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우리소리

원 가 (怨歌)

한들 약초방 2015. 9. 27. 10:43

원    가 (怨歌)

 

  

 

物叱乎支栢史                           뜰의 잣나무는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가을에도 시들어 떨어지지 않는 것에 비추건대
汝於多支行齊敎因隱                 너를 어찌 잊겠느냐 말씀하시어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그 인격을 우러러 보았더니, 이제 당신의 변심이여
月羅理影支古理因潤之叱          그것은 연못에 비친 달 그림자가
行尸浪 阿叱沙矣以支如支         물결이 일면 사라져 버리듯
貌史沙叱望阿乃                       하찮은 일에 변모함이니,
世理都 之叱逸烏隱第也            세상이 모두 그런 때로구나.
          <   後句亡   >

 

 

※ 신라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더불어 대궐 뜰 잣나무 밑에

 

바둑을 두다가 신충에게 말했다.
   

"뒷날에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로 남으리라."

신충은 감격하여 일어나서 절을 하였다. 몇 달 후에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의 일은 까맣게 잊고서 등용시키지 않았다. 신충은 왕을 원망하며 노래를 지어서 그잣나무에 붙였다.

 

그러자 갑자기 잣나무가 시들고 말았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신하가

 

잣나무에 붙어 있는 그 노래를 왕에게 전달하니 왕은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정무(政務)가 번잡하여 하마터면 충신을 잊을 뻔했구나!"

이에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그제야 잣나무도 되살아났다. 이로써 신충은 효성과 경덕 왕조에 걸쳐서 그

 

총애가 두터웠다.

   

경덕왕(효성왕의 아우) 22년 계묘에 신충이 두 친구와 약속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남악으로 들  어가 두 번

 

씩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깎고 불도를 닦는 사람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산

 

에 숨어 대왕에게 복을 바치겠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영정이 금당 뒷벽에 있다. 남쪽에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삼화상전에 보면 신충의 봉성사가 있는데 여기와는 서로 틀린다. 그러나 신

 

문왕 때와 계산하면 경덕왕과는 이미 백여 년의 거리가 있다.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이 과거세의 인연이 있

 

다 함은 이 신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니 마땅히 잘 알아 밝혀야겠다.)라 한다. 또 딴 기록에는,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고승전에는 이순이라 했다)이 일찍부터 발원하여 나이 50이 되자 마침내 출가하여 절을 지었다.

 

천보 7년 무자에 나이 50이었다. 조연의 작은 절을 고쳐 큰 절로 만들어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

 

명을 공굉 장로라 하였다. 절에 살기 20년 만에 죽었다 하니 삼국사의 기록과는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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