보니 대운이 지내였네 궁예도 물여우요 견훤도 도깨비라 홍곡이 높이 날며 굽어보고 우망을 웃네 몸이 편코 뜻도 편하니 덕이 높고 사업도 넓네 자손이 하도 많으니 하늘이 보답 어김없네 세대가 구원하여서 능력이 적실치 않아 자손도 통탄하고 사림도 슬퍼했네 봉분짓자는 논의가 그 전부터 말이 있었네 화산 서쪽 취령 동쪽에 이곳이 좋은 터일세 제손이 힘을 다하니 그림자같고 소리같네 바야흐로 단과 비갈이 이루어 볼만도하다 희생과 술을 정결히 하여 세시에 헌향하니 양양히 계시는 듯 향내 널리 퍼지네 천만년이 가도록 예의 더욱 빛이나리 돌에다 새기고 이마를 조아려 재배합니다
정묘년십이월 일 후손 승훈랑홍문관시독 시 룡 근찬 후손 통정홍문관시독 해 철 근명 방후손 승훈전참봉죽산후 전 필 근서 통정농공상부국장 해주 오 세 창전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