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우리소리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한들 약초방 2015. 9. 27. 10:20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去隱春皆林米                       간 봄을 그리워함에,
毛冬居叱哭屋尸以憂音           모든 것이 울면서 시름하는구나.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얼굴에 주름살이 지려하는구나  
目煙廻於尸七史伊衣              눈깜짝할 사이에  

逢烏支惡知作乎下是              만나보게 되리.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낭이여, 그리워하는 마음에 가는 길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다복쑥 우거진 구렁(험한 마을)에서 잠을 잘 수 있는

                                         밤도 있으리.

  신라 제 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라고 하는 급간(級干:신라 관등의 제 9위)이 있었다. 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 놓고 매일 출근하더니, 한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의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갔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당전(幢典:오늘날의 부대장에 해당하는 신라 때의 군직) 모량부(牟梁部- 사람이름)의 익선아간(益宣阿干:아간은 신라 관등의 제 6위)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의 창직(倉直- 곡식창고를 지키는 직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급히 가느라고 낭께 알리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죽지랑은 이 말을 듣고,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그 곳에 갔다면 찾아 볼 필요가 없지마는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위로하고 대접해야겠다고 하였다. 죽지랑은 익선의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떡과 술을 득오에게 먹인 다음,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마침 간진이라는 사람이 추화군(지금의 밀양) 능절(能節)의 조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싣고 가다가, 죽지랑의 선비를 존대하는 풍도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막히고 변통성이 없는 것을 품위가 없고 천하게 생각하여, 가지고 가던 벼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득오를 보내오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진절사지(珍節舍知-신라 관직의 제13위)가 쓰는 말안장을 더 주었더니 드디어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신라에서 화랑을 관장하는 관직)가 이 이야기를 듣고 익선을 잡아다가 그의 더럽고 추한 마음을 씻어 주고자 하였는데,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갔다. 때는 동짓달 몹시 추운 날인데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하게 하여 얼어 죽게 하였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모량리 사람은 모두 벼슬에서 몰아내게 하였고, 승복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반면 간진의 자손에 대하여는 평정호손을 삼아서 표창하였다. 결국 죽지랑은 부산성 창직에서 고생하는 득오를구하게 된 것이다.

 

    

처음 술종공이 삭주 도독사가 되어서 장차 임명받은 곳으로 가려하니 때마침 삼한에 병란이 일어나

 

기병 3천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하였다. 일행이 죽지령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고개의 길을 닦고 있

 

어 공이 보고 찬미하였는데, 거사도 역시 공의 위세가 혁혁함을 좋게 여겨 서로의 마음이 감동되었다.

 

술종공이 부임지에 간 지 한 달이 되었는데 꿈에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더욱 놀랍고 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었더니, "거사가 죽은

 

지 며칠이 되었다."고 하였다. 돌아와 말하니 죽은 그 날이 꿈꾼 날과 같았다. 공이 생각하되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라 하고 군사들을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하게 하고 돌미륵 하나를

 

세웠다. 그 아내가 꿈꾸던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죽지라 하였다. 자라서 벼슬에

 

나아가 유신공과 함께 부원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무의 4대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죽지랑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다.

   

당의 식언에 격분하여 도륙하던, 하나 대속자가 된 죽지 원수를 애도한다.
   

이 노래는 유사 권 2 효소왕에 죽지랑 조에 실려 있다.
   

술종공이 朔州都督使가 되어서 임소에 가는 길에 그 때는 삼한이 병란이 있는 때라, 기병 삼천으로 호

 

송하였는데, 죽지령에 다다르니 웬 한 거사가 그 산 길을 평평하게 다스리고 있었다. 술종공은 탄복하

 

였는데, 거사도 거사도 공의 위풍을 보고 감심하여 서로 의기가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공이 삭주에

 

도임 하여 다스리기를 한달 뒤에 꿈에 거사가 방에 들어온 것을 보았고, 공의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

 

다. 놀랍고 괴이해서 이튿날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까 거사는 일전에 죽었다 한다. 더욱이 그 죽었다는

 

날짜와 꿈의 날짜가 꼭 맞는다. "거사가 우리 집안에 인제 태어나리라" 공은 이렇게 말하고, 사람을

 

시켜서 거사의 주검을 영상 북쪽 봉우리에 후히 장사하고, 돌로서 미륵을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워 주었

 

다. 부인은 꿈 꾼 날부터 태기가 있어서 아이를 낳은 뒤에 죽지랑이라 이름 지었다. 자라서 벼슬에 나

 

아가 김유신과 함께 부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문 네 임금의 재상이 되고, 나

 

라를 안정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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